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그는 제국에서 거인 그레이라고 알려진 자.
제 몸집만 한 대검을 휘두르는 크비누스의 파수견이었다.
“무투 대회에서 보니 제법 감탄할 만한 실력이시던데, 언젠가 전하와 한판 붙어보고 싶다는 제 소원을 섭정께서 들어주셨습니다.”
“보기보다 쓸데없는 말이 많군.”
메이딜리언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레이의 입이 광포하게 벌어지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 그럼 입 다물고 검이나 내지르겠습니다. 잘 가십쇼, 전하.”
싸늘하게 정색한 그레이가 눈을 번뜩였다.
무식할 정도로 두꺼운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이 그대로 메이딜리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빠른 속도와 무지막지한 파괴력으로 그레이가 검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매서웠다.
그의 검이 지나간 자리마다 바닥이 움푹 팼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를 상대했다.
오히려 그가 피한 자리에 발을 헛디딘 다른 병사가 그대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계속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실 겁니까?”
그레이가 대검을 어린애 장난감 다루듯 휘두르며 메이딜리언을 도발했다.
줄곧 제 공격을 피하기만 하는 메이딜리언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상대에게서는 살기도, 분노도, 하다못해 열의나 흥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메이딜리언의 태도가 그레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하께서 위험에 처했는데도 도우러 오는 이가 아무도 없군요.”
메이딜리언은 그레이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의 공격을 피하며, 병사들을 베고 마력을 이용해 생명력을 흡수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레이는 집요하게 메이딜리언을 노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하!”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실려 검이 휘둘러졌다.
메이딜리언은 피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지나가는 병사들을 이용해 그레이의 공격을 피했다.
그도 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검을 맞대야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검으로 그레이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몇 번 검격이 오가고 나니 검날이 망가져 더는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너덜너덜한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메이딜리언이 이내 그것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레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벌써 포기하시는 겁니까?”
“아아.”
조롱 조의 어투에도 메이딜리언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픽 웃으며 제게 뿌려진 비방을 그대로 돌려줬다.
“섭정의 파수견이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시시해서 말이야.”
“무, 뭐?”
짧게 검을 나눈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메이딜리언은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저 당당한 눈빛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레이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 당혹스러웠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저 황자의 말이 그저 허황된 것처럼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 놀아 줄 시간이 없네. 비켜.”
“이 시건방진……!”
잠시 스친 불길함을 그저 기우라고 치부하며 그레이가 대검을 휘둘렀다.
늘 그의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나기만 하던 메이딜리언이 이번에는 역으로 가볍게 그레이의 검을 피해 뛰어올랐다.
그동안의 움직임은 정말로 모두 장난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메이딜리언은 사뿐하게 그레이의 대검 끝에 착지했다.
“다들 왜 내 곁으로 안 오는지는 모르나?”
“뭐?”
“죽고 싶지 않으면, 나와 닿지 않는 게 좋거든.”
“무슨……!”
순식간에 메이딜리언의 신형이 사라졌다.
당황한 그레이가 눈을 홉떴다.
“어, 어디냐!”
그레이가 버럭 외치며 주변을 향해 마구잡이로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검은 무용했다.
그저 허공만을 갈랐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젠장.”
그제야 그레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줄곧 자신이 우세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메이딜리언은 상처 하나 없었다.
쉴 틈 없이 반복된 공격 끝에 그레이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만, 메이딜리언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산뜻하기만 했다.
“비겁하게 숨지 말고 당장 나와!”
“숨은 게 아니라, 네가 못 본 거지.”
순식간에 그레이의 목이 틀어 잡혔다.
그는 메이딜리언의 공격이 어디서 들어온 것인지 볼 수조차 없었다.
“어, 어느 틈에……! 으, 으아악!”
경악을 감추지 못하던 그레이는 순식간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새카만 마력이 순식간에 그의 몸을 옥죄었다.
바위처럼 단단하던 거구가 힘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레이의 손에 들려 있던 대검이 허망하게 바닥을 굴렀다.
“넌 특별히 서서히 죽여 줄게.”
메이딜리언의 눈이 잔인한 빛을 띠었다.
서서히 생명력이 뽑혀 나가는 감각은 끔찍했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그레이가 바락바락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비명이 전장에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한 손으로도 섭정의 파수견을 무릎 꿇리는 모습에 크비누스 진영의 기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흐, 어리석은, 황자여!”
그르륵,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그레이가 외쳤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었으면서도 그의 눈빛은 아직 형형했다.
“나를 죽여도 너는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시끄럽군. 역시 혀부터 자를 걸 그랬나.”
“황도에 가도, 황좌에 앉아도 네가 원하는 것은 끝끝내 네 손에 쥐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의 하나 남은 눈에서 서서히 시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점점 폐가 짜부라지는 듯한 감각에 그레이가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입술을 뻐끔대며 살아남고자 바르작대는 그를 내려다보며 메이딜리언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도 될 저주인데, 어쩐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가 대체 뭘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있게 지껄여라.”
그레이의 목에서 손을 떼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그러자 그레이가 킬킬 웃었다.
“네가 감히 섭정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처럼 섭정께서도 너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갈 것이다.”
울컥 피를 뿜어내면서도 애꾸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가장 소중한 것.
메이딜리언에게 그런 것이 여러 개일리 없었다.
처음부터 단 하나였으니까.
“윈터 블라디미르.”
그 이름이 나온 순간, 줄곧 메이딜리언을 괴롭히던 불안감이 마침내 완벽한 형태를 갖췄다.
“그 여자는 오늘 죽는다.”
* * *
“결국 전투가 시작되는군요.”
파노니아 평원을 내려다보며 엘리슨이 중얼거렸다.
“아아, 오래도 걸렸지.”
윈터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십 년 가까이 계획해 온 일이었다.
드디어 오늘 눈앞에 그대로 펼쳐질 것을 생각하니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나저나 리어트 씨가 안 보이네요.”
주위를 둘러보던 엘리슨이 물었다.
리어트가 몇 번 아르카의 일을 도와주며 두 사람도 얼굴을 튼 모양이었다.
“수인족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으니까.”
“하긴, 그건 그렇죠.”
전력의 손실은 조금 속이 쓰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비누스의 모함에 그대로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대신 저쪽에서 후방 지원을 해 주기로 했어.”
윈터가 고개를 돌려 뒤쪽을 가리켰다.
줄곧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리어트가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맞췄다.
걱정과 불안으로 뒤범벅된 어두운 표정을 향해 윈터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와락 얼굴을 구긴 리어트가 팩 고개를 돌렸다.
“각하.”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던 윈터와 엘리슨을 향해 로널드가 다가왔다.
“준비는 다 마치셨나요?”
“물론입니다.”
“그럼 슬슬 출정해 볼까요?”
윈터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녹스를 꺼내 들며 말했다.
그들은 공작령을 향해 달려오는 크비누스의 군대를 파노니아 평원에서 막아 낼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윈터의 지시에 따라 로널드가 손짓하자 메이딜리언에게 주었던 것처럼 그들의 군대 사이에도 거대한 짐승의 모습을 한 마석 병기가 피어올랐다.
“맙소사.”
“저, 저게 대체 뭐야?”
“지난번에 로널드 경이 말씀하신 그…….”
“그냥 밟고 지나가기만 해도 이기겠다.”
척 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마석 병기에 군사들이 웅성거렸다.
다행히 사기충천에 꽤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대충 설명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어마어마하군요.”
엘리슨 또한 충격받은 얼굴로 말했다.
윈터는 그녀에게 장난스레 속삭였다.
“가격은 더 어마어마하답니다.”
새겨진 마법과 그걸 동원하기 위한 마력, 그리고 무수한 마석들까지.
저기에 들어간 자본력만 해도 성 하나 정도는 거뜬하게 사고도 남을 것이었다.
“우리도 가요, 엘리슨.”
“네, 아가씨.”
윈터가 말을 달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병사들이 와아아, 소리치며 달려갔다.
순식간에 교전이 시작되었다.
윈터는 마력을 가득 담아 녹스를 전방에 쏘았다.
그러자 거대한 얼음 방벽이 밀려와 순식간에 평원을 얼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병사들 사이에 숨어들어 숨통을 끊어 내는 메이딜리언의 방식과 달리, 처음부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화려하게 위치를 알리는 전투였다.
“저쪽이다!”
“블라디미르 소공작을 노려라!”
기꺼이 표적이 된 윈터를 향해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윈터의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달려드는 병사들을 무참히 베어 냈다.
그동안 윈터는 바람으로 군사들 사이를 헤집거나 베어 내고, 얼음 화살들을 쏘아 댔다.
상대도 마력 공격을 대비했던 것인지 곳곳에서 쉴드가 펼쳐졌으나 그 방어막은 마석 병기의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전황은 명백하게 윈터 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적군과 검을 맞대며 엘리슨이 경고했다.
상대의 공격이 생각보다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슨도 조심해요!”
윈터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치던 그때였다.
피잉- 하고 신호탄 같은 것이 하늘로 쏘아졌다.
퍽, 소리가 나며 터진 그것은 부연 보랏빛 안개를 전장에 퍼뜨렸다.
독인가 싶어 병사들이 황급히 코와 입을 가렸다.
“저거 설마…….”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분에 윈터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