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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86/150)

86화

유스터스 행어.

과거 메이딜리언의 검술 스승이던 행어 가의 차남은 어느새 블라디미르 공작가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올라섰다.

늘 심드렁하고 나른해 보일 만큼 침착하던 그가, 오늘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칼로프의 황태자가 암습을 당했는데 나더러 도망치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윈터가 재차 물었다.

그러자 유스터스가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제 이마를 짚었다.

“아직 단편적인 정보들만 가지고 온 거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말끝을 흐리며 유스터스가 윈터에게 눈짓했다.

‘단편적인 정보들’을 ‘가지고 왔다’라.

윈터는 그 정보들이 공작가에서 황궁에 심어 놓은 정보원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태자가 습격당한 현장에서 소공작 각하의 편지가 언급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편지?”

“그건 알 수 없지만, 황태자가 각하를 만나러 나간다고 했답니다.”

윈터를 만나러 간다던 칼로프의 황태자가 습격을 당했다.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공작가의 정보원 하나가 즉시 이 사실을 블라디미르 저택으로 전했다.

윈터가 오늘 제니마 상회에 온다는 것은 극히 일부만이 알고 있었으니, 행방을 아는 사람 중 그나마 가장 말단인 유스터스가 급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건 명백한 함정입니다. 누가 봐도 소공작 각하를 노린 거예요.”

“……그렇겠지. 일단 황태자 전하의 상태는 어때?”

“다행히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델이 죽었다면 그대로 전쟁이 발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윈터를 노린 누군가도 굳이 그걸 의도한 건 아니었을 테니 아마 델의 목숨은 안전하겠지.

상황을 지켜보던 메이딜리언이 다가와 물었다.

“가실 건가요?”

“그래, 가 봐야지.”

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인 걸까.

윈터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곰곰이 생각에 빠진 그녀를 바라보던 메이딜리언 또한 귀신같은 감을 발동시켰다.

“오늘 늦은 것도 이것 때문이었던 거죠?”

그 물음에 윈터가 멈칫했다.

누구도 출입하지 않았다던 방. 그러나 명백하게 뭔가를 뒤져 간 흔적이 있었다.

결국 윈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관련이 있을 것 같기는 해.”

윈터는 곧 유스터스에게 말했다.

“이 사실을 어머니도 알고 계셔?”

“……예.”

“알겠어. 일단 나는 궁으로 가 볼게.”

“하지만 각하…….”

암살 의혹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제 발로 궁으로 들어가겠다니.

언뜻 보면 무모해 보이는 윈터의 행동에 유스터스가 말을 얹으려 했다.

그러나 윈터가 한발 빨랐다.

“남들 손에 조사받느니 차라리 우리가 먼저 나서는 게 나아.”

“후작가에도 말을 전해 놓겠습니다.”

다행히 이번엔 메이딜리언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곧 그와 윈터가 시선을 마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난 먼저 출발할게. 행어 경, 말을 타고 왔나?”

“예, 각하.”

“좋아. 그럼 좀 빌릴게.”

“……예?”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윈터가 제니마 상회 밖으로 나갔다.

입구에 매 둔 말을 발견한 윈터는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올랐다.

“각하!”

뒤따라 나왔던 유스터스가 윈터를 불렀다.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당혹감이 가득했다.

“어머니께는 내가 궁으로 갔다고 전해 줘!”

짤막한 전언만을 남긴 채 윈터는 그대로 말을 달렸다.

* * *

“전하!”

몸을 피하라는 유스터스의 조언을 거부한 채, 윈터는 빠르게 궁에 도착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천만다행으로 아직까지 델의 암습은 크게 퍼지지 않은 듯했다.

그 유력한 용의자로 윈터가 꼽히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아니라면 윈터가 얼굴을 보였을 때 궁의 사용인들이 그렇게 빨리 델이 있는 곳으로 그녀를 안내했을 리가 없었다.

델이 후원 쪽에 혼자 있다는 말에 윈터는 한달음에 그쪽으로 향했다.

“아아, 왔어?”

걱정과 달리 델의 안색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씩 웃는 시원한 미소가 여전했다.

“이게 대체…….”

그러나 윈터는 금세 말을 잃었다.

번쩍 손을 들어 그녀를 맞은 델의 왼손이 아무렇게나 찢은 천으로 둘둘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당연하지. 이건 그냥, 음…….”

윈터의 말에 어색한 몸짓으로 제 왼손을 숨긴 델이 눈을 굴렸다.

하지만 딱히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것인지, 델은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기로 했다.

단, 최대한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날아드는 칼을 막으려다가 얻은 영광의 상처랄까? 하하.”

“설마 달려드는 칼을 맨손으로 막으신 건 아니겠죠?”

“포크라도 있었으면 포크로 막았겠지만 상황이 여의찮았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델이 너스레를 떨었다.

질색하던 윈터의 시선이 곧 델의 뒤쪽을 향했다.

바닥에 차곡차곡 쌓인 암살자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자들입니까?”

“그래. 전문적으로 훈련된 인물들인 것 같더군.”

암살자는 총 셋이었다.

하나같이 단칼에 깔끔하게 처리가 된 것을 보니 델의 실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간 윈터가 복면으로 가려져 있던 암살자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

이내 윈터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음? 왜 그래, 소공작?”

어쩐지 심상치 않은 반응에 델이 물었다.

고개를 돌린 윈터가 델과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녀는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전하.”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아는 얼굴이라도 있어?”

“네.”

“……뭐?”

델의 입장에서는 농담처럼 건넨 말이었지만, 윈터에게는 아니었다.

그녀의 눈앞에 죽어 있는 자들은 정말로 얼굴이 낯이 익은 인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노로 윈터의 손이 잘게 떨렸다.

“공작가의, 비밀 호위대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제대로 들어 놓고도, 방금 꺼낸 윈터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델이 와락 표정을 구겼다.

윈터의 안색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얼굴만은 충분히 익히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미셸, 브랜디, 라이언.”

“……허.”

한 명씩 짚어 가며 나오는 이름에 델이 헛웃음을 지었다.

곧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델이 몸을 일으켜 윈터에게 다가갔다.

“그럼 도망간 한 명도 소공작이 알 수 있겠군.”

“예? 도망친 자가 있습니까?”

“아아, 그래. 내게 영광의 상처를 남긴 자가 감히 목숨을 부지했지.”

제 손을 다시금 들어 보이며 델이 말했다.

윈터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전후 상황을 떠나서 공작가의 비밀 호위대가 황태자의 암습에 동원되었다는 것은, 공작가 내부 인물의 소행이라는 의미였다.

“흐음, 소공작 표정이 엉망이야.”

“……죄송합니다.”

“글쎄. 이게 그대가 죄송할 일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델이 눈가를 찡그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돌려 제가 앉아 있던 의자로 돌아갔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 벌써부터 힘 뺄 필요 없잖아.”

해가 쨍쨍한 한낮이었다.

차양막 아래로 들어온 델이 윈터를 불러 앉혔다.

“우선 이 친절한 황태자 전하께서 상황부터 설명해 주지.”

쪼르륵, 손수 차까지 따라 주며 델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 오전, 소공작의 편지가 내게 왔어.”

“저는 보낸 적이 없는 편지가 말이죠.”

“뭐, 그렇겠지. 나중에 확인해 봐야 하겠지만 겉면에는 공작가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어. 아마 안의 필체도 그대의 것일 거야.”

그렇게 말한 델이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상황이 지독히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상대는 굳이 황태자 암습이라는 큰 사건을 벌일 만큼 절박하고, 멍청하며 궁지에 몰린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윈터 블라디미르의 몰락을 바라고 있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가문이 반파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묘하게 음습한 집착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왜 굳이 제 이름을 썼을까요?”

윈터의 얼굴은 전에 없이 복잡해 보였다.

누가 보면 델이 아닌 윈터가 습격을 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밝힐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험난한 사막 땅에서 구르던 델이 오히려 상황 파악을 더 빨리 끝낸 상황이었다.

“그대와 내가 밀회를 즐기려면, 나 혼자 나올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황도에 퍼져 있는 염문설을 델도 모르지 않았다.

물론 델의 목적은 밀회가 아니었지만,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려면 주위를 물린 채 당사자 둘이 만나야 했으니 이 판을 짠 자의 예상대로 움직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오해하는 게 낫긴 해. 타국의 잘생긴 황태자의 신분을 뛰어넘는 열렬한 구애. 크으으, 멋지지 않나?”

축축 늘어지는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델이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윈터의 표정은 밝아질 줄을 몰랐다.

“……미안.”

결국 델이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만 긁적였다.

평소라면 그런 농담에 웃어 줄 여력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겠으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사실 이 일은 윈터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만 있다면 깔끔하게 해결될 일이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모함일 테니까.

문제는, 윈터가 자신의 행방을 밝히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제니마 상회도, 그곳을 운영하는 아르카도, 거기에 함께 있었던 메이딜리언도.

전부 아직은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으니까.

이 판을 설계한 자는 그것까지 전부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상대는 윈터뿐만 아니라 제니마 상회와 아르카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큰일이네요.”

윈터가 현 상황을 짧게 평했다.

곧 그녀가 델에게 물었다.

“이제 전하께서는 절 고발하실 건가요?”

그 말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델이 대답했다.

“나야 그냥 비밀로 하고 넘어가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습격당한 걸 본 사람이 있어.”

“누구요?”

사용인들이라면 적당히 무마할 만하겠지만, 도저히 무마되지 않는 인물이라면 곤란했다.

그리고 곧 델은 윈터가 가장 바라지 않을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아르만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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