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7/150)

97화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오직 그것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메이딜리언은 금세 고개를 들었다.

어둠에 잠겨 있던 냉담한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진다.

조금 부푼 눈동자는 반가움과 기쁨, 염려로 채워지며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입가에 희미하게 맺히는 미소가 환하고 청초했다.

고요한 물가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윈터의 심장이 다시 일렁거렸다.

반사적으로 제 가슴을 꾹 누른 윈터는 그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아가씨?”

평소와 다른 반응에 메이딜리언이 윈터를 불렀다.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는 그녀를 아가씨라고 부른다.

“무슨 일 있었어요?”

메이딜리언이 성큼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입술을 꾹 깨문 윈터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왜 나한테서 멀어져요?”

그래야 하니까.

쓸모없는 마음 같은 건 들키기 전에 숨겨야 했다.

그런데 메이딜리언 앞에만 서면 좀처럼 잘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진심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필사적이어서, 윈터는 차마 속에 들어 있는 대답을 그럴듯하게 꾸며낼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뭐 잘못했어요?”

메이딜리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반가워서 한달음에 달려왔던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시무룩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윈터가 어두워진 메이딜리언의 표정을 마주하고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이건 그냥…….”

“그럼 왜 그래요?”

허공으로 뻗어진 윈터의 손을 메이딜리언이 자연스럽게 잡아챘다.

그러고는 불쑥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윈터의 어깨가 파드득 떨리더니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반짝거리는 잘생긴 얼굴이 물리적으로 너무 가까웠다.

얼른 고개를 숙인 윈터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히끅.”

그리고 숨긴 마음이 심술이라도 부리듯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윈터는 할 수만 있다면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다.

처음엔 그냥 팬심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얼마 안 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무 고민도 없이 메이딜리언을 삶의 목표로 정했었다.

그렇게 어언 1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윈터는 어느새 제 마음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음을 깨달았다.

그걸 알아차리고 나니 도저히 평소처럼 메이딜리언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윈터?”

메이딜리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마력에 이끌린 것처럼 윈터는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메이딜리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저, 저는, 끅, 이만…….”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인 윈터가 잡힌 손을 빼내고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도저히 떨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당장에라도 떠나는 윈터의 뒤를 따랐을 메이딜리언이지만, 지금은 그도 그럴 정신이 없었다.

좀 전에 마주한 윈터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기 좋게 발그레한 뺨과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넘쳐흐르는 찬란한 금빛 눈동자.

인간에게 관심이라곤 조금도 없는 메이딜리언이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방금 그가 본 것보다 아름다운 장면은 없으리라는 것을.

“하.”

낮은 탄식을 뱉어낸 메이딜리언이 다시 텅 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뭔가를 꽉 움켜쥐듯, 그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 * *

1차 경합에서 승리한 뒤, 가장 바빠진 것은 아르카였다.

데보라가 리비우스에게 세뇌당한 뒤로 그들의 본거지인 제니마 상회가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리비우스가 과연 아르만 백작이나 크비누스에게 제니마 상회에 대한 진실을 알렸는지 알리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엘리슨은 아주 조금의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에 과감하게 본거지를 정리하기로 했다.

이 작업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당연히 윈터였다.

“이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는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기 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어트였다.

윈터의 요청으로 칼리스타의 부단주가 아르카의 일에 나섰다.

시종일관 나른한 표정을 짓다가 가끔 속 모르는 얼굴로 웃는 그가 엘리슨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정말 안전한 거 맞아?”

비단 엘리슨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 듯했다.

거대한 나무 상자를 세 개씩 옮기던 한타가 영 미심쩍은 얼굴로 재차 물었다.

“그렇다니까.”

벌써 열 번도 넘게 물어봤지만 리어트는 짜증스러운 기색도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윈터가 이들을 꽤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수도에 칼리스타 지점을 내면서 윈터는 물류창고 하나를 안전 가옥으로 개조하라고 지시했다.

당시에는 대체 안전 가옥이 왜 필요한가 의아했는데, 리어트는 지금에서야 그 용도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안전 가옥은 처음부터 아르카 단원들을 위한 것이었다.

언젠가 그들의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했을 때 물밑으로 숨기 위해서.

“하여간, 철저하시다니까.”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면서도 리어트의 입가에는 애정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한타 씨랑 데보라는 이번에 호위로 가는 거 잊지 않았지?”

“어어, 그럼. 당연하지!”

엘리슨과 베일리는 안전 가옥에서 수도의 동태를 살피고, 한타와 데보라는 상행의 호위로 위장하기로 했다.

칼로프와의 무역 협상에서 메이딜리언이 승리한 뒤 교역에 필요한 물자들을 나르는 데에 제니마 상회가 동원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또한 윈터가 크비누스의 눈을 피하고자 쓴 수였다.

“네에, 저도 알고 있어요.”

한타의 시원한 대답과 달리 데보라의 대답은 한참이나 뒤에 들려왔다.

요즘 들어 데보라는 잔뜩 의기소침해진 상태였다.

리비우스의 세뇌에 당해 아르카의 본거지가 밝혀질 위기에 처한 데다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윈터가 칼로프의 황태자와 뭔가 특별한 거래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데보라.”

축 늘어진 힘없는 뒷모습을 보다 못한 엘리슨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네?”

흐느적, 흐느적 데보라가 몸을 돌렸다.

엘리슨은 그런 데보라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네 잘못 아냐.”

벌써 며칠째 매일같이 듣는 말이었다.

그러나 데보라의 얼굴은 울 듯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제 잘못이 아니에요? 아가씨가…….”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데보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가씨가 칼로프의 황태자랑 결혼할지도 모르잖아요!”

“……뭐?”

엘리슨은 전혀 뜻밖의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런 그녀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데보라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엉엉 오열할 것처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였다.

“저 때문에 아가씨가 너무 많은 희생을 했어요. 이번에 사막으로 가는 것도 그렇잖아요!”

“아니, 그건 그냥 두 번째 경합 주제 때문에…….”

“그건 핑계일지도 몰라요. 경합 때문이면 그냥 우리끼리 가면 되는데 왜 굳이 그 황태자랑 같이 가는데요?”

“그거야 마침 목적지가 같으니까…….”

“그런 식으로 친해진 다음 황태자가 아가씨를 꼬여내서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해요? 아가씨는 저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래서, 그냥 그대로 황태자랑 결혼하면, 흑…….”

끝내 데보라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어린애처럼 으허엉, 하고 우는 소리에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한 번씩 시선이 향했다.

“뭐야, 데보라 또 울어?”

“아가씨가 칼로프의 황태자랑 결혼할까 봐 저런대.”

“그럼 좋은 거 아니야?”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낄낄 웃으며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문제는 그 소리를 같이 있던 리어트도 들었다는 거였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늘 비웃음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곧 말도 안 되는 소문의 근거지가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 데보라라는 것을 알아챈 리어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봐, 아가씨.”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인 리어트가 데보라를 불렀다.

“흡, 네?”

그새 얼마나 눈물을 쏟아낸 건지,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데보라가 훌쩍이며 대답했다.

“우리 단주님은 옆 나라 황태자랑 결혼 같은 거 안 해.”

“진, 짜요?”

“그래. 그러니까 아가씨가 힘써서 구해준 목숨, 이런 유언비어 퍼뜨리는 데에 쓰면 안 되겠지?”

싱긋 웃는 얼굴이 살벌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메이딜리언의 살기에 익숙해져 있는 데보라에게는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리어트가 한 말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칼로프의 황태자는 엄청나게 잘생겼잖아요. 아가씨가 안 넘어갈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확답을 받으려는 듯 데보라가 재차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물음에 리어트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제 입으로 차마 내뱉기 영 짜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데보라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리어트가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 또한 윈터가 황태자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단주님은 안 넘어갈 거야.”

눈치가 비상한 리어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말을 잇는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단주님 취향은 칼로프의 황태자보다는 2황자에 가까우니까.”

그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데보라의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며 그녀의 눈물도 자연스레 말랐다.

한숨을 푹 내쉰 리어트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자식이라면 미인계를 써서라도 단주님을 붙잡겠지.”

그리고 리어트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들어갔다.

칼로프의 사신단과 함께 메이딜리언과 윈터는 서부 사막에서 만타라스를 찾으러 떠나게 되었다.

행상을 꼼꼼히 점검한 윈터가 마차에 올랐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마차에 앉아 있는 메이딜리언이 오늘따라 휘황찬란하게 반짝였기 때문이었다.

윈터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묻고 말았다.

“혹시 오늘 결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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