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50)

94화

좌중을 내려다보던 크비누스가 곧 입을 열었다.

“회의에 앞서 공표할 것이 있어 이렇게 모이라 했네.”

갑작스러운 말에 다들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크비누스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알고 있던 아르만 백작은 의식적으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1차 후계 경합이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2차 경합의 주제를 발표할 것이네. 그리고…….”

짧게 숨을 들이마신 크비누스가 메이딜리언을 바라보았다.

무엇도 담고 있지 않은, 반들거리는 무감각한 붉은 눈동자.

도미닉 에른스트의 얼굴을 한, 선황 미쉘라의 아들.

저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기쁠까.

“2차 경합과 3차 경합의 주제는 황자들이 선정하게 되며 1차 경합의 승자가 2차 경합의 주제를 먼저 정하게 될 것이야.”

예상치 못한 크비누스의 말에 다들 웅성거렸다.

조금 전 아르만 백작이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는 말이나 유독 득의양양해 보이는 미소를 보자면, 1차 경합은 아무래도 1황자 측이 승리하게 될 듯한데.

보나 마나 1황자 측은 2차 경합에서 그들에게 유리한 주제를 선정할 것이다.

그러면 3차까지 갈 필요도 없이, 황태자는 아스터로 결정이 나겠지.

“더 볼 것도 없겠군요.”

“아직 모르는 일 아닙니까?”

“지금 블라디미르 소공작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윈터는 메이딜리언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두운 얼굴로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연하고 가련한 분위기에 저절로 그쪽으로 시선이 모였다.

1황자 아스터를 배반하고 열렬한 2황자 파로 돌아섰던 그녀가 저런 표정이라니.

저절로 불길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윈터…….”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듣던 아스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윈터를 바라보았다.

홀에 들어오기 전 아르만 백작이 귀띔해 준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스터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아르만 백작이 움찔하더니 아스터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누가 봐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 윈터를 향해 있었다.

‘설마…….’

아르만 백작의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짧게 스쳐 갔다.

제 아들이 진심으로 블라디미르 소공작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곧 그는 자신의 생각을 쓸데없는 망상으로 치부하며 털어 버렸다.

지금은 그런 자잘한 일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한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윈터의 속은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하도 원작이랑 달라지는 부분이 늘어나고 있어서 혹시나 경합의 과제 선정 방식도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불안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만 회의실로 들어가지.”

대신들이 충분히 혼란스러워진 것을 본 크비누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로프의 사신들이 그 뒤를 따랐다.

“가시죠, 전하.”

에른스트 후작이 메이딜리언에게 말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회의장의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윈터가 있는 곳이었다.

성큼성큼, 협박이라도 하듯 분기가 가득한 걸음에 사람들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예상치 못한 메이딜리언의 행동에 윈터는 얼른 고개를 푹 숙였다.

곧 고개를 숙인 메이딜리언이 윈터에게 작게 속삭였다.

마치 악담이라도 하듯 살벌한 표정이었다.

물론 실상은 전혀 달랐다.

“당신이 이렇게 죄인처럼 있는 거 맘에 안 들어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한 윈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척 봐도 좋지 못한 말을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허물어지는 입가를 참아낸 윈터가 작게 속삭였다.

“나머지는 네게 맡길게.”

금빛 눈동자가 장난의 화신처럼 반짝였다.

메이딜리언은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윈터를 꽉 끌어안아 버릴 뻔했다.

그녀의 짧은 말이 그의 심장을 술렁거리게 했다.

튀어나오려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느라 메이딜리언이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나를, 믿어요?”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며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윈터가 가려졌다.

그걸 알아챈 윈터가 눈을 휘어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그래.”

기대하던 대답이 돌아오자 메이딜리언이 짧게 전율했다.

손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 그는 일부러 몸에 힘을 풀었다.

이내 메이딜리언이 마치 뜨거운 불에 덴 것처럼 훌쩍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조금 성급하게 몸을 돌려 회의실로 향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가라앉은 표정에 에른스트 후작이 슬쩍 메이딜리언에게 다가섰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메이딜리언이 말없이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그런 그를 염려 가득한 얼굴로 살피던 에른스트 후작이 움찔했다.

붉은 눈동자에 열기가 가득했다.

그 얼굴에서 언뜻 선황 미쉘라의 모습을 발견한 후작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얼른 들어가지.”

갑자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버벅거리는 후작을 잠시 의아하게 바라보던 메이딜리언이 그렇게 말하고는 제가 먼저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가, 같이 가시죠, 전하!”

이내 정신을 차린 에른스트 후작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 * *

윈터는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두 손을 맞잡았다.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 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연회장에서 소공작이랑 나랑 단둘이 테라스에 있었을 때 말이야.’

사정이야 어쨌든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일에 휘말려 델이 죽을 뻔한 건 맞으니,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윈터는 한사코 바라는 것을 말하라고 했다.

그러나 델은 윈터에게 마음의 빚을 지우는 게 더 큰 대가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일부러 가벼운 거래를 요청했다.

‘그대가 썼던 아티팩트 있잖아.’

‘방음막이요?’

‘그래, 그거. 그걸 내게 줘.’

칼리스타에서 판매하는 아티팩트는 한정되어 있었고, 무척 고가인 데다 구매마저 피 튀기는 예약을 거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척이나 희귀했다.

그러나 자칫 전쟁으로도 번질 수 있을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는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 의미를 윈터도 잘 알기에 그녀는 델에게 깊이 감사를 표했다.

‘보여 주신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면, 나중에 칼로프로 망명하는 것 좀 진지하게 고민해 봐.’

‘네, 그럴게요.’

그동안 칼같이 거절하던 것과 달리, 윈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델은 그저 인사치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이제 일은 윈터의 손을 떠났다.

남은 건 메이딜리언이 잘 해낼 것이다.

델이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목이 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게 느껴졌다.

곧 쾅, 하는 소음과 함께 대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나온 것은 크비누스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노기가 가득했다.

뒤이어 아르만 백작이 황급히 따라 나왔다.

“폐하!”

아르만 백작이 크비누스를 불렀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백작의 얼굴에 짙은 낭패감이 서렸다.

안에서 벌어진 교역 협상에서 전혀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오해가 있고 사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설마 칼로프의 황태자가 2황자 측이 내건 조건에 손을 들어 줄 줄은 몰랐다.

홀에 있는 황좌로 돌아간 크비누스가 눈을 지그시 내리감은 채 애써 화를 삭였다.

잔뜩 쪼그라든 채 안절부절못하던 아르만 백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 폐하, 저기, 그러니까…….”

“변명 같은 걸 할 거라면 차라리 그 입을 닥치시게.”

“히끅.”

살벌한 언사에 아르만 백작이 목이 졸린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시종장이 시원한 물 한 잔을 크비누스에게 내밀었다.

컵을 낚아채듯 가져가 벌컥벌컥 마신 크비누스가 씨근덕거렸다.

그의 이글거리는 시선이 홀을 미친개처럼 누볐다.

곧 크비누스의 눈에 윈터가 걸렸다.

윈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저 건방진…….”

크비누스가 이를 까드득 갈았다.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며 쥐고 있던 물잔이 바들바들 떨렸다.

“백작.”

“예, 예, 폐하.”

“2황자가 뭘 가지고 거래했는지 확실히 알아내게.”

윈터를 죽일 듯 노려보며 크비누스가 아르만 백작에게 명령했다.

백작은 그저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편 딱 봐도 분기탱천한 크비누스의 모습에 윈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거리가 멀어서 아르만 백작에게 하는 말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만 봐도 그녀가 원하던 결과가 나왔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회의장에서 메이딜리언이 걸어 나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윈터는 충실한 신하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성큼성큼 윈터에게 다가온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이겼어요.”

그 말에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메이딜리언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승리에 대한 쾌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감축드립니다, 전하.”

윈터는 그런 메이딜리언을 향해 활짝 마주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말이 퍽 만족스러운 듯 메이딜리언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한 걸음 더 윈터에게 다가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구경은 잘했어요?”

윈터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에 걸고 있던 팬던트를 슬쩍 들어 보였다.

회의장에 들어가기 전에는 잿빛이던 마석이 푸른색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연하지. 영상 아티팩트로 담아 뒀어.”

교역 협상 자리에 윈터가 참여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번 델 암살 미수 사건으로 끈 떨어진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1차 경합에서 무참히 지고 일그러질 크비누스의 표정을 직접 생생하게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구경시켜 줄게.”

의기양양하게 팬던트를 흔들어 보이며 윈터가 한쪽 눈가를 찡긋했다.

그 장난스러운 얼굴에 메이딜리언의 손이 움찔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꽉 주먹을 쥔 채 손을 뒤로 숨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윈터를 와락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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