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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07/150)

107화

* * *

날이 밝기 무섭게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마차를 찾았다.

그리고 리어트가 전해 준 이야기를 전부 알렸다.

“……그게 사실입니까?”

와락 표정을 굳힌 메이딜리언이 되물었다.

윈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 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를 잡으러 군사들이 왔을 수도 있어.”

다들 그런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법진에 마력이 차오르면 그들은 즐겁게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기사들의 칼이 겨눠지겠지.

“우리는 지금 반역도의 우두머리가 된 상황이니까.”

한숨을 푹 내쉰 메이딜리언이 마른세수를 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윈터는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걸 말씀하십시오. 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줄곧 초조한 듯 두 손을 맞잡고 있던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달리 그녀는 조금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크비누스가 그들을 반역도로 몰았다는 사실 때문은 아닐 것이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겁에 질릴 만한 위인은 아니었으니까.

“……일단 공작령으로 가자.”

한참 만에야 윈터가 입을 열었다.

그 사이 그녀의 표정은 부쩍 어두워진 상태였다.

블라디미르 공작령은 황도와 꽤 거리가 있었다.

물론 마법진을 이용해서 가면 금방이겠지만, 굳이 공작령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없어 메이딜리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그의 의문에 대답하듯 윈터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거기에 계셔.”

* * *

칼로프의 사막에서 블라디미르 공작령까지는 금방이었다.

원래라면 일주일은 꼬박 마차를 달려야 했겠지만, 마법진은 그들을 순식간에 공작령에 데려다 놓았다.

“어머니!”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윈터가 앞으로 달려갔다.

통신석을 통해 윈터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블라디미르 공작이 그녀를 마중 나온 상태였다.

와락 어머니를 끌어안던 윈터가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공작의 팔이 붕대에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으세요? 팔은 왜…….”

“오다가 잠깐 전투가 있었다.”

대답은 짧았지만 윈터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죄다 알아차렸다.

부쩍 피곤해 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이나, 단단히 붕대에 감겨 있지만 제대로 치료도 되어 있지 않은 듯한 상처까지.

크비누스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급급했으며, 지금 공작가의 상황이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었다.

“그자를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눈물이 가득 고인 윈터의 눈동자가 살기등등해졌다.

그런 그녀의 이마를 쓸어 주며 블라디미르 공작이 픽, 옅게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이내 공작의 시선이 뒤따라오는 메이딜리언에게 향했다.

어릴 때부터 맹랑하던 그 꼬맹이가 결국은 윈터의 옆자리에 당당히 섰다니, 새삼 감회가 남달랐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메이딜리언과 블라디미르 공작은 그다지 살갑지 않은 인사를 나눴다.

곧 공작이 윈터의 어깨를 감싸며 몸을 돌렸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네, 제가 부축할게요.”

윈터가 공작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닿아 오는 체온이 차갑기 짝이 없었다.

겉으로 애써 티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현재 공작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손님들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뒤에서 공작가의 집사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던 윈터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아 왔다.

윈터는 부탁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딜리언 또한 걱정 말라는 것처럼 작게 미소 지었다.

“……이제 나도 늙은 모양이구나.”

윈터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가며 공작이 중얼거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윈터는 얼른 부정했지만, 공작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는 것 같았다.

문을 닫은 윈터는 지시에 따라 공작이 소파에 앉는 것을 도왔다.

“제가 메이딜리언에게 부탁해서 어머니의 상처를 봐 달라고 할게요. 그러니까 잠시만…….”

“윈터.”

공작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공작이 한 발 더 빨랐다.

몸을 일으키려는 윈터를 잡아채는 손길이 강했다.

“……예, 어머니.”

하는 수 없이 윈터는 그대로 공작의 손을 잡고 그녀의 발치에 앉았다.

잠깐 밖에 다녀온 것만으로도 기력을 많이 소모했는지 그새 공작의 이마는 땀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공작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그저 제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서 내밀었다.

“받아라.”

“어머니!”

빛이 조금도 투과되지 않을 듯한 새카만 마석이 박힌 반지였다.

마석 주위로 섬세하게 공작가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는 이 반지는 대대로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가주들이 착용해 왔었다.

“네게 이것을 주려 한다.”

“저는…….”

윈터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공작이 윈터의 손을 가져와 직접 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줬다.

갑자기 자신이 늙었다느니 할 때부터 불안했었는데, 역시 괜히 꺼낸 말이 아니었다.

간절한 소원을 이뤄 준다는 전설이 있는 가주의 반지였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윈터는 괜히 코가 찡해져 왔다.

“누군가 이미 소원을 이뤄 그리됐는지도 모르지.”

그녀의 시선이 줄곧 마석을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공작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마력을 담고 반짝였어야 하는 마석이 색을 잃고 탁해졌기 때문이었다.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공작이 물었다.

“그 반지가 어떤 의미인지 알겠지?”

옅은 미소와 함께 공작이 말을 이었다.

“네게 모든 권한을 일임한다. 이제 네가 블라디미르 공작이야.”

“……어머니.”

윈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와서 공작가를 잇는 것이 두려워졌다거나, 자신이 없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혹시라도 제가 실패하게 되면, 어머니는 사셔야죠.”

윈터는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크비누스를 무너뜨리고 메이딜리언을 황위에 올리기 위한 거대하고 위험한 계획을.

몇 번이나 홀로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세웠던 계획을 다시 무너뜨리고, 수정하고.

수년간 반복해 왔던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윈터는 자신이 실패할 가능성을 아예 지우지 못했다.

메이딜리언이 점점 원작과 벗어날 때부터 그 불안감은 더욱더 커졌다.

어쩌면, 만에 하나라도…….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상념을 깨뜨리듯 공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아직 소공작에 불과하다면, 그래서 그저 저 하나의 일로만 끝날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이 살아날 구멍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작의 이름으로 실패하게 되면 그 위험 부담은 공작가 전체가 가져가게 된다.

가문의 이름을 잇고 그들을 대표하는 자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은 소공작 하나가 반역에 휘말린 것과는 그 의미 자체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미르 공작, 오필리아는 제 딸에게 공작위를 넘겼다.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그녀의 운명도 모두 함께 짊어진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단단한 금빛 눈동자가 윈터를 오롯이 비췄다.

오필리아는 딸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네게 걸린 목숨은 결코 너 하나의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말이 기원처럼, 그리고 정언(定言)처럼 윈터의 가슴에 새겨졌다.

어릴 적부터 약하고, 아팠던 딸이었다.

신이 선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이 작고 마른 몸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니 살아남아라.”

죽지 말고, 살아남아 오래 함께하자고 말하는 어머니의 말에,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한참 고여있다가 턱을 타고 떨어졌다.

윈터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살아남아야 이기는 것이다.”

“예, 반드시.”

크게, 떨리는 숨을 들이마신 윈터가 약속했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 *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정복 차림을 가다듬던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메이딜리언이었다.

잠시 놀란 표정이던 윈터는 황급히 그의 앞으로 달리듯 걸어갔다.

“어머니는 어때?”

메이딜리언은 작게 미소 지었다.

“이제 괜찮으실 겁니다.”

“……하아, 다행이다.”

윈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짚은 그녀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여나 어머니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줄곧 안 좋은 상상에 휩싸여 있었다.

만약 메이딜리언에게 치유의 능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녀의 상상은 현실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메이.”

윈터가 속삭이듯 연신 감사의 말을 전했다.

“뭘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다행인걸요.”

사실 따지자면 블라디미르 공작이 다친 것은 메이딜리언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크비누스가 굳이 공작가에 반역의 혐의를 씌워 그들을 공격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블라디미르 공작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감사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멀쩡해진 팔을 신기하게 보면서도 공작은 꼿꼿한 자세로 메이딜리언에게 말했었다.

‘받을 생각도 없습니다.’

메이딜리언은 그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공작은 그런 그를 영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았다.

제 딸을 고생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열이 받았기 때문이었다.

눈치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메이딜리언이 그 심정을 모를 리 없었다.

‘다치지 마십시오.’

그렇기에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입에 올렸던 것이겠지.

‘윈터가 슬퍼합니다.’

‘하.’

그 말에 공작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곧 질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말을 되받아쳤다.

‘행여나 결혼 허락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오래된 흑심을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로서는 나름대로 엄포를 놓은 거지만 메이딜리언은 저 좋을 대로 들었다.

‘결혼’이라는 말만 쏙 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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