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 *
메이딜리언은 정신이 혼미했다.
윈터가 빛 속으로 사라진 순간 그의 뇌에서도 뭔가가 뚝, 끊어졌다.
그 뒤로는 사실 어떻게 된 건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버린 건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각은 끝도 없이 어둑한 곳으로 흘러갔다.
‘결국 버려진 것인가.’
그녀가 항상 위험에 망설임 없이 뛰어든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윈터에게 도움이 되자고 스스로 다짐했었는데.
이번에도 메이딜리언은 윈터를 지키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괴로워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갈급한 마음에 어깨가 들썩이며 숨이 거칠어졌다.
메이딜리언은 그저 본능적으로 마력을 움직였고 늘 그랬던 것처럼 윈터를 찾아 헤맸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홀로, 황량한 사막 한복판에 우뚝 서 있었다.
“여긴…….”
주위를 살피며 윈터의 흔적을 찾던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새카맣게 타 버린 쓸모없는 몸뚱이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반사적으로 메이딜리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풍화 작용으로 깎인 암석처럼 뻣뻣하게 굳어 가던 살덩이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헐떡였다.
메이딜리언은 물었다.
“윈터는 어디에 있지?”
“사, 살려…….”
“말해라. 윈터 블라디미르는, 어디에 있나.”
그러나 시체나 다름없는 자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저 허망한 숨소리만 쉬익, 쉬익 흘러나왔다.
메이딜리언의 무기질적인 시선이 서서히 살기를 머금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손끝에도 새카만 마력이 고였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마저도 무자비하게 도륙하려는 듯, 섬뜩한 기운이 흘렀다.
그때였다.
치미는 살기를 채 갈무리하지 못하던 메이딜리언의 시선에 뭔가가 걸렸다.
사막의 별처럼 푸르게 반짝이는 장신구였다.
귀걸이 하나가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다.
“하.”
옅은 한숨과 함께 메이딜리언의 손에 어렸던 마력이 흩어졌다.
귀걸이를 주워 드는 메이딜리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온통 버스럭거리던 심장이 고작 윈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생기가 돌았다.
‘사막에서 필요할 것 같은 걸로 몇 가지 챙겨 봤는데 말이야.’
서부 사막에서 만타라스를 찾게 하겠다는 두 번째 과제를 제안했을 때 윈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나 모를 암습과 낙오를 대비하여 그녀는 많은 것들을 준비해 두었다.
이것 또한 그중 하나였다.
전후 상황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윈터는 알버트를 무력화시켰고, 본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이 거대한 사막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러나 뒤이어 올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남겼다.
버려진 것이 아니다.
떠나간 것이 아니다.
아직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었다.
잔뜩 열이 올라 멍해져 있던 머리가 조금이나마 맑아졌다.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향했다.
“그러니 널 여기서 순순히 죽여 줄 수는 없지.”
그는 본능적으로 윈터가 기뻐할 만한 일을 찾기 시작했다.
블라디미르 가문의 수치이자, 칼로프의 황태자와 거래한 죄수가 눈앞에 있었다.
이대로 두면 얼마 못 가 숨이 끊어지겠지만, 메이딜리언은 감히 저자가 자비로운 죽음을 맞게 두지 않을 것이었다.
“고통스럽게 숨 쉬는 버러지가 되겠군.”
짧게 중얼거린 메이딜리언이 쯧, 혀를 찼다.
곧 그의 손끝에 이번에는 잿빛 마력이 맺혔다.
둥근 구 형태의 마력은 알버트의 심장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 치유력이 아주 오랫동안 알버트를 살아 있게 할 것이다.
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할 정도로 끔찍하게 오래.
“끄으으…….”
신경이 살아나고 어느 정도 정신이 드는지 알버트가 신음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는 고통마저 느낄 수 없었겠지만, 이제 곧 그에게는 격통이 찾아올 것이다.
그런 알버트를 무감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메이딜리언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쓸데없는 일에 헛되이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었다.
곧 메이딜리언이 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귀걸이에서 푸른빛이 길게 뻗어 나오며 그에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사용법을 익혀 두길 잘했군.”
이 순간 메이딜리언은 놀랄 만큼 크게 안도했다.
그러나 얼마 걷기도 전에 푸른빛이 모래 아래를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대체 윈터가 왜 이 모래 아래에 파묻혀 있단 말인가.
“젠장.”
귀걸이를 아무 데나 내던진 메이딜리언이 빛이 가리키는 곳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바닥을 헤집었다.
그런데 메이딜리언의 발이 그곳에 닿기가 무섭게 모래들이 탐욕스럽게 그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는 어째서 윈터가 이 아래에 있는지, 왜 빠져나올 수 없었는지 깨달았다.
“……하.”
작게 헛웃음을 지은 메이딜리언은 아무런 저항 없이 기꺼이 그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 * *
윈터가 정신을 차린 것은 똑, 똑 어디선가 떨어지는 물소리 때문이었다.
“허억……!”
막혔던 숨이 터지고, 뒤이어 몸이 덜덜 떨릴 만큼 엄청난 오한이 찾아왔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주위를 경계하는데, 그녀의 몸은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비틀거렸다.
누가 오른쪽 눈을 기다란 바늘로 찌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두통이 몰려왔다.
“으욱.”
그대로 서늘한 벽을 짚은 윈터가 털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땅을 짚은 채로 그녀는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마력 폭주의 전조였다.
“대체 왜…….”
그러나 윈터는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아이셀이 한 번 더 개조해 준 녹스를 손에 쥐고 있었다.
마력 폭주가 일어날 만큼 무리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나약한 심장이 당장이라도 봉인을 뚫고 마나를 터뜨릴 것처럼 요동을 치는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숨을 가다듬고, 어떻게든 날뛰는 마력을 가라앉혀 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윈터는 그저 작게 몸을 웅크리며 기도하는 것처럼 녹스를 꽉 끌어안았다.
그대로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다 꺼진 촛불처럼 의식이 힘없이 명멸했다.
어디선가 스르르, 마치 모래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처럼 고운 모래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미약하던 소리는 어느새 점점 크고, 빠르게 들렸다.
그것이 가뜩이나 제정신이 아닌 그녀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으으.”
윈터가 작게 신음하던 그 순간이었다.
“아가씨!”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에 윈터가 간신히 눈을 떴다.
뿌연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메이?”
목소리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메이딜리언이 성큼성큼 윈터를 향해 다가왔다.
“젠장, 아가씨! 괜찮아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쓰러진 윈터를 조심스레 부축한 메이딜리언이 황급히 윈터를 살폈다.
식은땀에 젖은 얼굴은 두 뺨이 발갛게 변할 만큼 열이 올라 있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불덩이처럼 몸이 뜨거웠다.
알버트와의 전투 중 다친 것인지, 윈터는 곳곳에 화상까지 입은 상태였다.
애써 분노를 눌러 삼킨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피부가 빠르게 제 색을 찾는 것이 보였다.
“이제, 괜, 찮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밀어냈다.
그녀를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던 그는 윈터의 미약한 힘에도 쉽게 뒤로 물러났다.
윈터는 몸을 바짝 긴장시키고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축이며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그런대로 버틸 만했다.
그녀는 이것이 마력 폭주의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메이딜리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약한 몸은 언제나 윈터의 발목을 잡았다.
보란 듯이 이겨내고 싶었지만 운명은 가혹했다.
단단히 봉인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던 심장이 대중없이 날뛰니 그녀는 한없이 당혹스러웠다.
“여긴 어떻게 찾았어?”
애써 멍한 정신을 다잡으며 윈터가 태연한 척 물었다.
“아가씨가 남긴 귀걸이를 찾았어요.”
“그랬구나.”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윈터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너한테 알려 주길 잘했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어요.”
메이딜리언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좀 찔리는지 슬쩍 윈터의 시선을 피했다.
당시엔 윈터가 사라진 것에 눈이 뒤집혀서 뭘 생각하거나 남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가씨가, 위험한 것 같아서 다른 것까지는 생각 못 했어요.”
정확히는 안 한 거였다.
윈터가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는 타인에게 큰 관심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뻔히 아는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달래듯 말했다.
“그러면 안 돼. 황위에 오르면, 전부 네가 지키고, 신경 쓰고, 다스려야 하는 사람들이야.”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저는 그런 걸 생각하거나, 계산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메이딜리언이 눈을 들었다.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가 윈터를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옭아매었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계속 내 옆에서 같이 해 줘요.”
계속, 같이.
그 말에 윈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그녀가 그럴 수 있을까.
얼마 남지 않은 목숨, 그저 활활 태워서 메이딜리언에게 주고 싶었다.
사실 지금 상태라면 여기를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아가씨.”
메이딜리언이 윈터를 불렀다.
그는 언제나 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손짓, 애써 감추려는 눈빛에서도 기민하게 그녀를 읽어 내려고 했다.
그렇기에 지금 윈터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것이 항상 메이딜리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요?”
“응?”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이딜리언은 아까부터 윈터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가씨 마력이 이상해요.”
윈터는 그대로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