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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150)

110화

* * *

메이딜리언은 안에 두고 윈터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아스터가 부디 멀리 가지 못했기를 바라며 복도를 가로지르니 계단을 청소하던 하녀 하나가 깜짝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가, 각하를 뵙습니다!”

“응, 그래. 안녕.”

공작가 식솔들에게는 이미 윈터가 새로운 블라디미르 공작이 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황도로도 파발을 보내기는 했으나 과연 지금 이 시국에 그게 잘 받아들여지기나 할까 미지수였다.

“저기, 있잖아.”

짧은 인사와 함께 하녀를 지나치려던 윈터가 멈춰 섰다.

“……네?”

“혹시 근처에서 투구 쓴 기사님 지나가는 거 못 봤니?”

윈터의 물음에 하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봐, 봤어요. 저쪽으로 가셨어요.”

“그래? 고마워.”

싱긋 웃은 윈터는 하녀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길을 알려 준 하녀는 잠시 발그레 뺨을 붉히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애써 청소에 집중했다.

“……전하!”

다급히 발을 놀린 윈터는 간신히 마차를 향해 가던 아스터를 발견했다.

그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다가오는 윈터를 발견하고는 검을 뽑았다.

그러나 아스터가 뭐라고 했는지 곧 뒤로 물러났다.

“하아, 하아. 다행히 가시기 전에 만났네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윈터가 말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스터가 한참 만에야 물었다.

“배웅이라도 나오신 겁니까?”

“네. 그런 셈이죠.”

작게 웃은 윈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아스터가 마차 문을 열었다.

“눈을 피하기엔 여기가 가장 알맞을 듯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열린 마차 문을 보던 윈터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스터의 말에는 자신과 단둘이 마차에 타도 되겠느냐는 우려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외부에서 본다면 그들은 현재 적대적인 관계나 다름없었다.

후계자 경합을 하는 경쟁자였고, 결코 합치될 수 없는 대척점에 서 있었으니까.

아까 응접실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윈터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 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윈터는 가능하다면 아스터도 그가 원하는 결말을 맞이하길 바랐다.

“물론이죠.”

망설임 없이 마차에 오르는 윈터를 보며 아스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떨리는 숨에 섞인 감정은 안도 같기도 하고, 걱정 같기도 했다.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서, 어쩌면 윈터가 마차에 오르기를 거부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지만 아마 꽤 상심했을지도 모르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아스터도 뒤이어 마차에 올랐다.

“저들에게는 주위를 경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몰래 나오신 게 아니셨습니까?”

“아버님께는 미리 언질을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윈터를 회유해 보겠다는 뜻을 밝히자 아르만 백작은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그를 보내주었다.

아마 반역도로 몰리고 끈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블라디미르 공작가와 칼리스타를 모조리 삼키는 데 윈터가 제법 유용하게 쓰이리라 판단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만큼 궁지에 몰렸다면 윈터가 기꺼이 메이딜리언을 버리고 그들 진영으로 옮길 의향이 생길 것이라고도 짐작한 것 같고.

물론 아스터의 생각은 전혀 달랐지만 말이다.

“전하.”

“예, 소공작.”

“전하께서 주신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아스터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거절당하는 것은 타격이 있었다.

“저는 전하께 갈 수 없어요.”

또박또박 말하는 얼굴 어디에도 미안한 감정은 없었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당당했다.

아스터는 그게 좋았다.

그녀가 미안해하지도 않을 일에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가졌다면, 그는 더욱 괴로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하께서 굳이 섭정의 비리를 밝히지 않더라도, 이미 저는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스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도 윈터가 언급한 적 있었다.

굳이 자신이 돕지 않더라도, 자기 혼자서도 충분히 크비누스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그런데 왜 내게 함께하자고 했습니까?”

“그게 전하의 소원이었으니까요.”

투구 사이로 홉뜬 아스터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는 윈터의 대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작은 미소와 함께 윈터가 말을 이었다.

“함부로 제가 빼앗을 수는 없잖아요.”

“……나를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자신을, 소원을 이뤄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끼워 준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윈터는 아스터를 모른다.

그가 얼마나 할 수 있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윈터는 제 밑바닥을 모두 보이고, 가진 패를 전부 뒤집어 내밀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지는 신뢰가 생경하고 낯설었다.

“전하.”

명민한 눈동자가 아스터를 꿰뚫어 보았다.

“메이에게 당신을 없앨 이유를 쥐여주지 마세요.”

그 말에 아스터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크비누스의 비리를 밝힐 증거와 윈터를 교환하자는 말은, 어디까지나 메이딜리언을 도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섭정이 무너지고, 황제의 자리가 비게 되면 그와 메이딜리언 둘 중 누구 하나는 그 자리에 올라야 했다.

아스터는 그 자리에 메이딜리언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그때가 오면 자신이 윈터의 발목을 잡지 않기를 바랐다.

감정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그래서 일부러 오늘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물론 아주 조금의 사심도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전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아스터가 애써 위악을 가장해서 말하려 했지만 윈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이에게 형제의 피까지 묻힐 수는 없으니까요.”

이미 크비누스라는, 혈육 같지도 않은 혈육을 무너뜨리고 황위를 차지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스터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한다니.

윈터는 메이딜리언에게 그런 험한 일을 겪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아스터 또한, 굳이 메이딜리언의 과녁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더 이상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를 자극하지 말아 주세요.”

윈터는 일부러 더 모질게 말했다.

아스터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빛으로 가득한 금빛 눈동자에는 확신이 있었다.

완연히 피어난 감정이 꽃처럼 아름다워서, 그는 잠시 거기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당신도, 당신도 2황자를 사랑하는군요.”

잠시 멈칫하던 윈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 힘닿는 데까지 살아 봐야죠. 그 애 옆에서.”

작게 미소 짓는 얼굴이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설렘과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물드는 두 뺨이 사랑스러웠다.

자기도 모르는 갈증이 일어, 아스터는 그저 마른침만 삼켰다.

“……서류는 제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섭정께서 과연 받아들여 줄지는 미지수이지만.”

황급히 시선을 피한 아스터가 화제를 돌렸다.

그의 손에는 윈터가 홀에서 전달했던 항의서가 있었다.

“저도 큰 기대는 안 합니다.”

윈터가 금세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작 항의서 같은 걸로 크비누스가 군사들을 물릴 거였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윈터는 항의서를 가장한 고발 문서를 준비했다.

맨 앞에 1장 정도는 형식적인 항의서였고, 나머지는 전부 크비누스의 부정을 폭로하는 서류였다.

그리고 조만간 그걸 제국 전체에 뿌리겠다는 협박도 있었다.

메이딜리언에게는 털끝만큼도 오점이 남아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정의로운 방식만 고수하며 싸울 생각도 없었다.

악당에게는 악당의 방식이 어울린다.

윈터는 크비누스에게 기꺼이 블라디미르 방식으로 철퇴를 내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에서 찌르고 곳곳에서 음해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오래 못 보겠네요.”

넘실거리는 사악한 생각들을 갈무리하며 윈터가 말했다.

“그렇군요.”

조금 섭섭한 마음을 담아 아스터가 말했다.

그런 그를 향해 작게 미소 지으며 윈터가 손을 내밀었다.

“곧 황도에서 뵐게요.”

“조심하세요, ……윈터.”

제 이름을 부르는 아스터의 목소리에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용기가 들어 있었는지 알기에 윈터는 그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아스터.”

그녀의 말에 아스터도 곱게 눈을 접어 웃었다.

* * *

아스터가 황도로 돌아간 뒤, 윈터와 메이딜리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먼저 윈터는 자신이 새로운 블라디미르 공작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 사실이 신호탄처럼 제국 곳곳으로 퍼졌다.

칼리스타의 정보원들이 속속들이 공작령으로 와 크비누스 진영의 동태를 전달했다.

은신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아르카 단원들도 공작령으로 하나둘씩 모였다.

“후작이 편지를 보냈어요.”

몰려드는 정보들을 취합하던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집무실로 들어온 메이딜리언이 손에 든 편지를 팔랑거렸다.

에른스트 후작가에서 온 전보였다.

“뭐라셔?”

“고모님을 보내시겠대요.”

“고모님이라면…….”

뜻밖의 인물이 지원한다는 말에 윈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패트리샤 에른스트 경을 말하는 거지?”

“네, 아마도요.”

윈터가 금방이라도 꺅, 소리를 지를 것처럼 들뜬 얼굴을 했다.

패트리샤 에른스트는 어릴 적부터 제국에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후작가의 고명딸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가출을 해서 무려 용병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천재 검사로 유명했던 그녀가 직접 도움을 주러 온다니, 윈터는 도무지 제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요?”

잔뜩 신이 난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은 좋으면서 별로인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대체 자기 고모를 왜 저렇게 좋아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기사 하나가 고했다.

“각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설마 패트리샤 경?”

“예? 아, 아뇨…….”

잠시 뒷머리를 긁적이던 기사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어떤, 할머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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