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홉뜬 윈터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천천히 손을 올린 윈터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메이딜리언을 밀어냈다.
어깨에 닿아 오는 미약한 힘에 메이딜리언의 눈가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커흑.”
입을 틀어막은 윈터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렀다.
그녀의 어깨가 잘게 경련했다.
“윈터!”
당황한 메이딜리언이 옆으로 쓰러지는 윈터를 잡았다.
그가 각혈하는 윈터를 본 것은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덕분에 그에게 트라우마 아닌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이전에도 크비누스 진영의 음모로 인해 윈터의 마력이 불안정해졌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내 메이딜리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재킷을 벗었다.
그러고는 발작적으로 거기에 붙은 보석이란 보석은 전부 떼어내 부쉈다.
혹시나 또 자기 때문에 윈터가 위험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지독한 두려움이 그를 휘감았다.
“메이.”
익숙한 듯 흘러내린 피를 닦아 낸 윈터가 메이딜리언의 팔을 붙잡았다.
기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창백한 얼굴이 그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젠장, 지금 당신 상태가…….”
“폭주는, 멈출 수가 없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하는 메이딜리언을 재차 밀어내며, 윈터가 말했다.
메이딜리언은 그녀의 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윈터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해도 폭주는 멈추지 않고, 메이딜리언의 방식은 전부 소용이 없었다.
“죽지 마요.”
“…….”
“죽지 마요, 윈터. 제발, 제발…….”
이렇게 그녀를 잃을 수는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이토록 허망하게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눈물조차 흘리지 못한 채 덜덜 떠는 메이딜리언을 바라보던 윈터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내게 방법이 있어.”
그 말이 어둠 속 한 줄기 빛처럼 메이딜리언의 머리 위를 비췄다.
패닉에 빠져 있던 메이딜리언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벽에 머리를 기댄 윈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방법인데요?”
윈터의 미소에도 메이딜리언의 심장은 여전히 술렁거렸다.
늘 위험천만한 일에 스스로 뛰어들던 윈터였다.
그녀가 제시한 방법이 그리 안전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력 폭주를 강제로 멈추는 방법.”
단 한 번, 위급 시에 쓸 수 있도록 대현자 에르퀼이 고안한 방법이었다.
“그런 방법이 있어요?”
“응. 근데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야.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원래라면 발생하지 않을 마력 폭주였다.
몸의 문제도, 마력의 과다 사용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그때까지 제 몸이 버틸 수 없으리라는 것이 윈터의 생각이었다.
“부작용 같은 건 없어요?”
“그런 건 없어.”
괜한 걱정을 한다는 듯 윈터가 작게 웃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부작용은 없었으니까.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지만, 어차피 지금 사용하지 않아 폭주를 일으키면 죽은 목숨이었다.
윈터는 다음을 기약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이거야.”
늘 목에 걸고 있던 붉은 펜던트를 들어 올리며 윈터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변했다.
오래전, 두 사람이 헤어질 때까지 목소리를 나누던 그 통신구였기 때문이었다.
“여기 마력을 좀, 불어넣어 줄래?”
폭주 직전인 마력을 함부로 운용할 수 없었기에 윈터가 메이딜리언에게 목걸이를 내밀며 부탁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시키는 대로 했다.
곧 마력이 차오른 붉은 마석이 그 색과 똑같은 붉은 알약 하나를 뱉어 냈다.
“이거, 통신석이 아니었어요?”
“응. 좀 개조했거든.”
손에 올려진 알약을 들여다보며 윈터는 에르퀼의 경고를 되새겼다.
‘정말 위급할 때만 쓰거라.’
‘이게 대체 뭔데 그래?’
‘널 가사(假死) 상태로 만들어 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마력은 매개체를 잃고 흩어진다.
대현자 에르퀼은 그 현상에서 착안하여 알약을 만들었다.
사실상 독에 가까웠다.
윈터의 몸을 죽은 것이나 다름없게 만들어 일시적으로 몸에 있는 무한한 마력을 비우는 것이니까.
에르퀼은 가능한 한 윈터가 이 약을 쓸 일이 없기를 바랐다.
‘두 번은 없어.’
가뜩이나 약한 몸에 독을 쓰는 일이었다.
윈터는 결코 두 번이나 약효를 버틸 만한 몸 상태가 되지 못했다.
“이걸 먹으면 내가 잠시 쓰러질 수 있어.”
마른침을 삼킨 채 윈터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냈다.
메이딜리언은 혹시라도 그녀의 말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미동도 없이 온통 윈터에게 집중했다.
“내 몸 안에 있는 마력이 전부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까, 아마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러나 그 말에는 흠칫 손가락 끝이 떨렸다.
그녀의 몸 안에서 휘몰아치는 마력이 전부 빠져나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메이딜리언이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깨어날 수 있는 건, 맞죠?”
불안한 듯 되묻는 말에 윈터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메이딜리언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 한 곳에 고정되었다.
동요를 끝낸 그가 활활 타오르는 시선으로 윈터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에 얼마나 가슴이 벅차는지, 메이딜리언은 알까.
윈터는 울컥하는 마음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러니까 내게 돌아와요, 반드시.”
“그래. 약속할게.”
시선을 마주한 채로, 윈터는 들고 있던 알약을 그대로 목 뒤로 넘겼다.
메이딜리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울지도 못하는 눈동자를 쓸어 주며 윈터가 속삭였다.
“네 말에 대한 대답은, 돌아와서 할게.”
메이딜리언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윈터의 손등에 짧게 입술을 묻었다.
곧 소리도 없이 윈터의 몸이 쓰러졌다.
그 가녀린 몸을 품 안에 가두며 메이딜리언은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세상이 새카만 어둠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윈터.”
기도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메이딜리언이 천천히 윈터의 코 근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미약하지만, 그래도 숨을 쉬고 있었다.
작은 안도와 함께 메이딜리언이 윈터를 품에 안고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빠진 모래 지옥 아래에는 기다란 동굴이 있었다.
저 멀리 희미한 빛과 함께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에는 출구가 있을 것이다.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깨어날 때까지 출구를 찾아 기꺼이 이 지옥을 헤매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 * *
“전하,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기사 하나가 다가와 전한 말에 델이 반색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대열 정비는 진작 마쳤고, 도망치던 블라디미르 가문의 죄수도 다시 잡아 왔다.
부상자들을 황도로 돌려보내고도 델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드디어 마법진에 마력이 전부 채워진 모양이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출…….”
“전하!”
막 마차에서 내리던 델이 고개를 돌렸다.
다른 기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스러워?”
“이, 이상한 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이상한 자들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암살인가?”
“그, 그럴 리가요! 그게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게 암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황태자를 보며 기사들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그는 암살이 아니면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종된 소공작의 호위대라고 합니다.”
“……호위대라고?”
“예, 그런데 그들이, 그러니까…….”
주저하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기사들을 보던 델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대의 말을 기다리다간 내 숨이 먼저 넘어가게 생겼어. 그냥 내가 직접 가 보겠네.”
휘적휘적 멀어지는 델의 뒷모습을 보던 기사가 옆에 있던 다른 기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경, 대체 뭘 봤길래 그럽니까?”
“……소공작의 호위대가, 그러니까…….”
여전히 쉽게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끝내 와락 울상을 짓더니 작게 속삭였다.
그 말을 간신히 알아들은 다른 기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한편 델은 성큼성큼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다들 무슨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로 뭔가 익숙하지 않은 것이 보였다.
“어라.”
잠시 걸음을 멈췄던 델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떠올랐다.
기사가 왜 망설였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건장한 남자의 머리 위로 노란 털로 덮인 귀가 쫑긋거렸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예의 그 ‘소공작의 호위대’라는 인물들이 보였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수인족이었다.
“소공작의 호위대라고?”
뒤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이 델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옆으로 자리를 비키며 길을 열어 주었다.
곧 수인족들의 맨 앞에 있던 남자가 무릎 한쪽을 꿇었다.
“칼로프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는 외양이 꽤 준수해 보였다.
복면 아래 가려진 얼굴을 막연히 그려 보며 델이 흥미로운 듯 턱을 쓸었다.
“소공작이 내게 이런 호위대가 있다고는 전혀 언급한 적이 없는데.”
“저희는 어디까지나 비상 대기조입니다.”
수인족은 제국인들 사이에서도 아주 소수였고, 오랜 차별의 역사로 자기들끼리 마을을 만들어 세상에서 숨어 살았다.
긍지가 높아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들이 윈터의 호위대를 자청하다니.
상황을 본 기사는 아마 델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출신지도 불분명한 이들이 느닷없이 호위대라고 하니, 진위 확인 자체가 어려웠을 테니까.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납득한 델이 물었다.
“비상 대기조가 지금 나타난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