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50)

87화

그러지 않고 싶었지만, 윈터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와락 사정없이 구겨지는 얼굴에 델이 낄낄 배를 잡고 웃었다.

“아아, 미리 말해 줄 걸 그랬나? 소공작 표정이 아주 볼 만한데.”

“그 인간이 잘도 자리를 비웠군요.”

“의원인지 신관인지를 부르러 다녀온다더군. 사용인을 시킬 필요도 없이 자기가 다녀오면 금방이라나 뭐라나. 아주 재빠르던데?”

목격자가 하필이면 아르만 백작이라니.

윈터의 머릿속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곤란하군요.”

윈터가 제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숨 섞인 말에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던 델이 말했다.

“황궁에 오기 전까지의 행방을 증명하지 못하면 그대가 곤란해지겠어.”

“네, 아마 상대도 그걸 노린 거겠죠.”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건 어때?”

“전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서요.”

“그건 나랑 비슷하군.”

제니마 상회나 아르카까지 노출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내려고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느 정도 첩자로 추릴 만한 인물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아주 초기부터 제니마 상회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던 자라면 이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진작에 크비누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제니마 상회를 메이딜리언이 아닌 고작 윈터와 엮었다는 것은, 상대가 제니마 상회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네.”

윈터를 유심히 관찰하던 델이 말을 건넸다.

“과연 첩자가 누구일까 생각 중이긴 했죠.”

“아하, 그래서 그렇게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사악하다뇨. 그런 말은 처음 듣는걸요.”

상황은 더없이 심각했으나 윈터도 델도 대수롭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곧 표정을 낮게 가라앉힌 윈터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첩자는 새로 생긴 인물인 것 같아요. 최근 제 행적을 다시 점검해 봐야겠군요.”

“새로 생겼거나, 아니면 변심한 것일 수도 있지.”

윈터의 말을 들은 델이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했다.

변절한 자가 있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원작에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슨이 메이딜리언을 배신하는 일이 발생했었으니, 윈터가 가장 주의 깊게 보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아르카 단원들 중 최근 눈에 띄게 행적이 다른 자는 없었다.

“전하.”

“음?”

“제가 진짜로 암살 요청을 했다고는 생각 안 하세요?”

첩자가 누구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윈터가 문득 물었다.

자신이라면 아무리 가능성이 낮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한 번쯤은 의심해 봤을 것 같은데, 델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이 꽤 크거나, 아니면 미심쩍은 심정을 잘 숨기거나.

윈터는 굳이 고르자면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벌한 사막 생활을 거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델이 그렇게 쉽게 윈터를 믿을 리가 없으니까.

“날 굳이 죽이지 않아도 알아서 몰락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이미 알지 않나?”

“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델은 생각보다 상식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 두 사람은 꽤 묵직한 비밀을 공유한 상태였다.

윈터라면, 델을 무너뜨리기 위해 굳이 이런 번잡스러운 일을 선택할 리가 없었다.

칼로프의 황제에게 델의 정체에 대해 밝히기만 해도 황제는 기를 쓰고 델을 죽이려 들 테니까.

“상대는 다행히 그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지만 말이야.”

씩 웃은 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산뜻했다.

곧 델의 눈동자가 윈터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아르만 백작이 보였다.

“전, 허억, 전하!”

평소에 법도와 체통을 중요시하는 아르만 백작이 저렇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오다니.

윈터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아연실색했다.

“신관을 데려왔습니다. 얼른 치료를 받으시죠.”

아르만 백작이 얼마나 닦달을 해 댄 건지, 뒤따라온 신관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내 손을 치료하기 전에 저 신관부터 살려야 하는 거 아닌가?”

델은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건네며 제 왼손을 내밀었다.

간신히 숨을 고른 신관이 곧 눈을 감고 신성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아르만 백작은 뒤늦게 윈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화들짝 놀랐다.

“소, 소공작?”

“뜻밖의 장소에서 뵙는군요, 백작님.”

“그러게 말이오, 크흠.”

헛기침을 내뱉은 아르만 백작이 어색하게 윈터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윈터가 왜 여기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르만 백작을 유심히 관찰하던 윈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연기인 걸까, 아니면 진짜인 걸까.

습격이 벌어지고, 델이 다친 걸 목격한 아르만 백작은 그대로 신관을 향해 뛰었다고 했다.

과연 이 일의 배후가 아르만 백작과는 전혀 연관이 없을까?

윈터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르만 백작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델이 아르만 백작의 이름을 말한 순간 그를 끌어들이기로 작정했으니까.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소공작은 어떻게 여기 있나?”

자신을 향해 집요하게 꽂히는 시선을 견디다 못한 아르만 백작이 먼저 말을 건넸다.

윈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아, 저 인간들 때문에요.”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르만 백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의 의문을 해결해 주기 위해 윈터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작가 비밀 호위대에 있던 자들입니다.”

“무, 뭐라고?”

윈터의 말에 아르만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가까이에서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신관도 움찔했다.

“그쪽은 나한테 집중해야지?”

그걸 귀신같이 눈치챈 델이 지적하자 신관이 얼른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마 누군가 절 모함하려고 한 것 같아요.”

한편 윈터는 잔뜩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아르만 백작을 붙들고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요는, 자신이 오랜만에 황도를 구경하고 있던 사이에 누군가 윈터의 이름으로 델을 꾀어내어 암살을 도모했다는 이야기였다.

윈터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르만 백작의 안색이 칙칙해졌다.

누군가 윈터를 음해했다.

블라디미르 가문의 차기 후계자이자 2황자 메이딜리언의 가장 큰 지지자.

칼리스타의 수장이자 대현자의 제자.

수식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인물을 노린 음모가 벌어졌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자신이 덮어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윈터가 실각하게 되면 가장 큰 이득을 얻는 것은 아무래도 아르만 백작과 그의 아들인 1황자 아스터였기 때문이다.

“백작님께서도 설마 제가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그럴 리가 있나.”

윈터의 물음에 아르만 백작이 얼른 대답했다.

생각이 복잡해지며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실제로 아르만 백작은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영 난감했다.

그때 다친 손의 치료를 마친 델이 신관을 물리고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내 구애가 별로였어도 그렇지, 암살 시도는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암살 시도가 무슨 장난이라도 되는 것처럼 더없이 가벼운 말투였다.

사적으로 델과 대화를 나눠 본 적이 거의 없던 아르만 백작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췄다.

도무지 황태자의 위엄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델의 말투에 윈터는 익숙한 듯 받아쳤다.

“제가 이렇게 살벌한 거절을 할 리가 있나요?”

“아아, 그렇지. 그대라면 조금 더 달콤한 쪽이겠지.”

델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놓고 던지는 추파에 아르만 백작은 도무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반면에 윈터는 와락 표정을 구기고는 델을 밀어냈다.

“요 며칠 못 본 사이 많이 느끼해지셨네요. 제니어스 식 음식이 전하께는 좀 기름진 모양이에요.”

“하하, 그럴 리가.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으니 걱정하지 말게.”

윈터와 델이 절친하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거의 격의 없는 친구 사이 같았다.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듣던 아르만 백작은 드디어 판단이 선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도 이번 사건은 두 분 사이를 이간질하는 자의 소행인 듯합니다.”

“오오, 백작도 그리 생각하시오?”

델이 반색하며 물었다.

“예. 소공작이 굳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암습을 지시했을 리가 없으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아주 옳은 말을 했다는 듯 델이 과장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 멀찍이 떨어져 있던 수행원들에게 델이 손짓했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온 그들에게 막힘없이 명을 내리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이자들의 최근 행적에 관해 낱낱이 조사하라.”

“예. 알겠습니다, 전하.”

“저희 가문도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윈터가 끼어들었다.

게다가 그녀는 뒤에서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아르만 백작도 시의적절하게 끌어들였다.

“백작님.”

“예?”

“평소 제1기사단의 수사력이 대단하다 들었는데, 혹시 이번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힘 좀 써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잠시 눈을 깜박이던 아르만 백작은 냉큼 윈터의 제안을 승낙했다.

“물론입니다. 소공작이 이렇게까지 간청하는데 당연히 제가 나서야지요.”

평소엔 뻣뻣하고 콧대만 높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려 그 대단하신 소공작이 제게 먼저 굽히고 나서니 아르만 백작의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조사에 참여하게 되면 자신이 이번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도 자연스럽게 벗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장인 그레고리 경부터 그 밑의 단원들까지 제1기사단은 모두 청렴결백하며…….”

어딘지 들뜬 기색이 역력한 아르만 백작이 제1기사단의 화려한 이력을 읊었다.

그동안 윈터와 델은 은밀히 시선을 교환했다.

이렇게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세 사람의 협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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