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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150)

88화

* * *

아르만 백작에게서 협조 요청을 받아낸 뒤 윈터는 이전보다 조금 가벼운 걸음으로 궁을 나섰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아가씨!”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윈터는 곧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칸나?”

평소와 달리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한 칸나가 그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윈터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칸나를 부축했다.

휘청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선 칸나는 윈터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울먹였다.

“왜 그래, 칸나. 무슨 일이야? 혹시 메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2황자 궁을 지키고 있어야 할 칸나가 여기까지 달려왔다니.

윈터는 덜컥 불안해져 칸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은 칸나는 잠시 제 입술을 꾹 깨물다가 고개를 들었다.

늘 밝고 씩씩하던 칸나는 무슨 일인지 눈물로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살려 주세요, 아가씨, 제발…….”

“그게 무슨 말이야? 살려 달라니?”

“데보라를, 데보라를 살려 주세요, 아가씨.”

“데보라를 왜…….”

칸나의 말에 자연스럽게 반문하던 윈터의 안색이 달라졌다.

지금 여기서 갑자기 데보라가 왜 나온단 말인가.

“설마…….”

좀 전에 델이 했던 말이 윈터의 뇌리를 스쳤다.

‘그럼 도망간 한 명도 소공작이 알 수 있겠군.’

‘예? 도망친 자가 있습니까?’

‘아아, 그래. 내게 영광의 상처를 남긴 자가 감히 목숨을 부지했지.’

비밀 호위대 중 한 명일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그게 데보라일 줄이야.

대체 누가 비밀 호위대에게 이런 일을 지시한 건지.

잠시 잊고 있던 분노가 차오르며 윈터의 손끝이 차게 식었다.

“이대로 뒀다가는 그 미친놈이……! 아니, 황자 전하가 데보라를 죽일지도 몰라요!”

그 사이 칸나는 패닉에 빠져 윈터를 재촉했다.

윈터를 마주한 푸른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려 왔다.

진짜로 공포에 잠식된 눈이었다.

“……일단 가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우선은 데보라를 만나서 전후 상황을 알아봐야지.

어쩌면 이번 암살 시도에 데보라가 포함되어 있던 것이 천운인지도 몰랐다.

상황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지만, 윈터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후우…….”

윈터는 칸나와 함께 메이딜리언이 있는 2황자 궁으로 방향을 틀었다.

죽은 비밀 호위대의 신상도 제1기사단 쪽으로 넘겨야 하고, 그 전에 데보라에게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인지 알아봐야 하는데.

머릿속은 누가 잔뜩 엉킨 실을 흩뿌린 것처럼 복잡했다.

“들어오세요.”

코를 훌쩍이며 칸나가 말했다.

호위가 직접 문을 열어 주는데 나와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내부가 윈터를 맞이했다.

마치 모두가 잔뜩 몸을 낮추고 숨죽인 채 긴장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메이는 어디 있어?”

“제가 안내할게요.”

윈터의 물음에 칸나가 앞장 섰다.

그러나 그녀는 문득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잠시 멈칫했다.

조금 전 데보라가 갑자기 2황자 궁으로 들이닥친 상황이 떠올랐다.

‘카, 칸나…….’

‘이게 무슨, 데보라!’

2층 동쪽 방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져서 달려갔던 칸나는 설마 거기서 데보라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데보라, 정신 차려!’

쿨럭 기침한 데보라의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미처 지혈하지도 못한 배에는 기다란 칼이 꽂혀 있었다.

기겁한 칸나는 의원이라도 부르기 위해 뛰쳐나가려 했지만 데보라가 그것을 막았다.

‘이거 놔. 얼른 가서 누구라도…….’

‘아가씨한테, 아가씨한테 얼른 알려야 해.’

바닥의 카펫을 제 피로 다 적셔 놓고서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칸나를 한사코 붙잡은 채 데보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뭐? 뭘 알리란 말이야?’

‘도망, 치…….’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데도, 데보라는 뭔가를 전하려고 했다.

칸나가 그 말을 듣기 위해 몸을 숙이려다 문득 휙 고개를 돌렸다.

원래라면 아무도 없을 2층에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하.’

‘너……!’

칸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기엔 메이딜리언이 있었다.

‘어디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싶더라니.’

팔짱을 낀 채 아래를 내려다보던 메이딜리언이 작게 중얼거렸다.

눈치 빠른 그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메이딜리언의 손에 새카만 마력이 일렁거렸다.

그것이 누구를 향하는지는 명백했다.

상대를 향한 살기조차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었으니까.

‘메이, 딜리언 님…….’

흐릿한 데보라의 시야에도 그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꼴을 보고만 있을 칸나가 아니었다.

‘안 돼! 지금 무슨 짓이야!’

제 앞을 가로막는 칸나를 보며 메이딜리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 사람은 서로를 꽤나 잘 알고 있었다.

칸나라면 분명 데보라를 감쌀 거라는 것 정도는 메이딜리언의 계산 안에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해? 이대로 살려 두면 아가씨가 불리해져.’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니, 그전에 아가씨가 자기 유리하자고 데보라를 죽이는 데 동의할 것 같아?’

‘당연히 안 하시겠지. 그러니 그전에 없애야지.’

칸나는 돌아가는 바깥 상황을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짐승 같은 그녀의 감이 지금 데보라가 처한 상황이 더없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맹렬히 알려 왔다.

동시에 이 모든 게 윈터를 향한 날카로운 덫이라는 것 또한.

그러나 칸나는 이대로 데보라를 포기할 수 없었다.

‘데보라를 죽이면, 난 그 즉시 아가씨한테 알릴 거야.’

협박 아닌 협박에 메이딜리언이 픽 웃었다.

그러나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메이딜리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동시에 칸나는 깨달았다.

만약 자신이 말한 대로 윈터에게 이 모든 일을 알릴 만한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메이딜리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조차 죽여 버릴 거라는 걸.

‘윈터를 앞세워서 날 협박하려는 건 꽤 괜찮은 수법이었어.’

힘없이 손을 늘어뜨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하지만 그다지 영리한 선택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아야 해.’

경고하듯 그의 눈동자의 붉은 빛이 짙어졌다.

‘한 번만 더 아가씨를 내 앞에서 들먹이면 그때는 네 목을 내놓아야 할 거야.’

그 순간, 하마터면 칸나는 메이딜리언을 향해 검을 겨눌 뻔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될 때까지 그의 호위를 해 주겠다는 윈터와의 약속을 홀랑 잊어 버린 채로.

그런데 문득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데보라의 배에 꽂힌 칼로 향했다.

‘저거…….’

피로 얼룩져서 검의 손잡이 부분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메이딜리언이 조금 더 자세히 보고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데 칸나가 득달같이 그 앞을 막아서며 바락 외쳤다.

‘안 돼!’

‘비켜 봐.’

‘데보라는 못 죽여! 죽일 거면 나부터 죽…….’

‘안 죽일 테니까 비키라고.’

성가셔 죽겠다는 듯 메이딜리언이 재차 말했다.

무조건 결사반대라는 듯 왁왁 소리치던 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지, 진짜?’

그 모습이 못내 한심하다는 듯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곧 그는 마력을 갈무리하고 데보라의 앞에 앉았다.

‘으윽…….’

메이딜리언이 검의 손잡이를 살피는 사이 고통이 심해진 데보라가 옅게 신음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그 상처, 네 손으로 찔렀나?’

멈칫하던 데보라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답을 얻은 것인지, 메이딜리언이 데보라의 고갯짓을 보고는 말했다.

‘다행으로 여겨. 네가 그렇다고 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목숨이 날아갔을 테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칸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말이야? 데보라가 왜 자기를 찔러? 이게 누구한테 습격당해서 생긴 상처가 아니란 말이야?’

‘넌 좀 조용히 하고.’

흡사 잡상인이라도 쫓아내듯 휘휘 손을 내저은 메이딜리언이 재차 데보라에게 물었다.

‘말해 봐. 왜 너를 찔렀지?’

‘……니까.’

간신히 힘을 쥐어짜 내 대답한 데보라는 그대로 기절했다.

오직 그녀의 입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메이딜리언만이 데보라가 본인을 찌른 이유를 들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선 메이딜리언이 칸나를 향해 지시했다.

‘너, 지금 당장 에메랄드 궁에 다녀와.’

‘거긴 왜? 서, 설마 나 없는 사이에 데보라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내 인내심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건 이미 잘 알 거 아냐?’

메이딜리언의 말에 칸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전에는 그의 살기에 반응해 하마터면 진심으로 메이딜리언을 공격할 뻔했었다.

‘거기에 아가씨가 있어. 가서 모셔와.’

부연 설명을 덧붙이는 말에 칸나의 시야가 환해졌다.

윈터가 지금 황궁에 있다니!

구세주라도 만난 듯 칸나는 그 즉시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뒤에서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데보라를 내려다보던 메이딜리언은 작게 혀를 찼다.

‘쯧, 귀찮게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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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당장 윈터만 데리고 오면 된다는 생각에 재고 따지고 할 것 없이 당장 뛰쳐나가기는 했는데.

혹시라도 메이딜리언이 그 사이에 데보라를 쓱싹 해 버린 것은 아닐까 싶어 뒤늦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기, 칸나?”

제가 안내해 주겠다더니.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칸나를 윈터가 조심스레 불렀다.

파드득, 상념에서 깨어난 칸나가 얼른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이쪽이에요.”

칸나는 곧 데보라가 숨어들어 왔던 2층 동쪽 방 앞에 섰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노크했다.

“전하, 윈터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어와.”

안쪽에서 메이딜리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칸나는 속으로 ‘제발, 제발! 데보라가 목숨만 붙어 있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칸나는 눈앞에 보이는 상상치도 못한 광경에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 아니,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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