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50)

82화

“뭔데요?”

기대고 있던 발코니에서 등을 떼고 제대로 선 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전하!”

“덕분에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어.”

델의 눈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 새카만 밤하늘 같은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으니 윈터는 괜히 양심에 찔렸다.

슬쩍 시선을 피한 윈터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 그, 그냥 미래에 황자 경합 때 도움이 됐으면 해서 한 일인걸요.”

그 말에 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래’라는 말이 그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꼭 이미 알고 있는 일을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칼리스타의 단주에 대해 들었던 소문 하나를 떠올린 델이 물었다.

“그럼 그 말이 사실인가?”

“뭐가요?”

“칼리스타의 단주가 미래를 본다는 거 말이야.”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윈터가 잠시 멈칫했다.

칼리스타가 막 출범했던 초기에 하도 절묘하게 몇 가지 일을 처리했던 덕분인지 한때 그런 소문이 돌긴 했었다.

그 괴상한 길드의 주인이 미래를 보는 마녀라고.

실제로도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이기는 했다.

“그건 영업 비밀이라 알려드릴 수가 없겠는데요.”

자연스럽게 대답한 윈터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오히려 그런 반응이 호기심을 자극한 듯 델이 윈터의 팔을 툭 치더니 대답을 재촉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하나씩 교환하자고. 그대는 이미 내 비밀을 알고 있잖아.”

“이건 교환이 아니라 갈취 아닌가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윈터가 말했다.

그러나 원래 상대가 도망치면 쫓아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

델은 성큼성큼 윈터에게 다가갔다.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추고 눈을 찡긋하는 델의 미소는 매혹적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던 윈터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

“지금 절 유혹하시는 건가요?”

“아, 미안. 습관이 되어서 말이야.”

윈터의 지적에 델이 얼른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곧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애초에 유혹이 되기는 했어?”

“전혀요.”

“나 참, 바람둥이 명성에 금 가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군.”

본인 말대로 델은 칼로프에서 바람둥이 황태자로 유명했다.

어디까지나 누구도 자신을 여인이라 의심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친 연막이었지만.

그런데 아무것도 가장하지 않고도 이렇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라니.

델은 무척이나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아까부터 무척이나 마음에 걸리던 일이 있었으니까.

“소공작.”

“네, 전하.”

“그런데 그대는 정말로 괜찮나?”

“괜찮냐니, 뭐가요?”

“내가 예언대로 제왕의 재목이라면, 언젠가 제니어스를 정복할지도 모르잖아.”

지금은 좋아도 나중엔 어떻게 틀어질지 모르는 게 사람 사이의 관계였다.

델은 어릴 때부터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막 시작하는 우호적인 관계에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건 서로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았다.

그러나 델의 우려와 달리 윈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니면 새로운 화합의 장이 되든가요.”

그 말에 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맘에 쏙 드는 말만 하는지.

윈터라는 인간은 알면 알수록 신기했다.

“이토록 완벽한 우방이라니.”

델이 짧게 감탄 아닌 감탄을 내뱉었다.

현 상황에서 윈터만큼이나 적절한 상대는 없었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데 말이지.”

뭔가를 가늠하듯 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공작, 그러지 말고 칼로프로 오는 게 어때?”

“……제가 수락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 그대의 충심은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당당한 스카웃 제의에 윈터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게 애매한 거절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델이 재차 손을 내밀며 말했다.

“원하는 건 뭐든 해 주겠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가장하고 있었지만 델은 더없이 진심이었다.

차기 황제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주겠다고 하다니.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분명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나 윈터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여기 있어야 해요.”

“아아, 정말 틈이 없네.”

어깨를 으쓱인 델은 담백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렇다고 아예 윈터를 포기한 건 아니지만.

“칼로프는 그대에게 언제나 열려 있을 거야. 모든 일을 마친 뒤에 와도 괜찮아.”

그 말에 윈터는 픽 웃었다.

“만약 그때까지도 제가 살아 있다면, 한번 생각해 볼게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델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윈터가 가볍게 손을 들어 마법을 해제하더니 말했다.

“이만 들어가시죠. 너무 오래 나와 있는 것도 좀 그래서요.”

“난 그대랑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시간은 많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

“뭐, 그래.”

두 사람이 곧 휘장을 걷고 연회장 안으로 돌아갔다.

보나 마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꽂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들 대신 연회장의 이목을 끌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소공작.”

“네?”

“저 사람, 저자가 왜 여기 있지?”

윈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델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 섰다.

늘 여유롭고 느물거리던 표정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대체 뭘 보고 저렇게 놀라는 건가 싶어 윈터가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혀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아이셀 언니?”

“저자의 이름이 아이셀인가?”

언제 뒤따라왔는지 델이 윈터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되물었다.

윈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대현자 에르퀼 님의 제자예요.”

윈터의 대답에 델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름을 듣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설마 진짜로 그 유명한 대마법사 아이셀이었을 줄이야.

“……그럼 그대는 저 거물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칼로프까지 보냈단 말인가?”

“그땐 아무래도 제가 좀 사정이 있어서요. 그리고 언니가 마침 칼로프에 갈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부탁했었죠.”

윈터는 심장의 봉인 같은 건 언급하지 않은 채 적절히 사실만을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게 그녀를 더욱 비범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체 어느 마법사가 마침 가는 길이라며 꼬마 애의 부탁 같은 걸 들어준다는 말인가.

델의 오해가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윈터는 그저 아이셀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가 여긴 대체 어쩐 일이지?”

세상에 자신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 아이셀이었다.

따로 언질도 없이 황궁 연회에 참석하다니.

평소와 다른 행동에 의아해하던 윈터의 시선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바로 칼로프의 사신단이었다.

그들은 아이셀을 보며 저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작게 수군거리고 있었다.

“전하, 사신단분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윈터의 말에 델은 당황하지도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왜요?”

“내가 ‘에르윈트’를 수소문하고 있었잖아.”

그 말에 윈터의 표정도 난감해졌다.

이름과 외형만으로 실제로 있지도 않은 에르윈트를 찾아다닌 지가 거의 10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수하들에게 시켜 암암리에 찾고 있었다고는 하나 아마 칼로프에서는 황태자가 찾는 여자가 꽤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딱 저렇게 생겼다고 알려 줬던 사람이 나타났는데, 당연히 난리겠지.”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윈터가 델에게 황급히 물었다.

“왜 찾는지는 말 안 하셨어요?”

“뭐, 말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럼 다들 뭐라고 오해하고 있는데요?”

핵심을 찌르는 윈터의 말에 델이 슬쩍 눈을 피하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으음, 첫사랑?”

윈터와 델의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네, 뭐. 잘 알았습니다.”

윈터는 일단 사소한 문제는 넘어가기로 했다.

나중에 델이 황위에 오르면 전부 해결될 문제이기도 하고, 애초에 델로서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바람둥이 황태자의 생명의 은인이자 첫사랑이라니, 제법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는 설정이었을 테니까.

“언니!”

짧은 대화를 마친 윈터가 성큼성큼 걸어가 아이셀을 불렀다.

한창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아이셀이 고개를 돌리더니 윈터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뭐야, 꼬맹이. 오랜만. 잘 있었냐?”

“당연하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려던 윈터의 눈에 뒤늦게 아이셀의 곁에 있는 두 남자가 들어왔다.

다름 아닌 아스터와 그의 아버지인 아르만 백작이었다.

아마 두 사람은 윈터가 델과 발코니에서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연회장에 왔던 듯싶었다.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여기서 만나니 더욱 반갑군요, 소공작.”

윈터가 살짝 무릎을 굽혀서 인사하자 아스터도 반가움을 표했다.

그러나 아르만 백작의 표정은 오히려 조금 굳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연회장에 나타난 아이셀과 친분을 쌓아 보려고 하고 있었는데 적절하게 방해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방해꾼은 이미 아이셀과 꽤 두터운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제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걸 아스터가 모를 리가 없었다.

“두 분은 이미 서로 아시는 사이이신가요?”

그래서 그는 일부러 윈터에게 유리한 질문을 던졌다.

“아아, 뭐.”

아이셀이 짧게 긍정하고는 덧붙였다.

칼로프의 황태자부터 대현자의 제자까지.

안 그래도 거물들이 잔뜩 몰려 있던 터라 사람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이어지는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스터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저랑 같이 지내면서 이것저것 배운 사이죠.”

조금 애매하지만 얼마든지 해석할 여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벌써 그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 있는지 곳곳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배웠다고 하시면……?”

사람들의 반응을 잠시 살피던 아스터가 재차 물었다.

이어지는 대답이 무엇이든, 윈터에게는 득이 되면 득이 됐지 결코 실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누가 봐도 표정이 안 좋다 느낄 정도로 아르만 백작의 뺨이 굳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셀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현자 에르퀼 님 아래에서 함께 마법을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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