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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150)

114화

“저게 뭔데요?”

“마법약.”

조만간 전투가 시작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윈터나 메이딜리언이 당당히 공작성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위험했으니까.

들키지 않고 공작령을 돌아보려면 알려진 외양을 바꿔야 했다.

“저걸로 머리 색을 바꾸시는 건가요?”

눈치 빠른 나일라가 바로 용도를 파악하고는 물었다.

“응. 눈 색도 같이 바뀔 거야. 무슨 색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윈터의 여러 가지 아이디어 중 하나로 아이셀이 최근에 연구하는 약품이었다.

다만 아직 안정성이 뛰어나지는 않아서 효과도 반나절 정도로 짧고, 색도 무작위로 바뀌었다.

“지금 해 볼까?”

“마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그럼. 이미 몇 번 해 봤는걸.”

싱긋 웃은 윈터가 병의 뚜껑을 열어 그대로 마셨다.

약효는 금방이었다.

거울 속 그녀의 머리카락은 옅은 베이지색으로, 눈동자는 밤색으로 변했다.

기존의 강한 색감에서 한층 물이 빠지니 안 그래도 비실비실한 외양이 더욱 힘이 없어 보였다.

“흐음.”

썩 맘에 들지는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영구적인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임시였으니까.

그럭저럭 납득한 윈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해 지기 전에는 들어올게.”

“더 늦게 오셔도 괜찮아요.”

“……아니야.”

놀리듯 건네지는 나일라의 말에 윈터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 놓았던 옷을 입었다.

까슬까슬한 천을 만지작거리며 윈터는 어제의 대화를 잠시 떠올렸다.

‘내일 나랑 데이트해요.’

데이트라.

그 단어가 그렇게 산뜻하고 기분 좋게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좋은 거 보고, 맛있는 거 먹고, 바래다주고, 배웅하고.’

평소엔 딱히 외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던 윈터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머리카락이 삐친 것마저도 신경이 쓰였다.

어색한 손놀림으로 연신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윈터가 방을 나섰다.

복도 끝에서 막 메이딜리언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 안녕. 메이.”

윈터가 먼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올렸다.

몸이 기름칠 덜된 양철 나무꾼이라도 된 것처럼 삐걱거렸다.

메이딜리언 또한 아이셀 표 마법약을 마셔 짙은 남색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화려하던 그의 색이 전부 검게 물드니 느낌이 색달랐다.

윈터는 처음으로 웃지 않는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서늘한 느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윈터.”

성큼성큼 다가온 메이딜리언이 산뜻한 인사를 건넸다.

그의 눈은 아까부터 줄곧 윈터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왜 그렇게 봐?”

“기분이 이상해서요.”

시선을 의식한 윈터가 묻자 메이딜리언이 즉답했다.

“그건 그렇지? 나도 좀 낯설기는 하더라. 그래도 넌 잘 어울려.”

윈터가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바뀐 머리 색을 칭찬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딱히 긍정하는 기색 없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왜?”

“기분이 이상하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라…….”

한 발짝 다가온 메이딜리언이 속삭였다.

“예쁘다는 뜻이었어요, 윈터.”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윈터가 귀를 움켜쥐고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너, 너……!”

그녀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뭐라고 말도 못 하고 그저 삿대질만 했다.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목을 울려 웃었다.

눈을 접은 채 활짝 미소 띤 얼굴로 그가 한쪽 팔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 * *

메이딜리언은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았다.

제 생에 이토록 즐겁고 행복한 날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호위도 없이 공작성을 빠져나간 두 사람은 시내를 거닐었다.

메이딜리언이 손을 내밀자, 윈터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신기한 것 없는 거리와 별다른 것 없는 풍경이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거 알아?”

“그럼요. 동전이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윈터는 광장 분수대 안 장식물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뒤돌아서, 눈 감고 던지는 거야.”

휙 던져진 동전이 포물선을 그렸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동전이 아니라, 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은 눈 위로 햇살이 내려앉아 옅은 색의 속눈썹이 반짝였다.

“어때? 들어갔어?”

동그랗게 다시 뜬 눈동자가 분수대를 살핀다.

햇빛에 반사된 물그림자가 윈터의 뺨 위에 어렸다.

“에이, 안 들어갔네.”

물속을 한참 들여다보던 윈터가 실망감이 가득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녀가 던진 동전은 요정 석상이 들고 있는 바구니 근처에도 못 갔기 때문이었다.

곧 몸을 일으킨 윈터가 메이딜리언에게도 동전 하나를 내밀었다.

“너도 해 봐, 메이.”

결과만 말하자면, 메이딜리언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성공했다.

“와! 한 번에 들어갔어!”

윈터는 마치 제가 넣은 것처럼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메이, 얼른 소원 빌어!”

“지금요?”

“당연하지. 평소에 바라던 건 있지?”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

고작 저런 동상에 빈다고 이루어질 소원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메이딜리언은 잠자코 윈터가 시키는 대로 했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을 말한다.

윈터가 옆에서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메이딜리언은 좋았다.

“그러고 보니 곧 생일이네?”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윈터가 말문을 열었다.

메이딜리언은 날짜 같은 건 딱히 신경 쓰고 살아 본 적 없었다.

그렇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으음, 딱히.”

그의 욕망은 모두 윈터에게서 비롯되었다.

물질적인 것을 탐내 본 적도 없고, 굳이 뭔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누가 봐도 관심이라곤 없는 말투에 윈터가 킥킥 웃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녀가 공작성에서부터 가지고 왔던 것이었다.

“받아.”

“이게 뭔데요?”

“미리 주는 생일 선물.”

“이렇게나 빨리요?”

“이번 전투에 필요할 것 같아서. 겸사겸사 주는 거지.”

상자를 열자 목걸이가 보였다.

붉은 마석이 박힌 펜던트가 걸려 있는 모양이 어딘지 익숙했다.

“이거…….”

어릴 적 두 사람이 몰래 통신할 때 썼던 바로 그 마도구와 똑같은 모양이었다.

“이번에 특별히 아이셀 언니한테 부탁했어. 예전에 만들었던 건 내구성도 약하고 불안정했잖아.”

통신 기능은 물론이고 물리적 공격이나 마법적 공격을 최대 3회 막을 수 있는 쉴드에, 보온 마법, 그리고 치유 마법까지 걸려 있다며 윈터가 열심히 설명했다.

복합 마법이 새겨진 마도구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호가했다.

그러나 윈터는 가격은 딱히 개의치 않는 듯 기능 설명에만 충실했다.

“직접 걸어 줘요.”

물론 메이딜리언에게도 그게 얼마나 하고, 어떤 기능을 가졌는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윈터가 선물한 것이라는 게 중요했다.

메이딜리언이 상자에서 꺼낸 목걸이를 내밀며 말하자, 잠시 멈칫하던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숙여 볼래?”

메이딜리언이 한 발짝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윈터는 목걸이의 잠금장치를 풀어 메이딜리언에게 걸어 주었다.

자연스레 그의 목을 감싸게 되는 자세에 괜히 뺨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메이.”

“네, 윈터.”

“내가 혹시 말한 적 있었나?”

오늘 메이딜리언과 함께한 내내 윈터는 망설였다.

그에게 건네준 이 목걸이가, 어쩌면 마지막 선물이 될지도 모르니까.

“뭘요?”

“좋아한다고.”

놀란 메이딜리언이 흠칫 굳는 게 보였다.

윈터는 그저 목걸이를 걸어 주는 것에 집중하며 애써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 또박또박, 단어 하나마다 힘주어 말했다.

“너를 좋아해, 메이.”

리어트가 말했던 것처럼, 사실은 도망치자고 말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전부 다 버리고, 모든 것을 등지고 함께 떠나자고 하고 싶던 적도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네가 상상할 수 없는 시간에도 나는 너를…….”

하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메이딜리언은 당연히 그러마, 할 테니까.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이뤄 줄 테니까.

“줄곧 좋아했어.”

그러나 윈터는 메이딜리언이 헛된 희망을 붙잡고 살기를 원치 않았다.

어떤 미래도 그에게 약속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게 내가 네 행복을 바라는 이유야.”

눈물은 심장 아래로 흐르도록 꾹 참아 내고, 윈터는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메이딜리언이 손을 뻗었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붙잡았다.

“이번엔 안 물어볼 거예요.”

조심스레 당겨진 몸이 맞닿고, 체온이 금세 달아올랐다.

간절하게 매달리듯 윈터는 두 손을 꽉 쥐었다.

“눈 감아요.”

윈터, 하고 내뱉어진 이름은 맞닿은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마침내 마법이 시작되는 것처럼,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숨결이 섞이는 동안 옅은 베이지색이 검은빛으로 물들고, 짙은 남색은 은빛으로 물들었다.

금빛 별 무리가 주위로 떨어졌다.

“하아.”

휘몰아치는 감정이 벅찬 듯 윈터가 잠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뒷걸음질하는 그녀를 벽으로 몰아세운 메이딜리언이 시선만으로 윈터를 옭아맸다.

반짝이는 별이 윈터의 눈동자에도 있었다.

그 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메이딜리언은 황홀한 듯 오래 눈에 담았다.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쿵쿵 뛰었다.

이토록 따스하고 말랑하고 축축한 애정이라니.

처음으로 온기를 맛본 사람처럼 그만 엉엉 울어 버리고 싶었다.

동시에 얄팍한 뗏목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혹시나 중심을 잃을까 덜컥 무서워졌다.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팔을 잡았다.

언제라도 거기 있을 것처럼, 단단한 손이 그녀를 잡아 주었다.

심장처럼 붉은 시선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소원을 다시 빌어야겠어요.”

낮아진 목소리로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영원히, 이 시간에 갇혀 있고 싶다고.”

촘촘하고 꼼꼼한 욕망이 윈터의 눈가에, 뺨에, 귓가에, 목에 내려앉다가 마침내 한 줄기의 슬픔으로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메이딜리언이 그 눈물을 받아 마셨다.

벼랑 끝에 서 있어도 두렵지 않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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