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50)

90화

* * *

그날 밤, 블라디미르 공작가에서는 가주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있겠지만 칼로프의 황태자가 습격을 당했소.”

공작의 말에 가신들이 한 마디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황태자가 소공작의 편지를 받고 나갔다가 그리되었다니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습격이 공작가의 비밀 호위대가 저지른 짓이라지 않습니까.”

저마다 불편한 기색들을 드러내는 사람들 속에서 행어 남작이 손을 들었다.

그녀는 유스터스의 어머니답게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누군가의 모함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러자 쾅! 하고 다른 가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리비우스 옆에 앉아 시종일관 아부를 떨던 베르디 자작이었다.

“모함이라뇨! 누구의 모함이란 말입니까! 공작가의 비밀 호위대를 대체 누가 함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 베르디 자작, 그대는 이번 일이 누구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시오?”

“크흠, 그건…….”

베르디 자작이 제대로 대답하지는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힐끔대는 그의 시선은 명백하게 윈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눈치 빠른 가신들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사실 윈터가 썼다는 편지가 나오고, 아무나 건드릴 수 없는 공작가의 비밀 호위대가 암살에 동원되었다.

드러난 단면만 보자면 유력한 용의자는 당연히 윈터였다.

리비우스 측에 붙어서 그녀를 누르기 위해 벼르고 있던 가신들은 이때다 싶어 윈터를 공격했다.

“제가 예전부터 말씀드려 왔지만, 사실 벌써 후계를 정하는 건 조금 이른 선택이었다 싶습니다.”

“아무리 공작가의 핏줄이라고는 하나 바깥에서 자란 시간이 훨씬 긴 소공작이 아닙니까.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 보입니다. 지난번에도…….”

“게다가 이번 일도 보십시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이리도 얕은 수로 타국의 황태자를 시해하려 하다니요. 어린 나이에 치기로 저지른 무모한 일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말씀이 심하십니다. 아직 소공작이 그런 일이라고 밝혀진 것도 아니…….”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얹으니 공간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평소라면 진작에 뭐라고 해야 했을 공작도 윈터도 침묵하니 리비우스 측의 가신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이 상황에도 치장은 멈추지 않는 것을 보십시오. 쯧.”

이제는 오늘따라 유독 짙은 윈터의 향수까지 그들의 입에 올랐다.

저를 보며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는데도 윈터는 그저 묵묵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애초에 자질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군요.”

“황가에서도 후계를 경합으로 결정하는데, 후계 결정이 가주의 독단으로만 진행되는 부분에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맞습니다. 적당한 후계자가 없다면 방계에서도 고려해 보는 것이 옳다고 사료됩니다.”

공작가를 지지하는 쪽과 리비우스 측을 지지하는 쪽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점점 리비우스 측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하는 말만 들어 보면 꼭 아르만 백작이나 1황자 파 진영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리비우스는 그들을 말리는 척하며 얼굴에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알버트는 제 아비만 한 연기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돌아가는 상황을 즐기며 히죽 웃었다.

‘넌 이제 끝이야.’

심지어 윈터와 눈이 마주치자 입 모양으로만 벙긋거리며 막말을 해 댔다.

그걸 정면으로 마주한 윈터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속내를 꿈에도 모르고 알버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비인 리비우스처럼 가신들을 말리는 척했다.

“다들 말씀이 심하시군요. 이제 그만 자중들 하시지요.”

“공자가 가장 큰 피해자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하하, 상황이 어쩔 수 없는 것을 누구 탓을 하겠나요.”

잔뜩 우쭐해져서 헛소리를 하는 꼴을 보며 공작 측의 가신들은 와락 표정을 구겼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고슴도치 같은 제 새끼를 품듯 알버트의 어깨를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어휴, 바보같이 착해 빠져서는…….”

그 말을 듣던 공작의 손이 움찔했다.

보다 못한 공작이 윈터의 귀에 속삭였다.

“대체 내가 이 촌극을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거냐?”

윈터는 일부러 잔뜩 침울한 척 대답을 미뤘다가 곧 작게 웅얼거리듯 말했다.

“지금 나가시면 됩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뜨는 그녀의 모습에 가신들은 일제히 눈을 빛냈다.

윈터는 마치 공작의 신임을 잃고 상심한 것처럼 축 늘어져서 힘없이 앉아 있었다.

“크흠, 우리도 이만 가십시다.”

공작이 떠나자 가신들도 우르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잔뜩 와글와글하던 공간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때 그런 윈터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고생했다.”

다름 아닌 리비우스였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윈터의 어깨를 도닥였다.

“가신들의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거라. 내가 곧 잘 다독여 보마.”

윈터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

“외삼촌.”

“……그래.”

“제가 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당분간 저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하시네요.”

잔뜩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리비우스가 윈터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 지금의 말에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기색이 있는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윈터의 연기가 아무리 어색하더라도 그는 지금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지 못하도록 윈터가 상황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그래, 알겠다.”

승낙은 예상보다 빠르게 나왔다.

리비우스는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버트에게 손짓했다.

“알버트, 먼저 가 있거라. 이 아비는 중요한 할 일이 생겼구나.”

“네, 뭐.”

리비우스보다도 더 먼저 승리감에 취해 있던 알버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침울한 표정인 윈터에게 향해 있었다.

곧 알버트가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윈터는 회의장 문앞에 대기하고 있던 유스터스에게 작게 눈짓했다.

그녀의 신호를 받은 유스터스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버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희도 이만 가실까요?”

이내 윈터도 리비우스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회의실 근처에 마련된 작은 방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듯 관리가 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잠깐의 대화를 나누기에는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마침 의자 두 개와 테이블까지 있던 터라, 두 사람은 거기에 마주 보고 앉았다.

“우선 이것부터 드시죠.”

사용인을 시켜 차를 가져오게 한 윈터가 손수 리비우스에게 차를 대접해 주었다.

“고맙구나.”

짧게 감사 인사를 전한 리비우스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대로 내려두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윈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리비우스의 앞에서 제가 따른 차를 마셨다.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켜는 모습은 예법에 한참이나 어긋났다.

“후우, 죄송해요. 제가 아까는 너무 긴장이 돼서…….”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리비우스는 하마터면 인상을 찌푸릴 뻔했지만 꾹 참아 냈다.

이미 자신이 이긴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이 정도는 충분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조금 다급한 손길로 윈터는 한 잔을 더 따라 마셨다.

“외삼촌은 안 드세요?”

심지어 그렇게 묻기까지 했다.

리비우스는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는 듯 찻잔에서 손을 떼고는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난 별로 목이 마르지 않아서 말이다.”

“아, 그러세요?”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윈터가 히죽 웃었다.

“제가 혹시 차에 뭔가를 탔을까 봐 못 드시는 건 아니고요?”

“……뭐?”

곧 자리에서 일어선 윈터가 방 한구석에 있던 서랍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왔다.

병 안에서 조금 걸쭉한 은빛 액체가 찰랑였다.

윈터는 그걸 리비우스의 앞에 내밀며 물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그게 뭐…….”

“므네시아의 농축액이에요.”

윈터의 말에 리비우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얼마 전에 칼리스타 지점장 중 하나가 그런 보고를 하더라고요. 므네시아 농축액을 은밀하게 구해 달라는 손님이 있었다고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뭐가,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그 손님, 제가 칼리스타의 단주라는 게 밝혀지고 난 다음 날부터 발길을 싹 끊었다네요. 꼭 저한테 들키면 안 되는 짓을 한 것처럼 말이에요.”

작은 약병을 테이블 위로 굴리며 윈터가 말을 이었다.

“므네시아는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만들죠. 고작 그 정도의 힘만 있을 뿐이라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누군가를 죽게 하기에는 큰 효용성이 없잖아요.”

킥킥 웃은 윈터가 그대로 약병을 열어 바닥에 쏟아부었다.

리비우스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테이블에 턱을 괸 윈터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리비우스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지고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지 뭐예요?”

윈터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는데도 리비우스의 뺨이 잘게 경련했다.

그는 마치 이어질 윈터의 말을 이미 예상하는 듯했다.

“만약 므네시아의 농축액을 자신도 모르게 장기 복용한 인물들에게―”

“…….”

“최면을 걸어서 조종한다면 어떻게 될까, 싶은 생각 말이에요.”

그렇게 말한 윈터가 리비우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대단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 제 누이와 달리 보잘것없는 최면술밖에 할 줄 모르는, 열등감 가득한 얼굴이 달빛 아래 환히 드러났다.

“그렇다면 아주 잠깐이지만, 마치 세뇌당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리비우스의 뱀 같은 노란 눈동자가 윈터를 쏘아 보았다.

그러나 윈터는 그런 리비우스가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곧 윈터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걸렸다고, 당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