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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150)

104화

그 말에 고개를 든 남자가 품 안에서 작은 아티팩트 하나를 꺼냈다.

“소공작께서 가지고 계신 마도구 중 작동이 되면 저희에게 알림이 오는 것이 있습니다.”

“아하.”

델은 그 짧은 설명만으로 상황을 대강 이해했다.

윈터는 데보라에게도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아티팩트를 건넸다.

그러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이중, 삼중으로 장치를 해 놓은 모양이었다.

“하여간 소공작은 참 철저하다니까.”

픽 웃은 델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내가 고작 그것만으로 그대들이 소공작의 호위대라는 것을 어떻게 믿지?”

도발하듯 말을 건넨 델이 노골적으로 그들 하나하나를 살폈다.

복면으로 죄다 얼굴을 가린 채 난데없이 나타난 그들은 당연히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상황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저 사람은……!”

바로 데보라였다.

소공작의 호위대라는 수인족들을 이끄는 맨 앞에 있는 남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한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리어트 씨.”

칼리스타의 부단주라는 것을 차마 제 입으로 밝히지도 못하고 데보라는 홀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그때 리어트가 델에게 작은 장신구 하나를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델의 눈이 커지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데보라는 아마도 저게 리어트가 칼리스타의 부단주라는 것을 알리는 신분 패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예전에 제니마 상회에 찾아왔을 때도 잔뜩 경계하던 엘리슨에게 저런 비슷한 걸 보여 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꽤 귀한 분이셨군.”

그리고 데보라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델은 언젠가 윈터가 보여 준 칼리스타의 표식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추후에 칼리스타가 도움을 줄 때 칼로프에 파견한 이들이 델에게 표식을 보여 줄 것이라며 미리 알려 줬던 덕이었다.

“그대들도 나와 함께 가지. 소공작이 기다리고 있네.”

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리어트 또한 처음부터 그러리라 생각했던 것처럼 그 뒤를 따랐다.

* * *

메이딜리언은 계속 걸었다.

잠을 자거나 잠시 쉰 적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어김없이 어둠이 그를 잠식할 것만 같았다.

품 안의 윈터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은 지독한 환상에 시달렸다.

혹여나 차갑고, 창백해지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면서 그는 쉼 없이 앞으로 걸었다.

똑,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굴은 습기가 가득했다.

이 황량하고 건조한 사막도 언젠가 호수나 바다였던 적이 있었던 것일까.

애써 비워 둔 머릿속에 자꾸만 잡다한 생각들이 쌓였다.

‘부작용 같은 건 없어요?’

그렇게 물었을 때 윈터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어쩌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지도 몰라.’

아니, 아니었다.

그런 말이 아니었다.

‘미안해, 메이.’

그럴 리가 없었다.

제게 윈터가 그런 말을 남겼을 리 없었다.

“……안 돼.”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메이딜리언이 걸음을 멈췄다.

머리가 뜨거워지며 숨이 거칠어졌다.

이대로 가다간 윈터를 놓칠 것 같은 기분에, 그는 잠시 몸을 낮추고 그대로 벽에 기댔다.

‘약속할게.’

귓가에 웅웅, 이명처럼 윈터의 목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왔다.

‘네 말에 대한 대답은, 돌아와서 할게.’

그래, 돌아온다고 했다.

윈터는 돌아올 것이다.

“윈터.”

메이딜리언이 작게 그녀를 불렀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힘없이 달싹거렸다.

그는 습관처럼 윈터에게 마력을 불어넣었다.

“내게 돌아와요, 윈터.”

잿빛 마력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깜박였다.

억지로 마력을 쥐어 짜낸 메이딜리언이 제가 가진 전부를 윈터에게 들이부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윈터가 깨어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착각인지 모르지만, 윈터의 속눈썹이 잠시 떨린 것 같았다.

“돌아와요. 돌아와요, 윈터.”

기도처럼, 윈터를 품에 안은 채 메이딜리언이 연신 속삭였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툭, 턱을 타고 떨어졌다.

윈터의 정신이 돌아온 것은 그쯤이었다.

어깨를 적시는 미약한 흐느낌이 그녀를 깨웠다.

“……으음.”

작은 신음에도 메이딜리언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흠칫 떨리는 몸이 등 뒤로 느껴졌다.

박동하는 심장까지도.

“윈, 터……?”

믿을 수 없다는 듯 메이딜리언이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천천히 눈을 뜬 윈터의 시야에 눈물 젖은 얼굴이 보였다.

깨어났을 때 꼭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윈터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숙여 먼저 그 손에 제 뺨을 비볐다.

“울지 마.”

바싹 말라 갈라진 목소리에 큼큼, 하고 윈터가 몇 번 헛기침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걸까.

아주 깊은 물 속에 잠겼다가 다시 건져지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느닷없이 중력의 무게를 깨달은 것 같았다.

욱신거리는 고통을 애써 무시한 채 윈터가 입꼬리를 올렸다.

“다녀왔어, 메이.”

그러고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눈물이 흐른 자국을 닦아 주었다.

메이딜리언은 그 손길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대로 굳어 있다가 곧 힘주어 윈터를 끌어안았다.

차갑게 식었던 체온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쉬고 있던 숨은 전부 가짜인 것처럼, 메이딜리언은 새로이 폐에 공기를 채웠다.

온통 윈터의 향기로, 가득하도록.

“죽는 줄,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요.”

더듬더듬 이어지는 말에 윈터가 작게 웃었다.

“내가?”

“아뇨. ……내가.”

그 말에 윈터는 또 웃었다.

어쩐지 그녀마저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이 컴컴한 공간 속에 홀로 외로웠을 메이딜리언이 자꾸만 안쓰러웠다.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

메이딜리언의 어깨를 도닥여 주던 윈터가 멈칫하더니 말끝을 흐렸다.

손에 닿는 촉감이 묘했다.

“메이, 너…….”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차림새를 다시 살폈다.

옷은 죄다 어쨌는지, 메이딜리언의 상체는 헐벗은 맨살이었다.

다부진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을 홀린 듯 바라보던 윈터가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상황을 살폈다.

곧 그가 입고 있던 셔츠며 재킷이 전부 제 몸에 입혀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가 묻은 옷은 아무래도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윈터의 눈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알아차린 메이딜리언이 순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시선을 감출 수는 없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눈동자를 쫓던 윈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혔어?”

“누, 눈 감고 했어요!”

펄쩍 뛰며 비명처럼 나오는 대답에 윈터는 웃음을 꾹 참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이 상황에서도 메이딜리언이 사랑스러웠다.

자꾸만 부푸는 마음이 이성을 흐려지게 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고통으로 정신이 없어 제대로 들었는지도 몰랐던 고백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신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 내게 당신이 유일한 것처럼, 당신도 내가 유일하다면, 그렇다면…….’

만약, 이라는 단어를 덧붙였지만 메이딜리언은 정확히 보았다.

윈터에게도 메이딜리언이 유일했다.

‘내게 충성해. 나는 당신에게 명령할 테니까.’

그러니 그가 하는 명령을 그녀가 감히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를 사랑해.’

태어나 오직 유일하게 입력되어 있던 명령인 것처럼, 윈터의 머릿속에는 메이딜리언의 말만이 새겨졌다.

천천히 손을 뻗은 윈터가 그의 뺨을 감쌌다.

애원하듯 명령하던 그녀의 주인은 이번에도 순순히 제 얼굴을 윈터에게 맡긴 채 끌려왔다.

윈터는 그 아름다운 입술에 대답과 같은 입맞춤을 남겼다.

짧게 닿았다 떨어지는 촉감에 메이딜리언의 눈이 부풀었다.

“……윈터.”

이내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짙어졌다.

몇 번 눈을 깜박이던 사이 윈터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아프지 않게 그녀의 머리를 감싼 메이딜리언이 으르렁거리듯 속삭였다.

“제 인내심을 시험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이건 그냥…….”

말을 끌던 윈터가 한 번 더 촉, 소리가 나게 메이딜리언에게 입을 맞췄다.

“대답이야.”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없이 싱그러웠다.

그 얼굴이 야속해서 메이딜리언은 그저 몸을 숙여 제 이마를 윈터의 어깨에 묻었다.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시험하시는 게 맞군요.”

제 말을 들었는지 윈터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아마도 웃고 있는 듯했다.

그 떨림이 메이딜리언에게도 전달되었다.

어둡고 질척하게 그를 감싸고 있던 감정들이 그 떨림을 따라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천천히 스미는 따스한 빛이 기적과도 같았다.

윈터의 대답이 그에게 환희로, 절정으로 닿아 왔다.

“하.”

짧은 한숨과 함께 메이딜리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가슴에 박혀 있던 날카롭고 서늘한 조각 하나가 녹아 사라진 듯했다.

“저는 그럼 기꺼이 시험에 들겠습니다.”

번쩍 고개를 든 메이딜리언이 눈을 휘어 웃었다.

기쁨에 함빡 적셔진 반짝이는 얼굴에 윈터가 순간 말을 잃었다.

“잠깐, 잠깐만, 메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려는 메이딜리언을 윈터가 황급히 멈춰 세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가락 끝에 쏟아지는 입맞춤에 윈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파드득 떨던 그녀의 손이 훌쩍 멀어졌다.

품 안에 윈터를 가둔 채로 메이딜리언이 작게 눈가를 찌푸렸다.

“먼저 시작한 건 윈터였습니다.”

“아니, 그건 조금 이따가 하고, 잠깐만.”

윈터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웃고 있는 메이딜리언의 얼굴 뒤로 이상한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 좀 일으켜 줘, 메이.”

손을 뻗은 윈터를 가볍게 안아 일으킨 메이딜리언이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저게 뭐죠?”

“가 보자.”

어디에 구멍이 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천장에서 내려오는 빛 아래로 투명하게 반짝이는 이파리가 보였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것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꽃잎과 줄기, 잎까지 전부 투명한 꽃.

전설 속에 묘사된 것과 똑같은 모습에 윈터가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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