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반색하던 윈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그라들었다.
“할머니, 라고?”
“예, 예에. 문지기가 일단 막기는 했는데 한사코 자기는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 한다고 해서…….”
윈터와 메이딜리언에게 반역 혐의가 씌워진 지금, 신분이 불분명한 자를 무턱대고 공작성 안으로 들일 수는 없었다.
심지어 집요하게 윈터를 만나야 한다고 요구까지 하니.
원래라면 단칼에 거절해야 하지만, 마침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느낌에 재빨리 달려왔다.
“누구인지 자기 이름을 밝히지는 않고?”
“예, 그런데…….”
기사가 급히 윈터에게 달려와 보고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눈빛이 형형하고, 호령하는 목소리는 쩌렁쩌렁한 노파.
아무리 문지기가 물어도 한사코 제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입은 옷이며 외양이 평범한 노파는 아닌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푸른색 로브를 입고 있으셨는데, 소매에 별 모양 자수가 있었습니다.”
“뭐?”
기사의 말에 윈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반응에 오히려 기사는 내심 안도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맞았던 듯싶었다.
“당장 그 앞으로 안내해.”
“예, 알겠습니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기사가 얼른 앞장섰다.
당장 뛰쳐나가려는 윈터를 잡아챈 것은 여태 상황을 지켜보던 메이딜리언이었다.
“찾아온 자가 아는 사람이에요?”
“맞아.”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묘사한 오망성 자수가 새겨진 푸른 로브는 그녀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누군데 그래요?”
“……에르퀼 모네스티에.”
윈터가 말한 이름에 메이딜리언의 눈이 커졌다.
“대현자가 찾아오신 거야.”
집무실을 달려 나가는 윈터의 얼굴은 반가움으로 가득했다.
* * *
“드세요.”
찻잔을 가리키며 윈터가 말했다.
그러자 에르퀼이 픽 웃었다.
“어울리지 않게 무슨 예의를 차리고 그러느냐?”
“보는 눈들이 꽤 있어서.”
다들 공작성에 느닷없이 나타난 꼬장꼬장한 노파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한 기색이 역력했다.
“잠깐 자리 좀 비켜 주겠어?”
윈터는 호기심 가득한 눈들을 물렸다.
사람들의 기척이 멀어지고 나서야 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느슨한 자세를 취했다.
“제법 쓸 만한 자들이 많더구나.”
차를 호록 마시며 에르퀼이 가볍게 평했다.
자신이 갖은 협박을 해도 결코 굴하지 않고 끝까지 눈을 부라리던 문지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공작성의 경비는 삼엄했으며, 그 와중에도 이상을 발견하고 보고할 만한 눈치 있는 인물이 여럿이 있고, 굳이 번거롭게 여러 사람 거치지 않더라도 바로 상급자에게 보고가 가능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공작성이니까.”
윈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 이제 공작이야, 할머니.”
반지를 자랑하며 의기양양하게 웃는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제국의 공작이라고 하기엔 영 철딱서니 없는 모습에 에르퀼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준비한 일은, 잘 돼 가고 있는 것이냐?”
“당연하지.”
윈터의 대답은 자신만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것 치고는 몸 상태는 영 엉망인데?”
그러나 에르퀼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윈터는 단번에 제 상태를 꿰뚫은 에르퀼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어쩔 수 없…….”
“그 환약, 썼느냐?”
칼로프 사막에서 고립되었을 때 마력 폭주를 막기 위해 썼던 환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에르퀼이라면 평소보다 턱없이 적은 윈터의 마력이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을 테니까.
윈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아.”
에르퀼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쓰지 않길 바랐던 것이었는데, 그걸 벌써 썼다니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어. 만타라스 군락을 발견하는 바람에…….”
윈터가 황급히 변명하려는데 에르퀼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군락이라고?”
그 말에 담긴 호기심을 알아차린 윈터가 샐쭉 눈을 접었다.
에르퀼은 예전부터 신기한 것을 탐구하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전설로만 언급되던 만타라스를 한 송이도 아니고 아예 군락으로 발견했다고 하니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려 드릴게.”
벌써 연구하고 싶어서 드릉드릉하는 에르퀼을 윈터가 익숙하게 어르고 달랬다.
그 스스럼없는 말투에 비식 웃은 에르퀼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심장을 가지고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느냐?”
“물론이지.”
이번에도 윈터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에르퀼의 시선을 피했다.
계획은 빈틈없이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1안이 되지 않으면 2안으로, 그것도 먹히지 않으면 다시 3안으로.
변수가 될 만한 것은 가능한 한 계산 안에 넣으려고 몇 년 동안이나 노력했다.
그러나 윈터는 그 계획에 단 한 번도 자신의 생존을 고려한 적이 없었다.
일은 성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불안한 생각들은 애써 미뤄 둔 채 윈터가 말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흰 눈을 뜨던 에르퀼이 못 이긴 척 대답했다.
“예언이 충돌하고 있다.”
“……예언, 이라고?”
전혀 예상 밖의 말에 윈터가 당황했다.
“그게 무슨…….”
“윈터 블라디미르.”
처음으로 불린 풀 네임에 윈터의 어깨가 흠칫했다.
고개를 들자 에르퀼이 그녀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너는 예언에 대해 아느냐?”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어.”
아이셀이 윈터를 살리기로 결정했을 때, 그녀가 언급했던 예언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을 삼킬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금빛 눈의 까마귀. 그자가 바로 ‘결말을 벗어나는 자’이다.’
제국에서 대현자 에르퀼 모네스티에가 유명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녀가 모든 계열의 마법에 통달한 위대한 마법사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세상의 종말에 대해 예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 외에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윈터 또한 예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정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예언은 아주 잠시 언급되었을 뿐, 주된 내용으로 등장하지도 않았었다.
“할머니가 했다는 그 일곱 가지 예언은 갑자기 왜?”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일곱 가지가 아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에르퀼이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일곱 문장이지.”
그렇게 말하고는 목이 타는 듯 에르퀼이 찻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처음 계시를 받았을 때 나는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 연구를 위해 섬에 처박혀 지냈지.”
사람들을 멀리하고, 홀로 무인도나 다름없는 마누트라 섬에서 에르퀼은 오직 예언만을 연구해 왔다.
모든 문장을 세상에 공개하고 여러 사람의 해석을 나눌 수도 있었겠지만, 어쩐지 그녀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왜냐하면, 예언이 너무 구체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언은 사람을 가리켰다.”
“사람, 이라면…….”
“미래에 이 세상에 나타나, 마침내 ‘마지막’을 만들어 낼 자.”
에르퀼의 시선은 오롯이 윈터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마치 자신이 말한 ‘마지막’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에르퀼은 행여나 인간의 이기심이나 욕심 때문에 예언이 틀어지거나 오염이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예언에 대해 극히 일부만을, 아마도 당사자라 생각되는 인물들에게만 몇 문장씩 떼어 공개했다.
“그 예언이라는 게, 대체 무슨 내용인데?”
도무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윈터가 물었다.
평소에 물었다면 에르퀼은 결코 대답해 주지 않았겠지만, 오늘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이것을 물어도 되는 어떤 자격을 갖췄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땅 위에 죽어도 죽지 않는 자가 존재하니, 이미 쓰인 이야기는 끝내 영원하도다.”
가만히 윈터를 들여다보던 에르퀼이, 짧게 숨을 들이켜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종말이자 시작일지니, 파수꾼이여, 그대는 이들의 탄생을 경계하라.”
윈터의 몸이 뻣뻣해졌다.
에르퀼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이 마치 신의 전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전신에 쩌렁쩌렁 울렸다.
“새벽의 별 아래 태어나 아비를 죽이고 마침내 제왕이 되는 사막의 여인이 있을 것이다.”
델이 말했던 예언도 그 입에서 나왔다.
“세상을 삼킬 마력을 가지고 금빛 눈의 까마귀가 태어날 것이다. 그자가 바로 ‘결말을 벗어나는 자’이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던 문장 또한 그 예언 안에 있었다.
“그러니 오래된 예언의 꼭두각시여, 종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꺼이 까마귀에게 목숨을 바치라.”
에르퀼이 말한 문장이 끝나 가고 있었다.
윈터의 손바닥이 어느새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것이 너희를 숨 쉬게 하리라.”
한참을 달린 사람처럼, 윈터와 에르퀼이 동시에 숨을 헐떡였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그녀의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스쳐 가고 있었다.
그러나 윈터는 가장 먼저 물었다.
“예언의 꼭두각시가, 누구야?”
“…….”
“사람을 가리킨다며. 그게 누군지 할머니는 알지?”
윈터의 재촉에 에르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른다. 만일 안다고 해도 말할 수 없다.”
에르퀼은 단 한 번도 예언의 전체 문장을 말하거나 쓴 적이 없었다.
이상한 금제가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럴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영혼에 새긴 것처럼 예언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에르퀼 안에 박혀 있었다.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윈터의 앞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 것은, 어쩌면 신의 안배일지도 모른다고 에르퀼은 생각했다.
“전부를 말할 수는 없으나 예언이 충돌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세계가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얼마 전 그 꽃을 피웠다.
“별이 움직이고 있어.”
그것은 이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을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