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50)

84화

* * *

메이딜리언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멍한 얼굴로 허공만 응시했다.

누가 봐도 무료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는 윈터가 알려 준 약속 시간보다 한참이나 일찍 도착한 상황이었다.

언제나 아쉬운 쪽이 기다리는 법이니까.

연회를 끝으로 그는 한동안 윈터를 만나지 못했었다.

물론 가끔 편지를 보내 연락을 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요즘 워낙 황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이목이 쏠려서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혹시나 중간에 편지가 유실되거나 노출될 염려도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는 당연히 못 했고, 간간이 안부만 물었을 뿐이었다.

윈터는 다행히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기는 했으나, 딱 봐도 바쁜 짬을 내서 쓰는 느낌이었다.

듣자 하니 요즘 그녀도 후계자 수업으로 바쁘다던데, 결국 메이딜리언은 소모적인 안부 묻기는 금세 그만둬 버렸다.

공작가 후계 수업뿐만 아니라 칼리스타까지 관리해야 하니 지금 윈터는 누구보다 바쁠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황자 전하.’

문득 메이딜리언은 아이셀을 떠올렸다.

세상에 알려지고 싶지 않아 하던 그 마법사가 설마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릴 적에는 심드렁한 얼굴로 자신을 울보 꼬맹이라고 부르던 자가 이제는 황자 전하, 하며 예의를 차리는 것이 퍽 어색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사업 관련해서 칼리스타의 단주와 이야기를 나누려고요.’

칼리스타가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들이 판매하는 마도구 때문이었다.

누구도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한, 기발하고도 생활의 편의성을 놀랍도록 향상시켜 주는 그 물건들은 공개되는 것과 동시에 날개가 돋친 듯 팔려 나가곤 했었다.

과연 그 물건들을 만든 게 누구인가 모두 궁금해했었는데, 윈터가 칼리스타의 단주로 밝혀지고, 또 아이셀과의 친분까지 드러나니 이제 그 많은 발명품의 원작자가 누구인지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업이라니, 그럼 설마…….’

‘두 사람의 친분이 거기서 비롯된 거였군요.’

‘대체 블라디미르 소공작은 어떤 사람인 거죠?’

아이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이딜리언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전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까?’

에른스트 후작의 물음에 메이딜리언은 그저 말없이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어릴 적부터 윈터의 치료를 위해서 아이셀이 비밀리에 초빙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얼마 전 모든 걸 밝히겠다며 윈터가 말해 준 것도 있었다.

‘내가 칼리스타의 단주야, 메이.’

그 말 한마디에 얼마나 놀랐었던가.

공작가에 있을 때도 워낙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일을 만들기 좋아했던 사람이라서, 섬에 마냥 처박혀 있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설마 길드까지 창단했을 줄이야.

이어지는 미래 설계는 더욱더 놀라웠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스스로 고민하고 몇 번이고 고쳐 왔던 것처럼 윈터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런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은 감탄하는 것과 네임택 픽스 펜던트로 향했다.

그래서 꼭 이미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런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은 감탄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가 아주 작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심하기는.”

쯧, 가볍게 혀를 찬 메이딜리언이 잡생각을 털어 냈다.

이런 생각들은 그를 좀먹기만 할 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거나 좀 고쳐 달라고 해 볼 걸 그랬나.”

대신 그는 일부러 생각을 다른 곳으로 흘려보냈다.

메이딜리언의 시선은 고민이 많을 때면 늘 손에 쥐고 있는 작은 펜던트로 향했다.

어린 시절, 윈터와 몰래 연락하기 위해 아이셀이 만들어 줬던 물건이었다.

지금은 비록 마력이 담겨 있던 보석도 빛이 바랬고,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지만 메이딜리언이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였다.

손에서 펜던트를 굴리던 메이딜리언이 문득 작게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곧 입을 열었다.

“들어와.”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거대한 체구를 애써 작게 접은 한타였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뭘. 아까부터 기웃대던 거?”

“하, 하하하.”

제니마 상회에 올 때마다 한타는 늘 메이딜리언 주위를 맴돌았다.

지금도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앉아.”

“예, 옙!”

바짝 군기가 들어 대답한 한타가 조심스레 메이딜리언의 맞은편에 앉았다.

메이딜리언은 한타가 늘 자신에게 지극히 저자세인 모습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게 자신에게 충성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혈통에 충성하는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저어, 전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건강은 하신 거죠? 혹시 궁에서 텃세를 부리거나 전하를 괴롭히는 인간들은 없습니까? 어쩐지 뺨이 좀 야위신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처럼 걱정 가득한 얼굴로 한타가 물었다.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은 채 줄줄 나오는 말에 메이딜리언은 차마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한타 아저씨! 혹시 전하 어디 있는지 알…… 헉!”

안으로 들어서며 버럭 외치던 데보라가 익숙한 뒤통수를 보고는 말을 멈췄다.

한타가 2층 회의실 쪽에 있다는 말만 들었던 그녀는 설마 그토록 찾아 헤매던 메이딜리언이 여기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저, 전하?”

“…….”

“하하, 그, 그동안 잘 지내셨죠? 건강하시고요? 왠지 안색이 좀 안 좋으신데……. 혹시 궁에서 누가 괴롭혀요?”

누가 키웠는지 안 물어봐도 알 것 같은 물음들에 메이딜리언은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래서, 날 그렇게 찾은 이유가 뭐야?”

“아, 맞다!”

메이딜리언의 물음에 데보라는 잊고 있던 게 생각난 듯 버럭 외쳤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와 한타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한타는 메이딜리언의 허락도 없이 덜컥 앉아 버리는 데보라에게 한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데보라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전하. 큰일 났어요!”

“무슨 큰일?”

“윈터 아가씨가 칼로프로 떠날 것 같아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메이딜리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모르셨죠? 벌써 황도에 소문이 파다해요. 윈터 아가씨랑 칼로프에서 온 황태자랑 둘이 연회장에서 아주 알콩달콩했다던데요?”

메이딜리언은 잠시 말을 잃었다.

이미 윈터가 얘기해 준 계획이었고, 심지어 그 계획대로 매우 순조롭게 잘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래도 막상 데보라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황제가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사람보다야 다들 칼로프의 황태자가 훨씬 낫다고 그러…… 히익!”

눈치 없이 황도에 떠도는 소문을 미주알고주알 속닥거리던 데보라가 기겁하며 한타의 옆에 바짝 붙었다.

순간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메이딜리언의 손에서 마력이 튀며 옆에 있던 간이 테이블 하나가 가루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리도 없이 바스러져 먼지처럼 흩날리는 테이블을 보며 데보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좀 전에 뭐라고 했었지?”

미처 못 들었다는 듯 메이딜리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데보라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메이딜리언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러고는 곧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가씨는 칼로프에 안 가.”

“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황태자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그걸 저, 전하가 어떻게 아시는데요?”

데보라의 끝없는 질문에 의외로 메이딜리언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주제가 ‘윈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들었거든.”

제 귀를 톡톡 치며 메이딜리언이 말했다.

“뭐……를요?”

“심장 소리.”

실은 처음부터 메이딜리언은 알고 있었다.

윈터의 심장 소리가 자신만 보면 주체할 수 없이 쿵쾅거린다는 것을.

우습게도 어릴 때는 그것이 윈터가 아파서인 줄 알았었다.

하지만 다시 재회하고 나서도, 윈터의 심장은 여전히 그에게만 기분 좋은 고동 소리를 들려 주었다.

“그러니까 안 갈 거야.”

“그럼 아가씨 마음이 변하기 전에 제대로 고백하세요.”

데보라가 평소답지 않게 메이딜리언을 부추겼다.

물론 여전히 메이딜리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꽤 용감한 발언이었다.

“했어.”

“……네?”

메이딜리언의 작은 대답에 데보라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차마 다시 물어볼 수는 없었다.

윈터나 메이딜리언을 새끼고양이 다루듯 하지, 메이딜리언은 남들한테는 흉포한 맹수나 다름없었다.

언제 상대를 물어뜯을지도 모르는데, 차마 다시 한번 말해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저 우중충한 표정을 보면, 안 물어봐도 벌써 그 결과를 알 것 같았다.

“우, 우선 대놓고 고백하는 건 좋은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메이딜리언의 심란한 표정을 보던 데보라가 말문을 열었다.

“애초에 아가씨는 전하를 딱히 진지한 상대로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은걸요.”

평소의 단순한 데보라와 달리,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처음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듯하던 메이딜리언도 어느새 자세가 달라졌다.

“아예 전하랑 연애할 생각도 없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유혹하세요.”

그 말에 메이딜리언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데보라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와닿지 않는 듯했다.

“전하께서 가진 걸 최대한 활용하셔야죠.”

그러나 데보라는 말하면 할수록 확신이 생기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미모면 미모, 몸매면 몸매, 전하께서 어디 빠지지 않잖아요?”

그러고는 슬쩍 덧붙였다.

“게다가 꽤 아가씨 취향이기도 하고.”

우습게도 메이딜리언은 그 말이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한타가 얼른 거들었다.

“그러엄. 사실 이만한 미색은 대륙에서도 찾기 어렵지.”

“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유혹해 보세요.”

데보라가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얼굴에 조금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본인이 넘어올 수밖에 없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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