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 *
새벽, 아직 동이 트지도 않아 어두컴컴한 시간에 무장한 기사들이 공작성에 모였다.
비장한 결기가 그들의 얼굴에 서렸다.
크비누스 진영의 움직임을 줄곧 주시하던 윈터가 오늘 출정을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안 돼요, 아가씨!”
그녀의 결정에 반발하는 칸나의 목소리가 어두운 공작성을 깨웠다.
윈터는 담담한 낯으로 칸나를 응시했다.
“저도, 데보라도 다 황자 전하를 따라가라니요.”
칸나가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보라도 칸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옆에서 시선을 보탰다.
그들의 말처럼 윈터는 두 사람을 전부 메이딜리언의 호위로 보냈다.
“나는 엘리슨이 있잖아.”
“그 사람은 그냥 책사라고요.”
“백 명의 칼보다 한 사람의 머리가 전쟁에는 더 유용할 때가 있지.”
“그래도 저만큼 아가씨를 제대로 지키지는 못할 거예요.”
윈터도 칸나의 의견에는 동의했다.
엘리슨은 비전투 요원이었다.
그러니 이 또한 메이딜리언을 위한 결정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엘리슨이 배신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괜찮아. 나도 내 한 몸은 지킬 수 있으니까.”
그렇다기엔 칸나도 데보라도 본 게 너무 많았다.
윈터의 능력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그만큼 위태로운 데다 반드시 대가를 요구했다.
“가능한 한 이번 전투 한 번으로 반드시 크비누스의 기세를 꺾어야 해.”
“알아요.”
“그러려면 메이가 황궁으로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알겠지.”
“……네. 그렇지만…….”
“우리는 버티면 그만이야. 꼭 이기지 않더라도.”
윈터가 데보라와 칸나의 손을 잡았다.
“너희가 도와줘.”
“…….”
“엘리슨만 내 곁을 지키는 것도 아니잖아. 호위대도 있는걸.”
“수인족 호위대 말씀이시죠?”
“그래. 그들도 꽤 믿음직해.”
“하지만 아가씨…….”
칸나가 뭐라고 다시 말하려고 했지만 윈터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이를 지켜 줘.”
“황자 전하가 공식적으로 제국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 건 아시죠?”
윈터의 말에 옆에서 잠자코 두 사람의 말을 듣고만 있던 데보라가 물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무려 무투 대회 우승자잖아요.”
메이딜리언이 결코 누구의 보호가 필요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하지만 윈터의 생각은 확고했다.
“생채기 하나도 없었으면 해.”
손톱 밑에 작은 가시 하나 박히지 않기를.
어떤 아픔도, 어려움도 없이 그저 잘 닦인 길을 편히 걸어가기를.
윈터는 메이딜리언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칸나와 데보라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메이딜리언은 단신으로 크비누스 진영을 상대해도 무리 없이 다 쳐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그를 오냐오냐 대하는 것은 전 대륙을 다 뒤져도 윈터 하나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메이딜리언도 마찬가지였다.
“들어가도 됩니까?”
이미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으면서, 뒤늦게 메이딜리언이 애써 화를 참는 낯으로 물었다.
윈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맞았다.
“그럼요, 전하. 출정 준비는 마치셨나요?”
“네. 그런데 대부분의 병력이 저한테 붙어 있던데요.”
메이딜리언의 눈빛에 비난이 어렸다.
뻔히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윈터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공작가의 기사들과 칼리스타는 나와 함께인데.”
“윈터.”
경고처럼 건네지는 이름에 윈터는 메이딜리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네가 빨리 가는 게 중요해. 알잖아.”
그녀의 손이 메이딜리언의 뺨을 감쌌다.
메이딜리언은 그 서늘한 체온을 꽉 붙잡았다.
타오를 듯 붉은 시선이 금방이라도 윈터를 삼켜 버릴 것 같았다.
“네가 황궁으로 가면, 크비누스는 어쩔 수 없이 황도로 돌아갈 거야.”
메이딜리언이 황도까지 가는 길을 뚫고 갈 수 있도록 최대한의 병력을 지원하고, 반대로 상대 진영의 병력은 분산시키는 것.
그것이 이번 전투에서 윈터가 맡은 역할이었다.
“우리는 그때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야. 알지?”
“……당신이 다치면 어떻게 해요.”
“그럼 네가 치료해 줘.”
처음으로 저에게 의지하는 윈터의 말에 메이딜리언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몸에 빠른 속도로 피가 돌았다.
흘러넘치는 애정을 참지 못하고 메이딜리언이 그대로 윈터의 허리를 감쌌다.
“그래도 다치지 마요.”
“응. 그럴게.”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품에 이마를 기댔다.
두 사람은 빈틈없이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전하, 갑자기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는……헉!”
메이딜리언이 잔뜩 화가 나서 가는 바람에 그의 뒤를 따라왔던 사람들은 애틋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을 보고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전투가 코앞인데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연신 다치지 말라고, 부디 안전하기만 하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솔직히 이번 전투에서 저 둘이 가장 덜 다칠 것 같았다.
무투 대회 우승자인 메이딜리언의 무력은 말할 것도 없었고, 윈터 또한 칼리스타의 주인이자 대마법사에 필적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둘이 힘을 합치면 세계 정복도 가능할 것 같은데, 서로만 서로를 애틋해 하는 상황에 다들 말은 안 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끼리끼리 만났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둘이 참 잘 어울린단 말이야.’
‘어디서 저렇게 비슷한 사람들이 만났지……?’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져 있던 두 사람은 뒤늦게 사람들의 기척을 알아차린 윈터 덕분에 후다닥 떨어졌다.
진작에 그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무시무시한 눈빛을 쏘아 대는 바람에 병사들의 군기는 더욱 바짝 날이 서게 되었다.
“다녀올게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메이딜리언이 이끄는 군대가 출정했다.
윈터를 등 뒤에 두고 가자니 영 찜찜했지만 그녀가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러기를 바랄 뿐이었다.
“건승을 빕니다, 전하!”
“모두 안전하게 돌아오세요!”
공작가의 식솔들이 저마다 외쳤다.
알 수 없는 아쉬움으로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제일 앞에 서 있던 윈터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더니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슬쩍 들어 보였다.
붉은 마석이 박힌 통신 아티팩트였다.
픽 작게 웃은 메이딜리언은 빠르게 말을 달렸다.
채 반나절이 되기도 전에 그가 이끄는 군대가 결전지 근처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기서 대기한다.”
“예, 알겠습니다. 전하.”
카르카스 산맥에 매복한 채 그들은 크비누스 진영의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저마다 목을 축이고 건량을 씹으며 애써 긴장을 풀었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산맥 아래를 내려다보며 홀로 앉아 있던 메이딜리언에게 패트리샤가 다가왔다.
공작령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퍽 기분이 괜찮아 보이더니, 점점 메이딜리언의 기세가 날카롭고 예민하게 벼려졌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메이딜리언은 짧게 대답하고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괜찮다는 말과 달리 누군가와 말을 섞을 만한 기분이 아니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공작령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림자 밑에 숨어 그의 신경 줄을 갉작였다.
“가능한 한 빨리 돌파해야겠습니다.”
애써 잡념을 지우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네, 그래야죠.”
패트리샤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임무를 맡은 병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전하, 목표물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오셨군. 출정 준비를 하라.”
“예! 알겠습니다.”
메이딜리언의 지시에 느슨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윈터가 엄선하여 오랫동안 훈련시킨 그들은 노련했고,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데보라.”
“네, 전하.”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근처에서 메이딜리언을 호위하고 있던 데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자루를 그대로 바닥을 향해 뒤집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검은 마석이 우수수 떨어졌다.
마석들은 산비탈을 따라 구르며 점점 크기를 키우더니 어느새 장정 다섯의 크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병기들로 바뀌었다.
캬아아악-!
단단한 마석으로 이루어진 짐승들이 울부짖었다.
“무, 뭐야!”
“습격이다! 매복이 있습니다!”
“으아악!”
크비누스 측의 기마병들에게서 비명이 쏟아졌다.
마력 병기들의 소리를 들은 말들이 날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 군사들을 내려다보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전군, 진격.”
“와아아!”
메이딜리언의 군대가 함성과 함께 빠르게 산비탈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난전이 시작되었다.
전투는 처절했으나 동시에 시시할 정도로 수월했다.
마석 병기가 날뛰며 진영을 마구 헤집어 놓으면 메이딜리언은 그저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가 생명력을 빨아들이면 그만이었다.
압도적인 군사력에 크비누스 측 병사들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도망치지 마라! 당당히 맞서 싸워라!”
“으, 으아악!”
“기마병! 앞으로, 커흑……!”
섭정의 기사 중 하나가 바락 외쳤으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눈먼 검에 가슴이 꿰뚫린 그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날아드는 공격을 여유롭게 막으며 메이딜리언은 그자의 남은 생명도 앗았다.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전황을 살폈다.
예상했던 것보다 병사들의 숫자가 적은 것 같았다.
그때였다.
“흐아압!”
기합 소리와 함께 묵직한 대검이 메이딜리언이 있던 자리를 지나갔다.
“쯧.”
원하던 대로 메이딜리언을 반으로 가르지 못하자, 남자가 작게 혀를 찼다.
메이딜리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애꾸눈의 기사 하나가 보였다.
거구의 몸. 아무렇게나 잘린 거친 잿빛 머리카락.
씩 웃은 기사가 메이딜리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자 전하. 신 그레이, 섭정 폐하의 명으로 2황자 전하의 목숨을 베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