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동요는 짧았다. 윈터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고른 치열이 보이도록 활짝 미소 짓는 얼굴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거짓이었다.
메이딜리언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럼, 당연히 괜찮지.”
윈터는 더없이 자연스럽게 나온 목소리에 안도했다.
이 정도라면, 어쩌면 메이딜리언도 속아 넘어가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곧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메이딜리언의 표정에 쿵,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메이? 왜 그래, 어디 아파? 불편한 데라도 있는 거야?”
당황한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살폈다.
제 이마를 짚는 그녀의 손을 메이딜리언이 낚아채듯 쥐었다.
메이딜리언의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독한 고독감과 무력감이 그를 뒤덮었다.
아니, 정말로 이유를 모르나?
‘헛소리.’
그래,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윈터를 만난 그 순간부터 줄곧, 매분 매초 불안감과 공포에 휩싸인 채 살았으니까.
“폭주, 얼마나 남았어요?”
놀란 윈터가 숨을 들이켰다.
메이딜리언은 말없이 치유의 마력을 윈터에게 불어 넣었다.
하지만 윈터의 안색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아무리, 아무리 마력을 불어넣어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윈터는 그런 메이딜리언을 잠깐 바라보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해.”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메이딜리언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냈다.
순식간에 빠져나간 손안의 온기에 메이딜리언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그가 가진 생명력을 열심히 윈터에게 전해 줘도, 여전히 윈터의 마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어차피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
그랬다.
그의 능력으로 화상은 치유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마력 폭주는 막을 수 없었다.
메이딜리언은 이를 악물었다.
윈터가 심어 놓은 작은 불씨가 그를 활활 태운다.
사막에서 본 새카맣게 탄 시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나.
푸른 신기루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만약 버려진 황자 같은 게 아니었다면, 그가 가진 마력이 정말 온전한 치유였더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들이 그의 숨통을 옥죄며 킬킬 비웃었다.
초점이 흐려지는 메이딜리언의 눈동자가 서서히 어둠에 물들었다.
“메이.”
이상을 기민하게 감지하는 것은 언제나 윈터였다.
온기가 사라진 손이 메이딜리언의 두 뺨을 감싼다.
“나 봐, 얼른.”
금빛 눈동자가 선명했다.
이 모든 어둠을 불사를 것처럼.
그 눈꺼풀에 입을 맞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치밀어오르는 욕망을 억누른 채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손에 온전히 자신을 맡겼다.
“메이, 나는 괜찮아. 나는…….”
“이런 거에 익숙하니까요?”
그러나 어둠은 여전했다.
날카롭게 돌아온 말에 윈터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입술에 수분기라고는 없었다.
색색 내쉬는 숨소리가 여전히 거칠었다.
그것이 메이딜리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당신을 여기에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제게로 뻗어진 윈터의 손을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붙든 채로 메이딜리언이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가씨 말을 따르는 게 아니었어요. 그깟 황제 따위, 어차피 섭정이랑 1황자만 죽이면, 그러면 금방이었는데.”
실제로 원작에서 메이딜리언은 지금 한 말과 비슷한 일을 벌였다.
혹여나 정말로 그가 그런 짓을 할까 봐 윈터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려는데, 메이딜리언이 한 발 더 빨랐다.
“하지만 당신은 원하지 않겠죠. 그런 방식으로 황제가 되어 봤자.”
그 또한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윈터가 하자는 대로 그저 묵묵히 그녀가 만든 길을 걸었다.
“그래서 참았어요. 견디고, 어떻게든, 어떻게든 당신의 방식에 맞춰서,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으로 황위에 오르려고 했어요. 근데…….”
고개를 든 메이딜리언의 눈동자가 불길하게 일렁거렸다.
“그런데 당신이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그 시선이 윈터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다.
“말해 봐요.”
“…….”
“당신이 죽어 버리면, 이 모든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죠?”
“나는…….”
윈터가 처음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점점 머리가 멍해져서 그럴듯하게 꾸며 낼 만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게는 가망이 없어.”
그래서 처음으로 진실을 말했다.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흠칫했다.
이내 그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더니 눈물이 가득 맺혔다.
“지난 8년 동안, 아주, 열심히 노력했는데…….”
자꾸만 목이 메서, 윈터는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희망이 없었어.”
윈터는 아픈 것에 익숙했다.
지금도 온몸이 간신히 마력 폭주를 막아 내느라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잘게 빻은 유리 조각을 들이켜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져 가는 메이딜리언의 모습을 보는 것만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해.”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속삭였다.
“왜…….”
“…….”
“그런데도 당신은 대체 왜…….”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메이딜리언이 다시 고개를 떨궜다.
뚝, 눈물 한 방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자신도 그렇게 몸을 던지고 싶다고 메이딜리언은 생각했다.
“왜 항상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요?”
“그건…….”
“어째서 당신 자신은 조금도 아끼지 않아요?”
처음으로 메이딜리언은 윈터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죄스럽기까지 하면서도, 윈터를 향한 원망이 도저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
“단 한 순간이라도, 내 생각을 해 줄 수는 없었던 거예요?”
자꾸만 숨이 막혔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창백한 짐승이 울부짖고 있었다.
“정말 내게 남은 목숨을 전부 주고, 그냥 그렇게 혼자 죽으려고 했던 거예요? 어차피 가망도 없는 목숨이니까?”
다른 그 무엇도 이렇게 그를 괴롭게 하지 못했다.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죽음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 안에는 끝내 자신이 윈터를 지키지 못하고,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까 싶은 불안감도 있었다.
“당신 혼자 한 노력을, 내게 노력이라고 하지 말아요.”
“메이.”
“왜 내게는 기대지 않아요? 살려 달라고, 살고 싶다고 말했으면……!”
그랬으면 뭐든 했을 것이다.
이토록 멍청하게 시간만 버리고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 그녀부터 살렸을 것이다.
자신이 너무도 안일했다는 것을 깨달은 메이딜리언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말한 적 없었는데.”
떨리는 윈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메이딜리언이 속삭였다.
“제가 왜 황제가 된다고 한 줄 아세요?”
원작에서, 그의 오랜 바람은 황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게 된 뒤로 오직 그것만이 메이딜리언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윈터는 기꺼이 그것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메이딜리언은, 과연 그것을 정말로 원하는 걸까?
“당신을 살리려고.”
메이딜리언은 스스로 답을 내놓았다.
그것은 주저 없이 제 심장을 갈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잠깐만, 메이.”
본능적인 두려움에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불렀다.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이든, 어쩐지 여기서 그의 말을 더 들었다가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빠지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늘 윈터의 말에 순종하던 메이딜리언은 이번만큼은 그녀의 뜻에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죽을 수 없어요. 내가 어떻게든 살려 낼 테니까.”
원작에서 그의 욕망은 항상 칸나를 얻고, 제 몸에 새겨진 혈통을 찾아 복수하는 것에 향해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누구든 제 앞을 가로막는 자는 거침없이 없애 버렸고, 모두의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려 했다.
그런데 지금의 메이딜리언의 심장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마치 거울과 같은 눈동자에는 정염이 가득했다.
“아.”
그의 눈동자를 거울과 같다고 느끼고 나서야 윈터의 가슴이 와르르 무너졌다.
작은 탄식과 함께 간신히 쌓아 두었던 벽이 그대로 모래처럼 흩어졌다.
윈터도 그를, 그도 윈터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윈터는 더욱 괴로워졌다.
슬픔 가득한 그녀의 시선을 오롯이 응시한 채 메이딜리언이 천천히 몸을 숙였다.
먼지와 피 얼룩으로 더러운 윈터의 무릎 위에 새털처럼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당신을 사랑해요.”
경건하게 내리깐 눈동자로, 마치 신앙을 고백하는 것처럼, 그렇게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메이, 나는…….”
그저 관성처럼 윈터는 그의 마음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이 먼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알아요.”
“……뭐?”
“다 안다고요. 당신의 애정이, 그냥 강아지나 고양이를 예뻐하는 것처럼, 불쌍한 어린애를 마땅히 가여워하는 것처럼, 그저 사소한 애정일 뿐이라는 걸 알아요.”
그게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
윈터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메이딜리언은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불완전해요.”
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메이딜리언이 낮게 속삭였다.
“당신이 주는 애정이 어떤 형태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고요.”
메이딜리언은 줄곧 괴로워했다.
윈터가 주는 애정은 너무도 달콤해서, 아주 조금만으로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던 마음은 사라지고 자꾸 추악한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윈터를 갖고 싶어 하는 자신이 너무 더럽고 간악한 것 같아 괴로웠다.
멍청해서, 상대방이 단순한 호의로 내민 손길을 구분하지도 못해서, 혹시 아가씨도 자신과 같은 마음은 아닐까 들뜰 때면 차라리 그대로 벽에 머리를 박아 죽어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니까 만약 내게 당신이 유일한 것처럼.”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가지고 싶었다.
“당신도 내가 유일하다면, 그렇다면…….”
그 길이 아무리 괴롭고 끔찍하더라도, 설령 윈터마저 자신을 괴물처럼 여기더라도 놓을 수가 없었다.
“내게 충성해. 나는 당신에게 명령할 테니까.”
나비가 허물을 벗고 마침내 날개를 활짝 펼쳤다.
붉고 아름다운 시선이 그녀를 꿰뚫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아서 윈터는 숨을 멈췄다.
“나를 사랑해.”
그녀의 발아래에 엎드린 채로, 메이딜리언이 속삭였다.
“나를 사랑해 줘요, 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