117화
그녀가 바람의 마력을 다룬다는 건 이미 꽤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느닷없이 독 연기를 살포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에 윈터가 바람에 몸을 실어 빠르게 뒤쪽으로 빠지려고 했다.
그 순간 쿵, 하고 그녀의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애석하게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젠장.”
윈터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상대가 터뜨린 것은 독 연기가 아니었다.
아군에게도 적군에게도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저것은 오직 윈터에게만 유효한 공격이었다.
연기에 마력의 폭주를 일으키는 만타라스 성분이 섞여 있었다.
“아가씨!”
쉴 틈 없이 적들을 몰아붙이던 공격이 우뚝 멎었다.
전투 내내 윈터를 신경 쓰고 있던 엘리슨이 제일 먼저 이상을 눈치챘다.
제 움직임이 둔해지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열두 명의 사제들을 짜증스레 노려보며 윈터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수호자들이 나타나셨군.”
이미 그들 사이에서 정해진 신호였는지, 사제들이 나타나기 무섭게 크비누스 측 병사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각하를 호위해……컥!”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로널드가 다른 기사들에게 지시하며 그대로 사제들에게 검을 내질렀으나 그의 공격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왔다.
“다들 공격하지 마! 거울 방벽이 있어!”
사제들을 경계하며 윈터가 벼락처럼 외쳤다.
신전에서는 사제들에게 신성 마법 몇 가지를 가르친다.
수호자들이라고 불리는 열두 명의 사제는 그들 중 마력이 가장 방대하고 마법 수행 능력이 가장 뛰어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호오, 우리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군요.”
윈터의 외침을 들은 사제 하나가 작게 감탄했다.
그다지 기껍지도 않은 칭찬에 윈터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히 잘 알지. 선황 시해범.”
시종일관 빙글거리고 있던 사제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큽.”
꾹 참아도 참아지지 않는 듯 이내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상황과 맞지 않는 웃음소리는 상황을 더욱 살벌하게 만들어 주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한참을 낄낄대던 사제가 눈을 빛냈다.
“‘그자’는 1년을 넘게 버티더군요. 덕분에 우리도 그동안 꽤 많은 연구를 거쳤습니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었지만 윈터는 알아들었다.
저들이 말하는 ‘그자’가 선황 미쉘라라는 것을.
신의 문장이 새겨진 은색 목걸이가 사제들의 손에서 일제히 빛을 뿜어냈다.
“과연 당신은 얼마나 버틸지 기대해 보겠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사제들이 동시에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커흑.”
전신을 옥죄는 압박감에 윈터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심장을 묶어 둔 봉인이 파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새하얗게 뒤집혔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윈터의 신형이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엘, 리슨!”
온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참아 내며 윈터가 버럭 외쳤다.
사제들이 만든 원 바깥에서 줄곧 그녀를 부르고 있던 엘리슨이 흠칫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금빛 시선이 엘리슨을 향했다.
“약속대로 해. 알지?”
“하지만, 아가씨……!”
사제들의 주문은 계속되고 있었다.
거울 방벽을 두른 그들에게 누구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리어트에게 수호자들이 크비누스 군에 합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윈터는 이 순간을 이미 예상했었다.
그래서 윈터는 엘리슨에게도 미리 언질을 주었다.
굳이 엘리슨을 자신 옆에 붙여 둔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목숨으로, 유언으로 그녀에게 부채감을 남겨서라도 결코 메이딜리언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언젠가 한 번은 이렇게 해 보고 싶었어.”
전생을 기억해 낸 그 순간, 마력이 개화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윈터는 유리처럼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한 이 몸이 지긋지긋했다.
시도 때도 없이 미쳐 날뛰는 마력도, 가끔은 아주 끔찍했다.
“뭐, 얘들도 이 정도면 오래 참아 준 거지.”
진작 터져 없어졌을 몸인데, 봉인으로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누군가, 다양한 속성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윈터에게 ‘마나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고 한 적 있었다.
들을 당시에는 별로 탐탁지 않은 말이었으나, 돌이켜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만큼 사랑받았으면 돌려줄 줄도 알아야지.”
그토록 원하던 대로 마음껏 날뛰도록 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결말일 듯했다.
“……겸사겸사 내 메이도 구하고.”
마지막으로 본 얼굴에 불안감이 옅게 깔려 있었지.
윈터는 그가 부디 오래 아프지는 않기를 바랐다.
“안 그래, 엘리슨?”
“……전하께서, 많이 슬퍼하실 겁니다.”
곧 펼쳐질 상황을 예상한 듯 엘리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윈터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인걸.”
여전히 처절한 전투의 한복판이었다.
거울 방벽 너머에서 흙먼지가 튀었다.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과 먼지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내가 이렇게 쓰이게 된다니, 뭐,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윈터가 키득키득 웃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홀가분한 미소였다.
‘네게 걸린 목숨은 결코 너 하나의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 순간을, 그녀 하나만 예상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살아남아라.’
몇 번이고 당부하던 어머니의 말이 왜 이제야 떠오르는 것일까.
‘네가 살아남아야 이기는 것이다.’
윈터는 애써 서글픔을 삼켜 내었다.
바닥을 짚은 손이 흙바닥을 긁었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듯, 윈터는 제 손에 쥐고 있던 녹스를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이제 더는 필요가 없으니까.
“어머니에게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고 전해 줘. 그리고…….”
심장에 켜켜이 쌓여 있던 봉인들이 하나씩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천지가 그녀의 마력을 따라 박동했다.
윈터가 턱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닦아 내며 씩 웃었다.
“메이를 부탁한다.”
그것이 그녀의 유언이었다.
“무, 뭐 하는 짓이냐!”
윈터의 마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사제가 외쳤다.
선황 미쉘라의 마력을 폭주시켰을 때에는 오랫동안 만타라스를 복용한 상태였고, 수호자들의 마력은 크게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 선황은 1년을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윈터의 상황은 달랐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에 만타라스가 뿌려졌고, 거기에 그녀를 속박하고 마력을 증폭하는 신성 주문까지 더해졌다.
보통 사람에게는 마력을 상승시키는 것이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겠지만, 윈터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윈터의 마력은 그녀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고 종래에는 아군들까지 모조리 쓸어 버릴 것이다.
“감히 나를 폭탄으로 쓰려는데, 넘어가 줄 수 있어야지.”
그런 식으로 개죽음당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다.
멀리서 엘리슨이 군대를 물리는 게 보였다.
윈터가 그녀에게 명한 것은 단 하나였다.
‘내가 신호하면, 최대한 멀리 도망치세요.’
천천히 윈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로 물든 입가를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래도록 참아 내기만 했던 마력이 모두 해방되고 있었다.
“너희들은 오늘 여기서 나와 함께 죽는다.”
윈터의 몸이 새파란 마력으로 타올랐다.
당황한 수호자들이 몸을 물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강대한 마력이 이미 그들을 속박한 뒤였다.
“가, 감히……!”
“이런 상황은 예상 못 했나 봐?”
상대를 조롱하듯 윈터가 픽 웃었다.
그때 위험을 알리는 것처럼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메이딜리언의 연락이었다.
“……미안해, 메이.”
비록 듣지는 못하겠지만, 윈터는 메이딜리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곧 눈부신 광채가 그녀를 감쌌다.
“저 멍청이가……!”
멀리서 리어트가 버럭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마력들로 눈이 멀어 윈터는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아아, 이토록 찬란한 죽음이라니.”
황홀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윈터의 의식이 끊어졌다.
* * *
감히 윈터의 죽음을 언급한 죄로 거인 그레이는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짓이겨졌다.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서 일어선 메이딜리언의 눈에 살기가 가득했다.
그의 양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 펜던트로 향했다.
마력은 차고 넘치도록 있었다.
붉은 마석이 빛을 뿜어내며 맹렬히 윈터에게로 가 닿았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의 불안감을 확신으로 바꿔 주기라도 할 것처럼 윈터에게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마석의 빛처럼 메이딜리언의 시야가 점점 벌겋게 물들었다.
윈터는 안전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연신 되뇌어 봐도 속절없이 몸이 떨려 왔다.
“전하.”
윈터를 잃은 삶을 메이딜리언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그녀만을 위한 것인데 어째서, 어째서 윈터가 없단 말인가.
순식간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메이딜리언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꺽꺽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며 그대로 무너졌다.
“전하!”
근처에 있던 칸나가 황급히 달려와 메이딜리언을 부축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메이딜리언은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챈 칸나가 버럭 외쳤다.
그리고 이럴 때 메이딜리언을 다시 일으킬 만한 말은 단 하나뿐이다.
“이대로 주저앉아 있으면 아가씨는 언제 도와주러 갈 거야!”
역시나. ‘아가씨’라는 단어에 메이딜리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기도처럼 홀로 뭔가를 중얼거리던 그가 순식간에 칸나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그대로 제 팔을 내리찍었다.
“세상에, 뭐 하는 거야! 너 미쳤어!”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보며 칸나가 기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지금 당장, 전속력으로 황궁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