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반사적으로 뇌를 거치지 않고 나온 말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메이딜리언이 푹 웃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아니, 그냥…….”
평소에도 위험할 정도로 미남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달리 반짝거렸다.
나름대로 메이딜리언의 미모에 익숙해졌던 윈터도 그대로 몸이 굳었을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알 만했다.
그때 살짝 넘긴 결 좋은 은발이 살랑거렸다.
“그러고 있지 말고 얼른 들어와요.”
마차에서 조금 몸을 일으킨 메이딜리언이 윈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자기 인형처럼 섬세하고 유려한 미형의 얼굴과 달리 메이딜리언의 손은 아주 커다랗고 마디가 툭 불거진 형태였다.
“어, 으응.”
뭔가에 홀린 것처럼 윈터가 그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메이딜리언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윈터를 가볍게 마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 모습이 윈터의 눈에는 아주 느리게 보였다.
“좀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강인한 팔뚝과 알맞게 근육이 붙은 몸. 늘씬한 종마 같은 긴 다리까지.
이제 어린 시절 잔뜩 상처 입은 여린 짐승 같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항상 윈터는 자신이 메이딜리언을 보호해 줘야 한다는 책임감에 매몰되어 있었다.
머리로는 그가 이제 다 자라 한 사람 몫을 하고도 남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서부 사막은 처음인데, 아가씨도 그렇죠?”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윈터는 메이딜리언이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불쑥 자란 것처럼 당혹스러운 현실감이었다.
덕분에 그동안 메이딜리언에 대한 마음을 차곡차곡 정리해 단념하겠다는 윈터의 다짐은 훌쩍 어디론가 증발하고 말았다.
“만타라스를 정말 찾을 수 있…… 아가씨?”
맞닿은 손의 체온 때문에 윈터의 귀와 목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평소보다 붉은 얼굴에 메이딜리언이 반대쪽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예고도 없이 닿은 손길에 윈터가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평소와 달리 나사 하나쯤 빠진 듯 이상한 윈터의 태도에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아파요?”
“아, 아니!”
스위치라도 눌린 것처럼 버럭 대답한 윈터가 파드득 어깨를 털며 훌쩍 뒤로 물러났다.
“흐음.”
그런 윈터를 보는 메이딜리언의 눈동자가 한차례 가늘어졌다.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전혀. 난 아주 멀쩡해. 응. 그렇고말고.”
지난번 황궁에서 도망치듯 헤어진 뒤로 두 사람은 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평소엔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시시콜콜한 편지를 공작가로 보내곤 했던 메이딜리언도 이번에는 잠잠했다.
그 시간 동안 윈터는 많은 고민과 불면의 밤을 보냈다.
가뜩이나 몸도 성치 않은 인간이 잠도 제대로 자지를 못했으니 그 여파는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났다.
눈가에 생긴 그늘을 응시하며 메이딜리언은 치밀어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아가씨 지금 제가 한 말 다 못 들었죠?”
“응? 어어, 미안. 뭐라고 했는데?”
“됐어요. 별말 아니었거든요.”
가볍게 손사래를 친 메이딜리언이 시종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시종이 마차의 문을 닫았다.
이윽고 좁은 공간에는 단둘만이 남았다.
차기 황태자가 될지도 모르는 2황자와 소공작이 탄 마차였다.
보통 마차의 3배는 되는 크기였지만 심리적으로 윈터는 무척이나 이 공간이 좁게 느껴졌다.
덕분에 윈터의 시선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헤맸다.
“뭐 해요?”
어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삐걱거리는 것은 당연히 맞은 편에서 홀로 반짝이고 있는 메이딜리언 때문이었다.
열린 마차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온 햇빛과 바람 덕분에 그는 마치 연못가에 피어난 한 떨기 수선화 같았다.
온 숲의 님프들이 사랑할 만한 미모에 윈터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바보처럼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얼버무린 윈터는 가지고 온 가방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뒤적였다.
성마른 손길에 닿은 물건에 마침내 그녀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난 가는 동안 책이라도 읽으려고.”
아무 데나 펼친 책을 윈터는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꾹 웃음을 참은 메이딜리언이 일부러 툴툴거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재미없게 책만 볼 거예요?”
그것도 모자라 윈터가 들고 있는 책 끝을 살살 건드렸다.
그 손가락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물렀다.
윈터는 기도라도 하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메이.”
“네, 아가씨. 이제 저랑 놀아줄 마음이 생겼나요?”
“갈 땐 조용히 각자 할 거 하자.”
단호한 윈터의 말에 메이딜리언이 작게 입술을 삐죽였다.
곧 창틀에 팔 한쪽을 걸친 그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전 아가씨를 봐야겠어요.”
“무, 뭐?”
가뜩이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데, 메이딜리언은 자꾸만 윈터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책을 내리자 오롯이 자신에게 향해 있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윈터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기묘한 마법에 속박이라도 된 것처럼 윈터는 차마 메이딜리언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홀린 듯 자신을 향하는 눈빛에 메이딜리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각자 할 일 하자더니, 이제 아가씨의 할 일도 저를 보는 걸로 바뀐 건가요?”
샐쭉한 말투가 짓궂었다.
흠칫 놀란 윈터가 얼른 다시 책을 들었다.
“아니, 나는 책 볼 거야.”
“네, 그러세요.”
한참이나 한 페이지에 고정되어 있는 책을 보며 메이딜리언이 쿡쿡 웃었다.
그는 정말로 윈터를 열심히 감상했다.
마차에서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윈터의 앞머리를 간질였다.
활자에 집중하는 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면 얼마나 황홀한 기분이 드는지 메이딜리언은 잘 알았다.
얇은 종이를 조심스레 넘기는 손가락은 가늘고 섬세했다.
마차 안으로 윈터를 끌어당길 때 메이딜리언은 손에 과한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몸에 잔뜩 힘을 주고 긴장해야만 했다.
“후우.”
그때를 생각하자 저절로 손에 힘이 다시 들어갔다.
메이딜리언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툭, 하고 윈터의 손에 있던 책이 떨어졌다.
“……아가씨?”
열심히 읽던 책이 마차 바닥을 구르는데도 윈터는 꿈에도 모르는 듯했다.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더니 끝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비척거리는 윈터를 조심스럽게 잡은 메이딜리언은 잠시 숨을 멈췄다.
윈터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귀가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안심했다.
“당신도 참, 안일하네요.”
그제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메이딜리언도 작게 중얼거렸다.
마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그렇게 경계를 하더니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은 더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녀가 무슨 고민으로 밤을 지새운 건지는 모르지만 그 고민의 주체가 자신이었으면 좋겠다고, 메이딜리언은 생각했다.
“잘 자요, 윈터.”
조심스레 윈터를 눕혀 주며, 메이딜리언이 속삭였다.
* * *
윈터가 눈을 뜬 것은 마차가 이동 마법진을 관리하는 제1 검문소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대체 언제 잠이 든 건지 마차 의자에 편하게 몸을 눕히고 있던 윈터는 혼곤한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어났어요?”
그때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팔로 머리를 괸 채로 책을 읽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메이?”
“더 자요. 아직 사막에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으니까.”
나직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이 감기려던 윈터가 흠칫 놀라더니 번쩍 몸을 일으켰다.
툭, 하고 그녀의 몸에서 재킷이 떨어졌다.
잠들기 전까지는 메이딜리언이 입고 있던 옷이었다.
“자, 잠깐만, 내가, 내가 지금…….”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윈터가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좌우를 둘러보던 그녀는 제 이마와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널 베고 잔 거야?”
“길이 험해지면서 자꾸 흔들리니까 아가씨가 굴러떨어질 뻔했거든요.”
마법으로 떡칠을 해서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마차였지만, 메이딜리언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마차의 성능까지 의심할 정신이 없던 윈터는 그저 마른세수만 연거푸 했다.
“그냥 떨어지게 두지 그랬어.”
“어떻게 그래요.”
작게 어깨를 떨며 웃은 메이딜리언이 읽고 있던 책을 덮어 내려 두었다.
잠들기 전까지는 윈터가 읽고 있던 책이었다.
반 이상이 넘어가 있는 페이지를 보며 윈터는 막연하게나마 제가 잠들어 있던 시간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혹사당했을 메이딜리언의 다리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미안. 진작 일어났어야 하는데.”
“그렇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아니야. 내가 너무 둔했어. 딱딱해서 의자인 줄 알았거든.”
그게 의자가 아니라 근육이 가득한 황자님의 다리인 줄 알았다면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지는 않았을 텐데.
어째 지난 며칠간 속으로 다짐한 게 전부 수포가 되는 것 같은 느낌에 윈터는 착잡해졌다.
“다리는 괜찮아? 주물러 주기라도 할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두 사람 다 동시에 움찔했다.
윈터는 할 수만 있다면 제 입을 마구 치고 싶었다.
“방금 그거, 농담이죠?”
“아니. 실언이야.”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하는 말에 메이딜리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 순간, 두 사람은 다시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행렬 뒤쪽에서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느껴졌다.
“크아아악!”
저 멀리서 들리는 비명에 윈터는 당장 마차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녀가 그러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던 메이딜리언도 뒤이어 마차에서 내렸다.
어둑해진 하늘, 행렬의 가장 끝 마차가 폭발하더니 새빨갛게 타오르는 화염이 주변을 호위하던 기사들을 태우며 혀를 날름거렸다.
폭발한 마차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 그리고 저 마력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린 윈터가 찌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신음처럼 이름 하나를 중얼거렸다.
“알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