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이미 윈터에게 더는 고백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시도를 안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흐음.”
메이딜리언은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 데보라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평소의 메이딜리언으로 미루어봤을 때, 저건 꽤 긍정적인 신호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뿌듯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데보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간다는 말에 한타가 물었다.
그러자 데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오늘 훈련 있는 날이야.”
“그래? 요즘 공작가에서 훈련이 자주 있네.”
“내가 원래 좀 바쁜 몸이야. 오늘은 전하께서 오신다고 해서 잠깐 들른 거야.”
재잘재잘 한타에게 말한 데보라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메이딜리언이 한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요즘 데보라가 바쁜 것 같다고?”
“네. 저번에도 훈련한다고 정신없던 것 같은 기억이 있어서요.”
자기가 먼저 물어 놓고, 메이딜리언은 별다른 말을 잇지 않았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한타가 결국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다시 오라고 할까요?”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가볍게 손을 내저은 메이딜리언은 다시 윈터가 올 때까지 깊은 상념에 빠지기로 한 것 같았다.
손에 쥔 펜던트를 응시하던 그의 눈이 잠깐 가늘어졌다.
* * *
“어? 뭐야, 다들 먼저 와 있었네?”
마부를 재촉해 제니마 상회에 도착한 윈터는 회의실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메이딜리언을 비롯해 엘리슨과 한타, 그리고 제니마 상회의 점주인 베일리까지 회의실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늦어서 미안.”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빠르게 걸어와 자리에 앉는 윈터를 보며 엘리슨이 말을 건넸다.
평소라면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을 윈터를 알기 때문이었다.
“아, 뭐, 잠깐.”
윈터는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고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닿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윈터는 메이딜리언에게 입 모양만으로 ‘나중에’, 라고 말했다.
제게만 말해 준다는 사실이 퍽 기분이 좋았는지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조금 더 느슨해졌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할까요?”
모일 사람들이 다 모였기 때문에, 윈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는 바로 시작되었다.
“일단은 저희가 제시하는 조건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슨은 준비해 온 자료들을 나눠 주며 말문을 열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받아든 자료를 검토했다.
제니어스의 특산품과 칼로프의 특산품들의 목록이 정리되어 있고 각 품목들의 단가부터 예상 거래량까지 깔끔하게 적혀 있었다.
“어차피 양쪽에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비슷할 겁니다. 결국은 장차 제국에서 거래하게 되는 품목들을 정하는 것이니까요.”
다들 어느 정도 자료를 읽었다고 판단이 되자 엘리슨이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칼로프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선택받는 것이 이번 후계 경합의 목적이었지만, 결국 장기적으로 이 거래를 하게 되는 것은 제니어스 제국이었다.
그리고 크비누스가 노리는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어차피 제국에서 제시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후계 경합이라는 핑계를 앞세워 귀족들의 돈과 공물들로 자기는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는 심산이겠지.
“맞아. 그러니 큰 이변이 있지 않은 이상은 첫 번째 경합은 우리가 이길 거야.”
윈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스터 측에서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정보전에서 윈터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칼리스타’라는 유리한 패도 이미 그녀의 손에 있었으니까.
델은 반드시 메이딜리언을 선택할 것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다음이야.”
이미 지난번 회의 때 어느 정도 정해 두었던 거래 내용은 옆으로 미뤄 두고, 윈터가 말했다.
엘리슨 또한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말을 받았다.
“지난번에 지나가는 말로 잠깐 말씀해 주신 걸 기억하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엘리슨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표정이 잠시 곤혹스러워졌다.
감히 입에 올리기도 어렵다는 듯 망설이던 엘리슨이 곧 입을 열었다.
“이번 후계 경합에서 선황 폐하의 죽음에 대해 밝히는 게 가능할까요?”
“뭐?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말에 베일리와 한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사람이 비단 그뿐만은 아니었다.
메이딜리언도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들어도 여전히 의문점이 많았다.
“선황 폐하의 죽음을 꼭 이번 후계 경합에서 밝혀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맞아.”
메이딜리언의 물음에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비누스가 실각해야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을 테니까.”
윈터의 발언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녀의 말은 꼭 크비누스가 선황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 마냥 기분 탓만이 아니라는 듯 윈터는 회의실 안의 인물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맞췄다.
“엘리슨, 선황께서 어떻게 돌아가셨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었죠.”
“증상은?”
“작열감과 이명, 두통이나 근육통을 동반하기도 하고, 빈혈과 근육 감소, 식욕감퇴도 심했습니다.”
그때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엘리슨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마지막에는 고열과 환각에 시달리시며 각혈까지 하셨죠.”
엘리슨의 감정에 동감하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윈터가 문득 고개를 들어 메이딜리언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선이 마주쳤다.
동시에 윈터의 눈빛에서 뭔가를 깨달은 듯, 메이딜리언의 안색이 달라졌다.
“설마…….”
“그래, 익숙한 증상이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한타가 눈만 끔벅이다 물었다.
“지금 뭐가 익숙하다는 겁니까?”
“선황께서 겪었던 증상 말이야. 내가 마력 폭주할 때 겪었던 거랑 비슷한 것 같아서.”
“하지만, 하지만 선황 폐하께서는…….”
당시의 상황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한타도 마찬가지였다.
늘 곁에서 선황을 보필해 왔으니까.
그렇기에 윈터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었다.
“그래. 마력 폭주 같은 걸 일으킬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
윈터 또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마력 폭주라니, 선황과 그토록 안 어울리는 단어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윈터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가령, 일부러 마력 폭주를 일으키는 약을 장기간 복용했다면 어땠을까?”
어디까지나 가설을 제시하는 뉘앙스였지만, 어느 정도 확신에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윈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엘리슨의 눈빛이 달라졌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저 마력 증폭 정도로 끝났겠지만, 선황은 방대한 마력을 타고나 초대 황제의 현신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잖아.”
방대한 마력과 뛰어난 지력. 어릴 적부터 차기 황제감으로 자리를 공고히 했던 선황이었다.
그랬기에 크비누스가 감히 대항할 생각도 못 하고 종교에 귀의했던 것이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었던 거라면?”
“정말 그런 약이 있습니까?”
약초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던 베일리가 물었다.
제니마 상회에서도 특수한 약초를 취급하고 있었지만, 여태껏 그런 효능이 있는 약물은 들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있어.”
윈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엘리슨이 되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그걸 경합과 엮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나머지 두 개의 경합 과제는 황자 둘이 하나씩 내게 될 테니까.”
예리한 금빛 눈동자가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반짝였다.
그들은 윈터가 저런 눈빛을 할 때면 늘 정말로 미래에 그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았다.
“그 약을 찾는 걸 두 번째 과제로 낼 거야. 첫 번째 경합을 이기면 자연스럽게 제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래도 아직 문제가 남아 있었다.
엘리슨이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만약 정말로 그 약을 찾게 되더라도 그걸 섭정과 엮기는 어렵습니다.”
“그건 우리가 안 해도 돼.”
“그럼 누가…….”
기다렸다는 듯 씩 웃은 윈터가 말했다.
“1황자 전하가 맡아 줄 테니까.”
이것이 바로 윈터가 아스터를 계속해서 포섭하려는 이유였다.
오직 그만이 크비누스가 선황을 살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으니까.
“그를 믿습니까?”
잠자코 대화를 듣던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윈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어떻게 확신하겠어.”
원작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윈터는 섣불리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여전히 그녀가 아는 아스터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과제를 제시하는 순간 1황자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우리가 뭘 하려고 하는지 말이야.”
회의실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의 연속이었기에, 혼란을 잠재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꽤 걸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때였다.
바깥에서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 죄송합니다만,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르카 단원의 말에 베일리가 작게 인상을 썼다.
“손님이라니, 대체 누구?”
“우선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회의를 방해하고 끼어들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베일리가 문을 열더니, 잠시 주춤했다.
“아가씨, 아가씨 손님인데요?”
“……내 손님이라고?”
윈터가 오늘 여기에 있다는 것은 극비에 가까웠다.
대체 누가 자신을 찾아 여기까지 왔나 싶어 윈터가 문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주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행어 경?”
윈터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숨을 헐떡이는 유스터스가 거기에 있었다.
“피하십시오, 소공작 각하.”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칼로프의 황태자가 습격을 당했습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