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50)

83화

그 말에 연회장이 웅성거렸다.

무려 차기 대현자라고 일컬어지는 아이셀의 말이었다.

그녀의 말은 뒤늦게 사교계에 등장한 윈터의 행적을 증명하는 것도 모자라 그 위상을 잔뜩 올려 주는 발언이었다.

“아, 그렇군요. 역시…….”

아스터가 낮게 감탄하려던 찰나였다.

“크흠,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1황자 전하.”

더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아르만 백작이 끝내 아스터의 말을 끊어냈다.

그러고는 아스터의 귓가에 뭐라고 작게 속닥거렸다.

애써 티는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백작의 말을 듣고는 아스터의 안색이 흐려졌다.

“아쉽지만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군요.”

“네, 얼마든지요.”

아스터는 짧게 눈인사를 한 뒤 백작과 사라졌다.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윈터가 아이셀에게 다가가 물었다.

“근데 말도 없이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스승님이 가 보라고 하셨어.”

“……할머니가? 왜?”

아이셀의 시선이 윈터와, 그 뒤에서 자신을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던 델에게 짧게 닿았다.

“예언이 움직이고 있다고 하셨거든.”

“예언이, 움직인다고?”

아이셀의 시선과 예언이라는 말 때문에 윈터의 눈길도 자연스럽게 델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셀이 말한 예언이 움직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래서 당분간은 너한테 찰싹 붙어 있을 거다.”

아이셀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델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한테도 위대한 마법사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주지 않겠나, 소공작?”

“아, 물론이죠. 전하.”

윈터는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을 소개하듯 델에게 말했다.

“이쪽은 아이셀 마티아스. 대현자 에르퀼 님의 제자이시죠.”

애써 초조한 기색을 감춘 델이 성큼 다가서서는 먼저 손을 뻗었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군요. 델 블리크 칼로프입니다.”

불쑥 거리가 가까워지자 아이셀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곧 그녀가 델의 손을 마주 잡으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셀 마티아스입니다.”

그 말에 반짝반짝 빛나던 델의 눈빛이 흠칫 떨렸다.

그러고는 윈터에게 슬쩍 물었다.

“날 모르는 건가,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아마 전혀 기억 못 하고 있을걸요.”

델에게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으나 아이셀에게는 그저 윈터의 무수히 많은 심부름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한쪽에게만 인상적이었던 만남에 델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한편, 사교계의 거물들 사이에 둘러싸인 윈터를 보며 음침한 눈빛을 쏘아 보내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리비우스 블라디미르, 윈터의 외삼촌이었다.

“소공작은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진실이 하나하나 밝혀질수록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윈터를 보며 다들 말을 걸어 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러나 타국의 황태자나 대현자의 제자 같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윈터에게 감히 아무도 먼저 말을 걸 수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그들은 리비우스에게 슬쩍 말을 얹었다.

“예, 그러게 말입니다.”

리비우스는 샴페인을 들이켜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개중에는 암만 사촌이라도 서로 인사도 나누지 않는 윈터와 리비우스를 보며 묘하게 속을 긁는 발언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알버트를 앞세워 그렇게 차기 블라디미르 공작이 될 것처럼 유난을 떨더니, 막상 진짜 후계자인 윈터가 등장하고 나니 척 봐도 리비우스와 알버트 쪽은 끈이 떨어진 티가 났기 때문이다.

“알버트 공자는 좋겠어요. 소공작이 저리도 훌륭하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러게요. 남작께서도 조카분이 뿌듯하시죠?”

“어휴, 물어 뭐 하겠어요. 당연히 그러시겠죠. 하하.”

리비우스는 옆에서 떠드는 인간들의 말에 애써 은은한 미소만 지었다.

치미는 굴욕감에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잘게 떨렸다.

그의 번뜩이는 시선은 윈터를 집요하게 쫓았다.

그녀는 대마법사와 칼로프의 황태자 사이에서 더없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의 아들은 어떤가.

이 연회에 초대받지도 못한 채 술만 진탕 마시며 밤을 지새우고 있지 않은가.

리비우스는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부당하다고 느꼈다.

‘우리가 가문을 발전시키려고 얼마나 힘을 썼는데!’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의 누이 오필리아는 누구에게나 칭송받는 인재였다.

후계자로 정해지기 전에도 이미 차기 공작이 될 것이라고 일컬어졌다.

오필리아의 그늘에 가려진 채, 리비우스는 늘 사람들의 이목에서 뒷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상황이 제 아들에게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분한 마음에 까드득, 절로 이가 갈렸다.

“이럴 수는 없어. 이대로는, 이대로는 안 돼…….”

작게 중얼거리던 리비우스가 샴페인 잔을 마저 비우고는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 *

연회를 마치고, 윈터는 상기된 얼굴로 홀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곁에는 메이딜리언이 함께였다.

윈터를 배웅해 준다는 핑계로 두 사람은 함께 마차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됐어?”

사람들과 멀어지기 무섭게 윈터가 물었다.

윈터의 손을 잡고 걷던 메이딜리언은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계획대로 됐어요.”

윈터가 사람들 이목을 끄는 사이 메이딜리언은 에른스트 후작과 함께 지지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아스터와 아르만 백작도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는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의 주인공은 되지 못했다.

윈터가 대마법사와 대현자까지 아는 데다, 칼로프의 황태자와도 더없이 친밀해 보이니 이번에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어 보려고 다들 눈이 벌겠다.

그런 상황에 사교계에 등장할 때부터 윈터와 유별난 친분을 자랑하던 메이딜리언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메이딜리언에게 눈에 띄게 사람이 몰렸었다.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황위에 올라야 한다니.”

그게 별로 탐탁지 않았는지 메이딜리언이 작게 혀를 찼다.

그러더니 대뜸 걸음을 멈추고는 윈터에게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응? 뭐가?”

“다들 어떻게든 아가씨랑 친해져 보려고 하는 거요.”

메이딜리언답지 않은 투정에 윈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 기회에 지지자를 늘리면 더 좋은 거지, 왜.”

“알고는 있어요. 하지만…….”

그는 개중에 어떻게든 윈터를 유혹해서 한몫 단단히 잡아 보려던 인간들도 있다는 걸 알았다.

메이딜리언을 지지한다기보다 그저 윈터만이 목적인 불순한 자들은 그대로 눈깔을 파내 버리고 싶었다.

물론 윈터는 그런 걸 원하지 않겠지만.

애써 살의를 잠재운 메이딜리언이 윈터에게 물었다.

“아가씨는요? 목표하신 건 다 이루셨나요?”

“뭐, 그런 셈이지.”

델과의 대화만으로도 이미 큰 성과였는데 뜻밖에 아이셀까지 등장하며 상황은 대단히 윈터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아부할 목적으로 슬쩍 다가와 벌써 후계자 경합에서 메이딜리언이 승리한 양 이야기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다소 성급한 발언이긴 했지만, 중요한 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아르만 백작은 꽤 속이 탔을 것이다.

옆에 있는 아스터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만 있으니, 더욱 그랬겠지.

“곧 칸나 통해서 연락할게.”

마차 앞에 도착한 윈터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제니마 상회에서, 알지?”

“네. 기다릴게요.”

메이딜리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긋 웃었다.

* * *

연회를 마친 다음 날부터 윈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본격적으로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필요한 교육들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해야 했지만, 윈터는 지병으로 인해 그럴 만한 여건이 되지 못했었다.

덕분에 마치 밀린 숙제처럼 지난 8년간 받지 못했던 교육들이 한 번에 몰려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칼리스타를 운영하는 거나 공작가를 통솔하는 거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비실비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윈터가 중얼거렸다.

그녀와 함께 걷고 있던 집사가 작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도 선생들이 다들 칭찬만 하시던걸요. 가주님께서도 아가씨의 수업 보고를 받아보시고 무척 만족하신 눈치셨답니다.”

“그럼 다행이긴 한데 말이지.”

집사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윈터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서던 그녀가 잠시 미간을 좁혔다.

후계 수업을 받으며 최근에 배정받은 집무실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뭔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흐음.”

윈터가 집무실 곳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곧 그녀는 틀린 그림 찾기를 하듯 이전과 달라진 부분을 발견했다.

열심히 곳곳을 뒤져 놓고 다시 말끔하게 복원한 것처럼, 윈터가 기억하고 있는 커튼의 주름이나 문이 열린 정도가 아주 조금씩 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랍 안에 보관하고 있던 서류의 위치도 달라졌다.

최근 칼로프와의 교역 내용을 고르느라고 누구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집사.”

“예, 아가씨.”

윈터의 뒤를 따라 들어와 들고 있던 책들을 내려 두던 집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대답했다.

“혹시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 누구 여기 들어온 사람 있어?”

“그럴 리가요. 아가씨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셨잖아요.”

“그래. 그랬지.”

중얼거리듯 대답하던 윈터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럼 과연 어떤 대범한 인간이 여길 이렇게 신나게 뒤지고 가셨을까.

최근 윈터는 일정 시간만큼은 후계 교육에 할애해야 했기 때문에 꽤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집무실을 비우는 시간을 아는 공작성 내부의 인물이라면 누구든 용의자라는 의미였다.

“일단 알겠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윈터가 다시 몸을 돌렸다.

“난 잠시 나갔다 올게.”

“어디 가세요?”

집사의 물음에 윈터가 샐쭉 웃었다.

“비밀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