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자신과 윈터가 결혼이라는 단어 아래에 한데 묶인다고 생각하니 퍽 기분이 좋았다.
‘허락은 윈터에게 구해야지요.’
픽 웃으며 이어지는 말에 공작은 말을 잃었다.
드물게 희미한 미소가 걸린 얼굴이 무슨 핑크빛 상상을 하는지 뻔히 알 것 같았다.
‘부디 빠른 쾌유를 빌겠습니다.’
연신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만 짓는 공작을 뒤로하고 온 참이었다.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손에 못 보던 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뭡니까?”
“아, 이거?”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영 어색한 손놀림으로 윈터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거야.”
공작이 저런 반지를 하고 있었던가?
윈터가 아니고서야 남에게 하등 관심이라고는 없는 메이딜리언은 그저 고개만 갸웃했다.
그때 윈터가 고개를 들고는 말을 이었다.
“이제 내가 블라디미르 공작이야.”
메이딜리언은 잠시 멈칫했다.
윈터가 언젠가는 공작위를 잇기 위해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 갑자기 공작이 되었다니.
어쩐지 아까부터 윈터의 기분이 좋지 않더라니, 그것 때문인 모양이었다.
“우리가 실패할 리 없습니다.”
상황 파악을 마친 메이딜리언이 윈터에게 말했다.
윈터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는 실패하지 않아.”
결코 실패할 수 없었다.
다시 다짐한 윈터가 걸음을 옮겼다.
메이딜리언도 그녀의 뒤를 따라 방 가운데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윈터가 다음 계획을 위한 논의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어제부터 리어트와 계획을 세우고 혼자 고민해 오던 윈터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일단 우리와 함께하지 않을 자들은 황도로 돌려보내는 게 어때?”
만타라스를 찾는다는 두 번째 경합 과제를 위해 메이딜리언과 윈터는 칼로프의 사막으로 향했다.
이 일행 중에는 두 사람의 수행원, 제니마 상회의 직원, 그리고 칼리스타의 일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비단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호위를 위한 기사들이 있었고, 칼로프 사막 행에 참여하겠다고 한 관리들, 그리고 만타라스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몇몇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크비누스나 아르만 백작 측에서 심어 놓은 첩자가 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기사나 관리, 학자들 중에는 귀족가의 자제들도 제법 있었다.
결코 반역이라는 단어와 엮이고 싶지 않을.
“인질로 잡고 있는 건 어때요?”
메이딜리언은 쓸 수만 있다면 패는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크비누스와는 함께 갈 수 없다.
상대가 먼저 칼을 들었다면 기꺼이 맞받아쳐야 했다.
“그러면 혐의를 부인하기 더욱 어려워지지.”
그러나 윈터는 아직 기회가 남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는 메이딜리언이 마지막까지 정당하고, 정의로운 승리자로 남기를 원했다.
언젠가 황도 폴렌슈타인으로 메이딜리언이 돌아갈 때, 모두에게 환호를 받으며 돌아가기를 바랐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에요. 그냥 다 죽이자고 하면, 싫어할 거죠?”
“당연하지.”
여전히 가망이 없다는 듯 메이딜리언이 윈터를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메이딜리언은 그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영 불퉁해 보였다.
“모처럼 일이 잘 풀린다 했더니.”
간신히 윈터와 마음이 이어졌는데, 난데없이 반역도로 몰려 전투를 치르게 생겼으니 짜증이 몰려왔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마음 같아서는 당장 황궁에 잠입해서 크비누스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윈터의 계획을 들은 이상 메이딜리언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럼 우선 황도로 파발을 보내야겠군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윈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편에 저들을 보내야지.”
겸사겸사 크비누스에게 선물도 좀 보내고.
예쁘게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눈동자에 잠시 섬뜩한 빛이 감돌았다.
* * *
공작성의 거대한 홀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 칼로프 사막행에 함께 했던 인물들 중 윈터의 세력에 속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법진의 행선지가 바뀌더니, 엉겁결에 공작령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메이딜리언이 반역을 저지르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덕분에, 다들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설마 진짜로 반역을 저지른 건 아니겠죠?”
“자네 그 수인족들 못 봤소?”
“저도 보기야 봤지요. 하지만 그게 전부였지 않습니까? 고작해야 대여섯 명 정도인데 그걸 반역의 증거라고 보기에는 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쉿,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자기들끼리 옹기종기 뭉쳐 웅성거리던 그들 중 누군가가 손가락에 입을 올렸다.
지금이야 그들뿐이라고는 하지만 공작성의 한복판이었다.
어디에서 이 얘기를 듣고 있을지도 몰랐다.
“크, 크흠.”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헛기침을 했다.
“칼로프의 황태자와 꽤 친밀해 보이던데, 이런 일을 벌이려고 그렇게 친분을 쌓았나 봅니다.”
그러나 말소리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애써 목소리를 낮춘 채 다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소공작이 어찌할 것 같습니까?”
“난 아무리 그래도 반역에는 동참할 수 없소이다.”
“애초에 반역이 맞기는 하답니까?”
“그, 그건…….”
그때 예고도 없이 홀의 입구가 벌컥 열렸다.
열린 문으로 기사들 십여 명 정도가 들어섰다.
“어!”
갑작스러운 기사들의 등장에 잔뜩 겁을 먹었던 이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홀 안으로 들어오는 기사의 맨 뒤에서 황가의 깃발이 펄럭였기 때문이었다.
“화, 황궁에서 온 기사들인데?”
“맞아. 그대들을 보내려고 내가 불렀네.”
“……헉!”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다들 헛숨을 들이켰다.
“어, 언제……!”
“아까부터 와 있었는데?”
소리도 없이 등장한 윈터가 빙긋 웃었다.
그녀의 뒤로 메이딜리언과 공작가의 기사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자리에 오르시지요, 전하.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상석으로 메이딜리언을 안내한 윈터가 앞으로 나섰다.
반사적으로 움찔한 황실 기사들이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맨 앞에 있던 기사 하나가 손을 들자 다들 멋쩍은 얼굴로 긴장을 풀었다.
윈터의 시선이 잠시 지시를 내린 기사에게 향했다.
투구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 그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정식 항의서입니다.”
황실에서 파견된 기사들에게 다가간 윈터가 두툼한 서류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2황자 전하와 나, 윈터 블라디미르 공작은 궁에서 제기한 반역 혐의에 대한 사실을 전면 부인합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기사 하나가 외쳤다.
“그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궁으로 가셔서 직접 이야기하지 그러십니까?”
팽팽하게 전달되는 적대감을 보니 벌써 메이딜리언이나 그녀를 반역도라고 굳게 믿는 듯한 얼굴이었다.
윈터는 픽 웃으며 되물었다.
“물증도 없이 수배부터 내린 상황에, 대체 뭘 믿고?”
“지금 감히……!”
섭정 황제를 비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에 기사들의 기세가 흉흉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도 맨 앞에 있던 기사가 그들을 말렸다.
이내 그는 윈터에게서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럼 이만 이분들은 데려가시고, 그쪽들은 사라지시죠.”
사람들을 한 번, 저를 보며 입을 삐죽거리는 기사를 한 번 노려보며 윈터가 말했다.
맨 앞에 있던 기사가 손짓하자 뒤에 있던 기사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인도해 갔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홀을 빠져나갈 때까지도 기사 하나는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윈터가 준 서류를 손에 쥔 채 멈춰 있을 뿐이었다.
“뭐 더 할 일이 남으셨습니까?”
의아하다는 듯 윈터가 물었다.
대답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부드러운 축객령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기사는 걸음을 옮기기는커녕 줄곧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벗어 냈다.
그의 얼굴을 발견한 주변 인물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윈터의 표정도 굳었다.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자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1황자 전하.”
투구 속 인물은 다름 아닌 아스터였다.
* * *
공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누구도 눈앞에 놓인 찻잔에 손을 대는 이가 없었다.
상대를 노려보던 메이딜리언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마법진으로.”
“하.”
동문서답하는 아스터의 행태에 메이딜리언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윈터가 그를 말리기 위해 잠시 무릎에 손을 얹었다 뗐다.
메이딜리언은 말 잘 듣는 충견처럼 금세 감정을 가라앉혔고, 아스터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못 본 새에 더 친밀해지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윈터가 애써 웃으며 되물었다.
지난번에 아스터에게 크비누스의 부정에 대해 밝히고 복수하자고 한 뒤 처음으로 보는 자리였다.
만타라스를 찾아 황도로 돌아가고 나서야 그와 재회할 줄 알았는데, 설마 아스터가 공작령으로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윈터는 사실 지금 좀 당황스러웠다.
“섭정이나 백작께서 알게 되시면 큰일일 텐데요.”
윈터가 걱정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진실이야 어쨌든 반역도의 근거지였다.
적진 한복판에 혈혈단신으로 찾아온 아스터의 진의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인질이라도 돼 주시려고 그러십니까?”
메이딜리언이 날카로운 말투로 빈정거렸다.
이번엔 윈터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위협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아스터는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을 했다.
“만타라스는 찾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