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하, 하고 리비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윈터의 말이 영 어이가 없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이었다.
“더는 들어줄 수가 없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리비우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다.
철컥, 철컥 의자에서 튀어나온 족쇄가 리비우스의 손과 발을 결박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당황한 리비우스가 어떻게든 벗어나 보려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단단하게 묶인 몸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의자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당장 풀지 못해?”
리비우스가 윈터를 향해 바락 외쳤다.
뒤늦게 자신을 여기까지 불러들인 것 또한 전부 윈터의 함정임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전과 달리 그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비쳤다.
“기왕 묶인 거 좀 더 즐겨 보는 건 어때? 당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둔 의자인데.”
앞에서 발광하는 리비우스를 보면서도 윈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보란 듯이 리비우스 앞에 놓여 있던 주전자와 찻잔의 차를 그대로 바닥에 쏟아 버렸다.
“그러게, 줄 때 마셨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쉽게 됐어. 이게 해독제였는데 말이지.”
윈터가 해독제를 언급하며 싱긋 웃었다.
“……뭐?”
그 말에 리비우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난데없이 해독제라니.
반대로 해석하면 지금 그가 어떤 독에 중독되었다는 의미였다.
“물론 당신이 마시지 않을 걸 예상하긴 했어. 본인이 한 짓을 그대로 했으니 함부로 아무거나 마실 수 없었겠지. 안 그래?”
“너, 대체 나한테 뭘 먹인 거냐. 대체 어느 틈에!”
리비우스가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냈다.
줄곧 기다려왔던 물음에 윈터는 기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먹은 게 아니라 향기로 취한 거야. 남들한테 먹이기만 하다가 직접 맡으니까 어때?”
“뭐? 그게 무슨, 너 그게 무슨 뜻이야.”
“당신이 복용한 게 바로 므네시아란 뜻이야.”
윈터의 말에 리비우스가 경악했다.
설마 제가 남들에게 먹였던 그 므네시아를 자신이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표정이었다.
“언제, 언제부터 나한테…….”
혼란에 빠진 리비우스가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제 나름대로 조심해 왔는데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므네시아를 복용했다고 하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대회의 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윈터는 그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원래라면 므네시아에서 채취한 농축액을 장기간 복용해야 세뇌까지 할 수 있겠지만 윈터에게는 그럴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만큼 강한 효과까지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랬기에 윈터는 므네시아를 태워 발생하는 향기를 대회의장과 지금 두 사람이 있는 작은 방에 잔뜩 스며들게 했다.
“티 안 내려고 맘에 안 드는 향수도 잔뜩 뿌렸는데, 뭐 나름대로 보람이 있네.”
혹시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는 않을까 싶어 윈터는 일부러 평소에 쓰지도 않는 독한 향수를 거의 샤워하다시피 뿌렸다.
다행히 리비우스는 전혀 몰랐던 것 같지만.
“날 세뇌해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리비우스가 윈터를 쏘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윈터는 그런 리비우스를 비웃으며 되물었다.
“내가 당신 같은 걸 세뇌해서 뭐에 쓰겠어?”
정말 리비우스를 세뇌할 필요가 있었다면 윈터는 다른 방법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윈터는 그가 딱히 필요 없었다.
그저 일을 이렇게까지 꼬아 놓은 데다가, 거기에 데보라와 델까지 휘말리게 한 괘씸죄를 묻고 싶었을 뿐이었다.
“최면은 아주 잠깐일 거야.”
줄곧 웃던 얼굴은 거짓이라는 듯, 윈터가 싸늘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본인 입으로 본인 죄를 자백만 하면 돼.”
“……뭐?”
“칼로프의 황태자 앞에서 말이야.”
“자, 잠깐…….”
“들어와.”
리비우스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윈터는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선 윈터가 바깥에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고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낯선 인물의 등장에 리비우스가 긴장한 듯 흠칫 어깨를 굳혔다.
“생각보다 빨리 마치셨는걸요?”
문이 닫히고 로브를 벗은 남자가 싱긋 웃었다.
짙은 푸른색 머리, 회색 눈동자. 눈가에 찍힌 눈물점까지.
엘리슨과 꼭 닮은 쌍둥이, 베일리였다.
뛰어난 두뇌와 천부적인 감각으로 지략을 펼치는 엘리슨과 달리 베일리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최면이었다.
“설마 향을 피우실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리비우스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처럼 베일리는 윈터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시간은 좀 걸리지만 피할 수도 없고 확실한 방법이잖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윈터가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리비우스를 돌아보았다.
윈터와 베일리를 보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리비우스는 자신에게 시선이 향하자 잘게 입술을 떨었다.
“자, 이제 본인이 한 그대로 어디 한번 당해 보라고.”
그러자 리비우스가 다시 바락바락 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윈터가 방음막을 설치한 상태라 바깥까지는 리비우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설마 아직까지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니겠지?”
“맹세코 네가 하는 소리를 전혀 알 수가 없군. 윈터 블라디미르, 내게 이러고도 네가 멀쩡할 성싶으냐? 네 외삼촌에게 어찌 이렇게 극악무도한……!”
목이 터져라 악을 쓰는 리비우스를 보다 못한 윈터가 그의 말을 끊어내고 말했다.
“날 먼저 죽이려고 한 건 당신이었잖아.”
황도로 돌아오던 순간부터 리비우스는 꾸준히 윈터를 죽이려 시도했다.
윈터는 자신을 죽이려는 인간을 멀쩡히 살려 둘 정도로 너그럽지 못했다.
제가 한 짓이 뻔히 있는데도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리비우스가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런 그를 비웃으며 윈터가 말을 이었다.
“모른다고 잡아떼도 소용없어. 집사가 이미 다 실토했거든.”
집사를 언급하는 말에 리비우스의 표정이 죽은 생선의 배처럼 허옇게 질렸다.
윈터는 그런 리비우스의 얼굴을 보며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던 집사를 떠올렸다.
‘혹시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누구 여기 들어온 사람 있어?’
윈터가 그렇게 물었을 때, 집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었다.
‘그럴 리가요. 아가씨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셨잖아요.’
블라디미르 공작가를 대대로 섬겨 왔던 집사였기에, 윈터는 그의 말을 믿었다.
집무실에 설치해 두었던 영상석을 확인하기 전까지 윈터는 집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비밀 호위대를 이용한 암살 시도가 벌어지고, 가문 안에, 그것도 자신의 지척에 불순분자가 있을 거라는 걸 알아차린 윈터는 그 즉시 영상석을 확인했다.
그리고 거기엔 놀랍게도 멀끔한 얼굴로 윈터의 책상을 뒤지는 집사가 그대로 찍혀 있었다.
‘……죽여 주십시오, 아가씨.’
윈터는 집사의 앞에서 그 영상석을 재생했다.
집사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는 그렇게 말했다.
‘대체 왜…….’
‘다 이 늙은이가 어리석어서 그런 것입니다.’
칼리스타의 정보원들이 물어다 준 정보에 의하면 집사의 망나니 아들이 화근이 된 것 같았다.
천문학적인 도박 빚을 어쩌지 못하고 리비우스 측에서 보내 준 자금을 받고 서류 몇 가지를 훔쳐다 주었다고 집사가 자백했다.
그리고 비밀 호위대에게 므네시아를 먹이는 것도 집사가 도움을 주었고.
보아하니 집사의 망나니 아들을 꼬여내 도박 빚을 만들어 낸 것도 다 리비우스 측에서 뒷공작을 한 것 같지만, 집사는 미처 거기까지는 알지 못한 것 같았다.
‘당신 목숨은 됐어. 아는 거나 전부 말해.’
가문을 배신한 집사가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집사는 리비우스가 만든 함정에 빠졌고, 거기에 걸려 넘어진 채로 허우적대다가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집사를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피에 미친 사람처럼 목숨으로 갚으라고 윽박지르고 싶지 않았다.
윈터에게는 집사의 목숨보다 리비우스를 옥죌 증거들이 더 필요했으니까.
‘전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눈물과 회한에 젖은 얼굴로 집사는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윈터에게 실토했다.
“내가 이런 것도 확인 안 하고 당신을 불러들였을 줄 알았어?”
윈터는 집사의 자백서가 적힌 종이를 리비우스에게 들이밀었다.
그의 눈동자가 서류 위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 파악을 마친 리비우스가 간절한 표정으로 윈터에게 싹싹 빌기 시작했다.
“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전부 잘못했다, 윈터.”
바로 조금 전까지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부을 것 같던 얼굴은 어디로 감췄는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애처롭게 떨리는 눈동자가 가엽기 짝이 없었다.
“전부 다 내가 한 짓이다. 정말 미안하다.”
“아하, 이걸 다 혼자 하신 거다?”
“그, 그래. 알버트는 아무것도 몰라. 제발, 알버트는, 알버트만은……!”
결박이 풀어져 있었다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납작 엎드려 빌기라도 했을 듯한 얼굴이었다.
그토록 아끼던 아들에게 행여나 불똥이 튈까 리비우스는 한사코 전부 제가 한 짓이라고 알버트를 두둔했다.
그러나 알버트는 결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들이라거나 방관자가 아니었다.
명백하게 이 모든 일에 관여한 가담자였다.
“미안해서 어쩌나. 나는 후환을 남기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야.”
진작에 유스터스가 알버트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두 부자는 델의 앞에 가서 자신의 죄를 전부 토해 내야 할 것이었다.
“이대로 황태자 앞에 가서 당신이 아는 걸 낱낱이 고해.”
“그럼, 아, 알버트는 살려 주는 거냐?”
윈터의 말에 리비우스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순진한 소리를 하시네.”
픽 웃은 윈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싸늘한 얼굴로 리비우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번엔 손목 하나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