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전하?”
평소와 달리 메이딜리언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렸다.
이상함을 감지한 윈터가 조심스레 메이딜리언을 불렀다.
그러나 미처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메이딜리언은 반쯤 혼이 나가 있었다.
마침 대회의실에서 차례로 나오는 귀족들과 칼로프의 사신단으로 홀 내부가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윈터는 조심스레 한 발짝 메이딜리언에게 다가가 그를 불렀다.
“메이.”
그러자 대답이라도 하듯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작게 튀었다.
여전히 반쯤 멍한 얼굴로 그가 윈터에게 손을 뻗었다.
뭔가를 꾹 눌러 참는 것처럼 잔뜩 힘이 들어간 메이딜리언의 손가락이 윈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메이딜리언의 손가락이 스친 머리카락에 신경이라도 달린 것처럼 온몸의 세포가 열렬히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윈터는 반사적으로 메이딜리언의 손을 잡아챘다.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메이딜리언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바닥에 닿아 오는 뜨거운 체온에 윈터가 멈칫했다.
“메이.”
다시 한번 경고처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그제야 메이딜리언의 눈에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슬쩍 미소 지은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손등을 짧게 문지르고는 조금 뒤로 물러섰다.
분명 거리가 멀어졌는데도 여전히 체온이 남아 있는 것처럼 닿아 있던 손등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윈터는 야릇한 기분에 얼른 시선을 숨겼다.
“저, 잘했죠?”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귀에 달큰하게 감기는 음성에 윈터는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 어어, 당연하지.”
바보처럼 말을 더듬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이 낮게 웃었다.
늘 냉랭하고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표정이 오직 윈터 앞에서만 화사하게 풀리니, 그 마음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비단 한두 명이 아니었다.
“소공작.”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핑크빛 기류를 잔뜩 뿜어내는 두 사람을 보던 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 전하.”
묘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윈터가 델을 평소보다 반갑게 맞이했다.
덕분에 델은 방해꾼을 탓하는 듯한 메이딜리언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아내야 했다.
“말한 대로 약속은 지켰어.”
“네, 전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윈터가 진심을 담아서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그럴 정도는 아니야. 나도 맨입으로 해 주는 것도 아닌데, 뭘.”
델이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것도 꼭 잘 생각해 봐.”
“네? 무슨…….”
“그거 있잖아.”
한쪽 눈을 찡긋한 델이 입 모양으로만 ‘망명’이라고 벙긋거렸다.
난색을 보이던 윈터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다고 했잖아요.”
“뭘 생각한단 말입니까?”
그런 두 사람의 대화에 메이딜리언이 끼어들었다.
그는 이미 윈터에게서 칼로프와 교역할 내용과 별개로 칼리스타의 지원까지 전부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왠지 델이 말하는 것은 그런 것과는 전혀 별개의 요구일 것 같다는 귀신같은 감이 발동했다.
“음? 아아, 그건 나중에 소공작한테 듣게.”
델은 빙글빙글 웃으며 메이딜리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 시원한 미남형 얼굴을 보고 있자니 메이딜리언의 표정은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윈터에게서 델이 마도구로 본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들었어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2황자 전하.”
참지 못하고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시종 하나가 메이딜리언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전하를 모시러 왔습니다. 이제 곧 두 번째 과제를 발표하셔야 합니다.”
시종의 말에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황좌를 향했다.
크비누스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자신이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영 언짢은 모양이었다.
“알겠다. 곧 가지.”
고개를 끄덕인 메이딜리언이 윈터를 돌아보았다.
“다녀올게요.”
“네, 전하.”
그러고는 델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다분히 고의적인 행동이었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싫어하는 티를 내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델이 킥킥 웃었다.
“소공작.”
“네?”
“2황자랑 진짜 아무 사이 아닌 거 확실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윈터가 당황했다.
애써 동요를 감추는 듯했지만 델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순수하게, 충심이야?”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윈터는 술렁이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곧 그녀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흐음.”
입가에 걸린 그린 듯한 미소를 보며 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윈터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몸을 움직였다.
“곧 두 번째 경합 과제가 발표될 거예요.”
“아아, 그때 소공작이 말한 그거?”
“네. 준비는 다 하셨나요?”
“나야 뭐, 몸만 가면 그만인걸.”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는 윈터를 델은 못 이긴 척 따라 주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델이 되물었다.
“소공작은 준비되었나?”
“네,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일인 걸요.”
그렇게 대답한 윈터의 눈이 어느새 메이딜리언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줄곧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듯, 메이딜리언 또한 윈터와 눈을 맞추었다.
움찔, 하더니 저절로 긴장이 어리는 윈터의 뒷모습을 보며 델은 습관처럼 제 턱을 쓸었다.
“충심이라니.”
뜻밖의 질문에 부풀던 눈동자만 봐도 단순한 충심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윈터는 진작에 제 마음을 깨닫고도 단념한 것 같았다.
“저쪽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이어서 델의 시선이 메이딜리언을 향했다.
인간에 대한 지독한 불신과 혐오. 기대라곤 없는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유독 한 곳만 향하면 생기가 돌았다.
알에서 막 깨어나 오직 윈터만을 쫓는 것 같던 열망 가득한 눈빛.
델은 그런 눈빛을 잘 알았다.
윈터가 아무리 충심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가장하고 있어도, 결국엔 메이딜리언이 그 철옹성 같은 마음을 뚫고 들어갈 것이다.
빤히 보이는 답을 두고도 멀찍이 돌아가며 삽질하는 두 사람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델이 혼자 킥킥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으십니까?”
그때 델의 곁으로 다가온 남자가 물었다.
칼로프의 사신단 중 한 명으로서, 델의 오랜 충신으로 유명한 자였다.
“아아, 그냥.”
델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던 남자가 그 끝에 메이딜리언이 닿아 있는 것을 보고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꿈에도 모른 채 델이 말을 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제니어스에 오길 잘한 것 같아.”
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느새 단상 앞으로 메이딜리언이 나섰다.
1차 경합의 승자인 그가 다음 경합의 주제를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메이딜리언에게 모였다.
“2차 경합의 주제를 발표하겠다.”
긴장감으로 홀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에른스트 후작의 곁으로 가 있던 윈터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꼭 맞잡았다.
“2차 경합의 주제는…….”
메이딜리언의 나직한 목소리가 느리게 공간을 채웠다.
“서부 사막에서 ‘만타라스’를 찾아오는 것이다.”
그 말에 아스터가 놀라서 윈터를 돌아보았다.
잔뜩 확장된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안에 담긴 것이 긴장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윈터는 그저 보란 듯이 씩 웃었다.
“만타라스라니, 그게 진짜로 존재하는 겁니까?”
“그러게요. 전설로만 취급되던 것 아니었습니까?”
“2황자가 경합의 주제로 내놓은 것을 보니 뭔가 내막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아니면 어떤 비유는 아닐까요?”
사람들은 저마다 메이딜리언의 발언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다.
제니어스 건국 신화에는 신이 피를 흘린 자리에 피어난 꽃을 ‘만타라스’라고 부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만타라스는 비유도, 전설도 아니었다.
잔뜩 경악해서 동요를 숨기지 못하는 크비누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부디 제가 서부 사막으로 가서 ‘만타라스’를 찾아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메이딜리언이 작게 고개를 숙인 채 크비누스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마치 조롱처럼 들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메이딜리언의 눈동자처럼 붉은 경고였다.
“저, 폐하?”
평소와 달리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는 크비누스를 보던 아르만 백작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다른 귀족들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크비누스가 의아한 듯했다.
웅성거림이 커지자 크비누스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윤허한다.”
마침내 지그시 눈을 내리감은 크비누스가 대답했다.
그의 반응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타라스는 바로 크비누스가 선황 미쉘라를 살해할 때 쓴 독이었으니까.
* * *
후계 경합에 대한 발표를 마치자 사람들이 저마다 분주해졌다.
신문사에서는 1차 경합에서 메이딜리언이 이겼고, 2차 경합의 주제로는 사막의 만타라스를 찾으러 간다는 소식을 내일 1면에 담을 예정이었다.
2차 경합의 주제로 나온 만타라스에 관해 왜 메이딜리언이 그러한 주제를 내놓았는지 저마다 추측하느라 바빴다.
특히 마지막에 크비누스의 석연치 않았던 반응을 기민하게 눈치챈 이들도 몇몇 있었다.
“소공작.”
홀을 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스터가 윈터를 불러 세웠다.
처음 메이딜리언이 주제를 발표한 순간부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그였다.
지금도 여전히 아스터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네, 전하.”
“잠시 대화를 청하고 싶습니다.”
곁에 있던 메이딜리언이 반사적으로 윈터의 손을 잡았다.
아스터가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던 윈터는 잠시 당황했으나 곧 미소 지었다.
“네, 좋아요.”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메이딜리언의 손에서 벗어났다.
윈터의 시선은 여전히 그를 향해 있지 않았다.
어쩐지 아까보다 훌쩍 윈터가 멀어진 것 같은 기분에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굳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전하.”
평소라면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챘을 텐데, 윈터는 끝까지
메이딜리언과 시선을 맞추지 않은 채 아스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텅 빈 제 손을 메이딜리언은 그저 어두운 얼굴로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