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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99/150)

99화

윈터가 미친 듯이 날뛰는 알버트를 살피는 사이 메이딜리언은 아디엘에게 상황을 보고 받았다.

제4 기사단장인 그녀는 이번 서부 사막 행에 제일 먼저 자원했다.

“무슨 일이지?”

“뒤쪽에서 폭발 사고 발생했습니다. 아무래도 죄수가 탈출한 것 같습니다.”

죄수가 탈출했다니. 명백한 관리 소홀이었다.

면목 없는 얼굴로 말하는 아디엘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지글지글 철판 위의 치즈처럼 녹아내리는 마차의 이음새를 노려보며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조금 전까지 저기에 갇혀 있던 죄수는 다름 아닌 리비우스와 알버트였다.

이번에 델 암살 미수 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진 그들은 칼로프로 이송되고 있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그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마력 제어구를 채웠는데, 지금 눈으로 보이는 광경으로만 따진다면 마력 제어구는 전혀 효용 가치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쥐새끼가 숨어 있었군.”

메이딜리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칼로프로 가면 끔찍한 죽음만이 예정되어 있으니 저들로서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때 녹아내린 마차 사이에서 새빨간 무언가가 후욱 뛰어올랐다.

단숨에 근처 건물의 지붕까지 오른 그것은 주위를 둘러보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크르르르.”

화염에 휘감겨 인간의 말마저 잃어버린 채 으르렁거리고 있는 그것의 마력이 메이딜리언에게도 꽤 익숙했다.

알버트 블라디미르.

언젠가 그가 친히 손목을 부러뜨려 준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게 대체…….”

짐승이나 다름없는 충격적인 모습에 아디엘이 말을 잃었다.

“꺄아아악!”

“얼른 대피해요! 이쪽, 이쪽이에요!”

“으, 으아악! 괴, 괴물!”

알버트가 올라선 건물도 고열로 인해 불이 붙더니 빠른 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기겁한 사람들이 머리를 감싸며 우르르 뛰어나왔다.

누가 나오거나 말거나 알버트의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는 누군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뜨거운 열기 때문에 그의 주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배경이 일그러졌다.

몸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 불꽃은 마치 살아 있는 용암처럼 보였다.

“세상에…….”

“신이시여, 맙소사.”

경악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겁에 질렸다.

단순히 죄수가 탈출한 것 정도가 아니라, 알버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재앙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감이 빠르게 전염되던 순간이었다.

바닥까지 녹이려 들던 불길을 순식간에 잠재우며 새하얀 얼음이 빠르게 건물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윈터였다.

“아가씨!”

날 듯이 달려온 데보라와 칸나가 윈터의 주위를 엄호했다.

그러나 윈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희는 가서 다친 사람부터 구해.”

“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칸나가 울상을 지었다.

상대는 결코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과연 윈터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었다.

“알겠어요, 아가씨.”

그러나 윈터의 말이라면 신이라도 받들 듯이 따르는 데보라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버트를 잡고 나서 그를 결박하기 위한 마도구까지 야무지게 챙겨 내민 데보라는 우물쭈물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으려는 칸나까지 데리고는 재빨리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전하.”

두 사람이 폭발에 휘말린 사람들을 구하러 가는 것을 본 윈터가 몸을 돌렸다.

“블라디미르 가문 소속이던 죄수가 도망쳤으니, 제가 처리하게 해 주십시오.”

가슴에 손을 얹은 정중한 자세는 나무랄 데 없는 충신 같았다.

메이딜리언은 침묵했지만 윈터는 그것을 승낙으로 알아들었다.

곧 그녀가 바람의 마력을 이용해 허공에 가볍게 떠올랐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메이딜리언은 순간 자신의 위치가 갑갑해졌다.

“윽, 크아악!”

“무, 뭐 하는 거야! 데이먼! 정신 차려!”

그 사이 아래도 혼란이 더욱 가중되었다.

호위로 데려온 기사들 중 몇몇이 리비우스의 최면에 당한 듯했다.

상황을 정리하기는커녕 이제 그들은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아디엘 경.”

“예, 전하.”

낮게 한숨을 내쉰 메이딜리언이 아디엘을 불렀다.

윈터의 얼음과 알버트의 화염이 만나 주변에 점점 습기가 차며 부옇게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최면에 넘어간 자들을 제압하고 리비우스 블라디미르를 포박해.”

“예, 알겠습니다.”

시야는 점점 한 치 앞도 모를 정도로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짧게 부복한 아디엘이 잠시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나는 저쪽을 막는다.”

당연히 윈터와 알버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개 너머로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다행히 아직까지 윈터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얼핏 보면 윈터가 우세한 것 같지만 알버트의 공격이 그답지 않게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어만 하면서 자꾸만 뒤로 물러나는 것이 마치 윈터를 어딘가로 유인하는 것 같았다.

윈터가 그것을 모를 리 없겠지만, 그녀는 자기보다 남들이 우선이니까.

최대한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자 기꺼이 저 얕은수에 어울려 주는 것이겠지.

“호위는 필요 없으십니까?”

아디엘이 예의상 물었다.

무투 대회 우승자에게 호위는 사실상 유명무실했다.

메이딜리언은 가볍게 손을 내저어 물리고는 윈터와 알버트가 싸우고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아까부터 경고라도 하듯 심장이 쿵쿵, 날뛰고 있었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 * *

녹스를 손에 쥔 윈터가 알버트를 조준해 마력탄을 맞췄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이 알버트의 몸을 보호했지만 빈틈을 노리고 휘어진 마력탄 몇 개는 알버트에게 명중했다.

“크아아악!”

왼쪽 무릎과 갈비뼈 쪽에 마력탄을 맞은 알버트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몸을 뒤틀던 알버트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열기 때문에 지붕이 무너져내린 탓이었다.

바람의 마력으로 발아래를 감싸고 있던 윈터는 조심스레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추락한 알버트는 타다 만 나무 조각과 엉겨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피와 먼지, 불티까지 여기저기 튀며 시야를 확보하는 것도 힘들었다.

“이제 폭주는 끝난 건가?”

데보라가 건네준 마력 제어구를 짤랑거리며 윈터가 알버트를 향해 다가갔다.

대체 무슨 각성제를 마신 건지, 마력이 폭주해서 날뛰던 모습은 일견 섬뜩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보다 너무 쉽게 잡힌 느낌이었다.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채 윈터가 한 걸음 더 걸어간 그 순간이었다.

번쩍 눈을 뜬 알버트가 화염으로 거대한 손을 만들더니 그대로 윈터를 움켜쥐었다.

“죽, 어라……!”

어느 정도 기습에 대비하고 있던 윈터는 황급히 얼음으로 몸을 감쌌다.

그러나 거리가 생각보다 너무 가까웠다.

덕분에 얼음이 느리게 덮인 곳은 미약한 화상을 입고야 말았다.

“으윽.”

매캐한 냄새와 함께 지독한 고통이 찾아왔다.

잠시 머리가 아찔해진 윈터가 비틀거렸다.

그때 부연 수증기 너머로 환하게 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거대한 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한 윈터가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젠장.”

마력을 가득 머금은 알버트의 피가 건물 아래에 있던 이동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검문소에서 칼로프로 넘어가는 국경까지 한 번에 가기 위한, 바로 그 마법진이었다.

뒤로 물러서는 척 이 건물 아래로 떨어지고, 그 뒤에 마법진을 발동시켜 자신을 다른 이들과 격리하는 것까지 전부 알버트의 작전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윈터가 황급히 마법진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빛이 그녀를 뒤덮는 속도가 더 빨랐다.

“윈터!”

엄청난 마력 파장에 감싸이며 윈터는 언뜻 자신을 부르는 메이딜리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쿨럭, 쿨럭.”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사막 한복판에 있었다.

물기 하나 없는 건조한 열기가 훅 끼쳐 왔다.

“큭큭.”

목이 까끌까끌해 연신 기침을 하던 윈터의 귓가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다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알버트가 보였다.

윈터는 바닥을 딛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하하하!”

그런 그녀를 보며 알버트는 광포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웃겨?”

윈터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우습지. 그렇게 우쭐해 하던 네 꼴을 봐라. 누구도 여기서는 너를 구하러 오지 못한다. 하하!”

“여기선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왜 굳이 이곳으로 너를 불러들였겠어?”

씨익 웃은 알버트가 제 손을 내밀었다.

화염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손이 무시무시하게 크기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마력 폭주가 일어나면 주위 공기에 함유되어 있는 마나까지 미친 듯이 빨아들이게 된다.

말 그대로 마력을 흡수하는 살아 있는 블랙홀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특히나 열기로 가득한 사막이니, 화염의 마력을 사용하는 알버트에게 유리한 전장인 것은 맞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렇다는 의미였다.

“크하하! 드디어 네년의 숨통을 끊어 줄 수 있게 되었구나.”

마력 폭주를 일으키면 심장이 과부하를 일으키고 폭주를 멈추지 못하게 된다면 결국 시전자 또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 사실을 윈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버트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광기에 가득 차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제 목숨을 태워서라도 윈터를 죽이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런 알버트를 윈터는 그저 애잔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 아직도 그런 오만한 표정을 하고 있나? 차라리 무릎 꿇고 빌어라. 살려 달라고 울면서 읍소라도 한다면 고통 없이 끝내 줄 수도 있다.”

“알버트.”

한숨을 푹 내쉰 윈터가 알버트를 불렀다.

고작 이름 한 번 불린 것뿐이었는데 묘한 긴장감이 맴돌며 알버트가 흠칫 어깨를 굳혔다.

“이제 헛소리는 다 지껄였어?”

평소와 다름없는 나긋한 목소리가 모래바람을 타고 흘러나왔다.

윈터의 발밑에서 모래가 둥글게 진동하며 퍼져나갔다.

눈에 보일 정도로 강대한 마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무, 무슨……!”

“하나 알려 줄까?”

픽 웃은 윈터가 손을 뻗었다.

“단둘이 남기를 기대한 건 너뿐만이 아니거든.”

곧 신호탄이 터지는 것처럼 그녀의 손에 새파란 마력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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