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50)

92화

곧 윈터가 베일리를 향해 손짓했다.

“안 돼, 안 돼.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자신의 앞날을 예상한 듯 리비우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단단한 의자는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 뚜벅뚜벅 다가온 베일리가 리비우스의 앞에 섰다.

발악하던 리비우스가 그를 향해 퉤, 침을 뱉었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가……!”

그러나 그는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탁, 손에 든 마도구로 불을 켜자 뭐에 홀린 듯 그것을 응시하던 리비우스가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수고했어.”

끝까지 쓸데없는 발버둥을 치던 리비우스를 보며 윈터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뭘요. 저희도 이자에게 쌓인 게 꽤 있는걸요.”

윈터의 말에 베일리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리비우스를 향한 눈초리가 곱지 않은 것을 보니 그가 한 말이 영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뇌에서 깨어난 데보라가 당시 상황을 기억해서 전부 말해 줬기 때문이다.

‘공작가에 들어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아가씨랑은 평소에 무슨 대화를 하는지, 혹시 메이딜리언 님이랑은 공작가 일 외로도 대화를 많이 하는지를 물어봤어요.’

세뇌당한 데보라는 순순히 그 모든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을 해 줬다.

다행히 윈터와는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중요한 회의에 참석한 적도 거의 없어서 그쪽은 노출이 되지 않았지만 문제는 아르카였다.

제니마 상회가 그들의 본거지나 다름없다는 것이 리비우스의 귀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 자식은 분명 그대로 섭정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낱낱이 고해바쳤겠죠.”

진작 기절해서 겔겔대고 있는 리비우스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베일리가 말했다.

윈터도 그의 생각에 동의했다.

선황의 비밀 호위대가 숨어서 제니마 상회를 꾸리고 있다는 정보는 꽤 쓸 만한 것이었으니.

크비누스는 신이 나서 리비우스의 말을 들어줬을 것이다.

그러니 리비우스가 델을 암살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는데도 한쪽 눈을 감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겠지.

아마 크비누스는 리비우스를 앞세워서 윈터도 공작가도 알아서 자멸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심란해 보이는 베일리의 어깨를 툭툭 친 윈터가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우리도 곧 한 방 먹여야지.”

“전에 말했던 그거요?”

“그래. 돌아가면 다들 미리 짐 싸 놓으라고 해.”

리비우스와 알버트를 엮어서 델에게 가져다 바치기로 계획하면서, 윈터는 엘리슨 쪽에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어차피 제니마 상회가 노출되었으니 당분간은 황도에서 몸을 사려야 했다.

처음엔 반발이 심했던 아르카 단원들도 윈터의 제안을 듣고는 순순히 협조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런데 정말 아가씨가 말한 대로 될까요?”

당시 윈터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베일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죽이려던 블라디미르 공작가인데.

그 가문의 일원인 윈터가 한 제안을 칼로프의 황태자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윈터는 베일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씩 웃었다.

그녀가 델과 했던 이면의 계약을 누구도 알지 못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한 번 믿어 봐. 칼로프의 황태자는 반드시 우리 손을 들어줄 테니까.”

보기 드물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윈터가 장담했다.

이럴 때면 늘 윈터가 한 말이 아무리 얼토당토않아 보여도 그녀가 예상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베일리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그가 대답했다.

“뭐, 그러죠.”

“그럼 이만 움직일까.”

시계를 보던 윈터가 리비우스를 가리켰다.

“황태자가 기다릴 거야. 저것들 얼른 넘겨야지.”

곧 두 사람은 공작가의 기사들과 함께 리비우스와 알버트를 결박해서 황궁으로 향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윈터입니다.”

델이 머무는 궁에 가자 이전보다 경비가 삼엄해진 게 느껴졌다.

앞에서 신원을 확인하던 기사가 블라디미르 공작가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윈터의 뒤에는 로브를 쓴 훤칠한 남자와 정신이 혼미해 보이는 인간 둘까지 딸려 있어서 더 눈에 띄었다.

“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다만 저 뒤에 있는 분들은, 음…….”

난처한 듯 일그러지는 기사의 얼굴을 보고 윈터는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저자들은 어디 골방 같은 데 가둬 두고 황태자 전하를 알현하는 건 저 혼자 하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린 윈터가 베일리에게 눈짓했다.

“부탁할게.”

“네, 알겠습니다.”

기사들의 안내에 따라 윈터 일행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윈터는 지난번 델과 만났었던 궁의 후원으로 안내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앞선 손님들이 있었다.

“정말요? 전하는 정말 박학다식하시군요.”

“그런가? 하하. 그대가 그렇게 말해 주니 무척 기쁘군.”

“어머…….”

귀족가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델을 정면으로 마주한 윈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람둥이라는 소문을 굳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증명할 필요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어어, 소공작!”

기사가 윈터가 도착했음을 고하기도 전에 델이 먼저 윈터를 알아보고는 번쩍 손을 들었다.

어이가 없는 것은, 함께 까르르 웃고 있던 영애들이 소공작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는 것이었다.

무슨 바람이라도 피우다 걸린 사람들처럼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윈터는 그저 헛웃음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아, 그래. 오랜만이야.”

나른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눕다시피 느슨하게 기댄 델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황태자의 품위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방만한 자세였지만 무섭도록 잘 어울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윈터만은 아니었는지 주변에 있던 영애들이 저마다 뺨을 붉혔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지?”

“지난번에 약속한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벌써?”

의외라는 듯 델의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보다 손이 빠른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솜씨 좀 발휘해 보았습니다.”

윈터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 말에 델은 낄낄 웃으며 귀족가 영애들에게 말했다.

“아아, 이거 아쉬워서 어쩌나, 아가씨들. 중요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이만 자리를 파해야겠는데.”

“그럼요, 그럼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저흰 괜찮아요, 전하.”

“다음에도 또 불러 주시는 거죠?”

“당연하지. 조만간 그대들에게 모두 초대장을 보내지.”

“역시 상냥하시네요, 흐흥.”

소꿉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낯간지럽고 느끼한 대화의 향연에 윈터는 잠시 시선을 먼 산으로 돌렸다.

그녀가 이런 분위기에는 영 쥐약이라는 걸 아는 델이 일부러 저러는 거라는 걸 윈터도 이미 눈치챘다.

곧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델에게 인사한 아가씨들이 하하호호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사라졌다.

인기척이 멀어지는 걸 보던 윈터가 대뜸 말을 건넸다.

“죄 많은 남자가 된 기분이 어떠세요?”

현 제국 사교계에는 후계 다툼을 벌이고 있는 황자들을 제외하면 그럴듯한 신랑감이 딱히 없었다.

이런 상황에 갑자기 나타난 타국의 황태자란 참 보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죄 많은 남자라.”

윈터의 말이 제법 웃겼는지 델이 쿡쿡 목을 울렸다.

“다들 똑똑하고 영리한 아가씨들이야. 할 수만 있다면 하렘을 만들어서라도 다 데려가고 싶군.”

“그렇게는 안 되지 않을까요? 전하의 말씀대로 다들 대단한 인재들이라서 말이죠.”

오늘 델과의 다과회에 참가한 영애들 중에는 윈터가 점찍어 놓았던 인물들도 몇 명 있었다.

나중에 메이딜리언이 황제가 되고 나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 쓸데없이 눈치 빠른 황태자가 벌써 눈독 들이고 있다는 생각에 윈터의 눈초리가 흉흉해졌다.

“음? 너무 그렇게 보지 마. 제니어스의 초대 황제도 그랬잖아.”

윈터의 눈빛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델이 제국의 초대 황제를 언급했다.

유능한 인재들을 잔뜩 끌어다가 황궁에 모아 놓고 하렘을 차렸던 초대 황제 이야기는 타국에서도 꽤 유명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대가 나랑 같이 칼로프로 가도 좋고.”

키득키득 웃으며 델이 농담처럼 진담을 건넸다.

“제 대답은 당연히 이미 아시겠죠?”

“하여간 쌀쌀맞긴.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 그대를 올려다보려니 영 목이 아프군.”

밉지 않게 눈을 흘긴 델이 툴툴거렸다.

윈터는 델의 말대로 맞은편에 앉아서 리비우스와 알버트를 사로잡은 전후 사정에 대해 전부 이야기했다.

“그래서 오늘 가문의 대회의 날에…….”

“잠깐, 잠깐만.”

잠자코 윈터의 말을 듣던 델이 갑자기 그녀의 말을 끊더니 되물었다.

“이걸 그 며칠 사이에 혼자 알아낸 거라고?”

“저 혼자는 아니죠. 칼리스타랑 다른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으니까요.”

“……대단하군.”

담담하게 대답하는 윈터의 말에도 충격이 큰 것처럼 델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윈터가 본론을 꺼냈다.

“우선 그 두 사람은 칼로프 측에 신병을 양도하겠습니다.”

“흐음, 좋아. 그들은 칼로프 식으로 처벌하겠네.”

사막 전사들의 처벌 방식은 잔혹하고 무자비하기로 유명했다.

아마 세뇌에서 깨어난 리비우스와 알버트는 생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 더, 전하께 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델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윈터가 눈을 빛냈다.

그런 그녀를 마주한 델도 느슨하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부터 하는 말이 윈터가 꺼낼 진짜 본론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내게 뭘 원해?”

“한 사람의 완전 사면권입니다.”

완전 사면권이라니.

예상치 못한 말에 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전까지 그대의 외삼촌과 사촌의 목숨은 내게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 숨을 고른 윈터가 말을 이었다.

“전하를 노린 살수 중 한 명에 대한 완전 사면권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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