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50)

81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혼란스러운 부족민들을 융합하는 데 칼리스타가 금전적으로나 무력적으로나 도움을 드리겠다는 말이죠.”

“내가 황위에 오르는데 왜 부족민들이 혼란스러워한단 말이지, 소공작?”

자칫 잘못 곡해했다가는 지극히 무례한 발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델은 문득 불안감이 앞섰다.

윈터 블라디미르, 제니어스의 소공작, 2황자 메이딜리언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

그런 수식어를 전부 제하고도, 그의 눈앞의 상대는 절대 만만치 않았다.

그 유명하신 칼리스타의 단주였으니까.

그런 델의 불안함을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윈터는 빙긋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떨리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윈터가 속삭였다.

“왜냐하면 전하께서는 황위에 오르시면서 진실을 밝히실 거잖아요?”

“무슨…….”

“전하께서 알고 보니 여자라는 진실 말이에요.”

윈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리도 없이 그녀의 목에 날카로운 칼끝이 겨눠졌다.

이 정도 위협이 들어올 것쯤은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윈터는 살짝 손을 들어 반격 의사가 없다는 것부터 밝혔다.

“연회장에는 무기 소지가 금지일 텐데요?”

“간 크게 타국 황태자의 몸을 뒤지는 자는 없더군.”

“아하, 경비에게 다음엔 제대로 몸수색을 하라고 일러둬야겠네요.”

“그전에 그대가 먼저 죽을 텐데?”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윈터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 그녀는 목에 검이 겨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걸음 더 델에게로 다가섰다.

“무슨……!”

오히려 크게 당황한 델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아차 싶었는지 표정이 흐려졌다.

반대로 윈터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역시, 절 죽일 생각은 없으신 것 같은데요?”

결국 델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검을 거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윈터의 말이 용인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감히 나를 여자로 오해한 것도 어이가 없지만, 그걸 전부 떠나 내가 황위에 오르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거라는 망언은 도저히 참아 줄 수가 없군.”

델이 화가 난 듯 윈터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대체 내 어디를 봐서 여자란 말이야? 그대는 연회장이 아니라 의원에게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이야 감쪽같이 남성 같으시죠. 하지만…….”

윈터의 손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그녀의 손가락은 이내 델의 귓바퀴 쪽으로 향했다.

머리카락으로 교묘히 가려 둔 귓바퀴에는 작게 반짝이는 은빛 피어싱이 달려 있었다.

거기엔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알 수 없을 아주 미약한 마력이 맺혀 있었다.

“하.”

델이 짧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이걸 가지고 나를 여자라고 오인한 건가? 이봐, 소공작. 이건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유품…….”

“아니잖아요.”

“……뭐?”

이제 델의 표정은 완전히 굳었다.

느물느물 여유로워 보이던 황태자의 검은 눈동자는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윈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구석에 몰린 델에게는 미안하지만, 윈터는 처음부터 황태자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저 피어싱을 준 사람의 정체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유품 아니잖아요.”

거친 숨소리를 애써 가라앉힌 델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소공작, 내가 부디 여기서 그대를 황족 모독으로 처형하지 않게 해 주게.”

“못 그러실걸요.”

“윈터 블라디미르!”

끝내 화를 참지 못한 델의 검에 서늘한 살기가 맺히던 순간이었다.

“아직도 ‘에르윈트’를 찾고 계신가요?”

윈터의 말에 델의 검이 또 한 번 멈칫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델이 찾고 있던 은인의 이름이자, 이 순간 윈터의 입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잘 생각해 보세요, 전하. 그렇게 오랫동안 수소문을 했는데도 찾을 수 없다면, 왜일까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세상에 에르윈트라는 존재는 없어요.”

“뭐?”

“그건 처음부터 만들어진 존재였으니까요.”

처음 마누트라 섬으로 떠났을 때, 윈터는 실험의 부작용으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메이딜리언이 황자가 되었을 때 벌어질 황자 경합을 대비해 여러 씨앗을 곳곳에 뿌려 두었다.

그중 가장 첫 번째 씨앗이 바로 눈앞의 이 사람이었다.

델 블리크 칼로프 황태자.

미래 사막의 주인이자 아버지의 암살 시도를 피해 평생 남장을 하고 살아야 했던 사람.

원작에서는 현 칼로프의 황제가 왜 자신의 일곱 딸을 모두 죽였는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오직 사생아였던 델만이 남장으로 목숨을 부지했을 뿐이었다.

“네가…….”

윈터의 말에 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믿고 싶지 않지만, 어쩌면 ‘에르윈트’라는 이름 자체가 가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날의 진실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델은 틈이 날 때마다 에르윈트라는 사람을 수소문했으나 그 이유를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그러니 감히 황태자의 친모가 남긴 유품을 의심하며 에르윈트를 언급할 만한 사람은 델을 제외하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에르윈트’ 본인.

“처음부터 에르윈트는 없어요. 간단한 속임수인 거죠.”

눈을 찡긋한 윈터가 허공에 얼음으로 글자들을 만들었다.

그녀의 이름 철자를 이용한 애너그램이었다.

오랫동안 찾아왔던 진실을 마주한 델이 허탈한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하. 그러니까, 그대가…… 에르윈트라고.”

“네. 그런 셈이죠.”

윈터의 대답에 델이 헛웃음을 흘렸다.

10년 가까이 찾아 헤맨 생명의 은인이 실은 가상의 인물이었다니.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만난 에르윈트는 너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한참 만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델이 말했다.

간접적인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윈터가 자신의 비밀을 폭로해 얻을 이득보다 숨김으로써 얻는 이득이 더 클 거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윈터가 제 입으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대리인을 세웠어요. 아마 전하께서 본 사람은 머리카락이 이 정도로 짧고 눈동자는 아이스블루 색인 여자일 거예요. 그렇죠?”

“……맞아.”

윈터는 아이셀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었다.

원작에서도 사막으로 연구를 떠났던 아이셀이 우연히 델과 조우하며 마도구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그 만남을 만들어 내 빚을 지웠을 뿐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던 델이 기가 찬다는 듯 물었다.

“그때 그대가 몇 살이었는지 알고는 있나?”

“으음, 아마 열두 살인가 열세 살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요?”

대략적인 나이를 가늠하며 말했으나 델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 어린 나이에 대체 어떻게 대리인을 내세워 사막까지 사람을 보낸단 말인가.

항간에 떠돌던 ‘칼리스타의 단주는 미래를 본다’라는 이야기가 아주 거짓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델의 뇌리에 스쳤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에르윈트라는 인물이 고작 이렇게 작은 여자라니.

델은 기가 질린 눈빛으로 윈터에게 말했다.

“그대, 진짜 이상한 사람인 거 아나?”

물론 윈터가 그런 말을 듣고 그저 넘길 사람은 아니었다.

“전하도 별로 정상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어허, 무엄하다.”

근엄하게 말해 놓고 델이 먼저 픽,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봐도 아까 머리끝까지 화가 났던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델은 오히려 속이 좀 시원했다.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최측근에게까지 사실을 숨겨 가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진실을 알면서도 지원을 약속하는 완벽한 아군이라니.

“제니어스에 오길 잘했군.”

“좋은 거래를 하실 수 있을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아, 그래. 상상 이상으로 좋은 선물이었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델이 완전히 검을 갈무리해서 집어넣었다.

“솔직히 잠깐 죽일까 말까 고민했는데 역시 안 되겠어. 소공작은 내 예상보다 아주 유능하고 또 재밌는 인간이군. 게다가…….”

말끝을 흐린 델이 윈터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바짝 다가서서는 코를 찡긋하며 속삭였다.

“이 냄새, 뭔가 했는데 이제야 알겠어.”

“전에도 냄새 얘기를 하시더니, 대체 뭔데요?”

다시 몸을 바로 세운 델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너도 예언을 받았구나. 그렇지?”

이번엔 윈터가 놀랄 차례였다.

“대현자 에르퀼 모네스티에의 예언, 그 주인공인 거잖아.”

“저, 전하가 그걸 어떻게……?”

“왜냐하면 나도 그 예언의 주인이거든.”

거기까지 말한 델이 제 뒷목을 주무르며 발코니에 몸을 기댔다.

줄곧 온몸을 긴장하고 있던 탓에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어느새 시간이 어두워져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떠오르고 있었다.

그걸 바라보던 델이 입을 열었다.

“새벽의 별 아래 태어나 아비를 죽이고 마침내 제왕이 되는 사막의 여인이 있다.”

그건 아주 오래전 칼로프의 지배자가 들은 예언이었다.

자신의 발아래 모두 무릎 꿇린 황제는 대현자의 예언을 두려워했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빼앗기고 자식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이 자신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랜 고민 끝에 황제는 예언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자신의 딸들을 모두 죽이기로 했다.

“이게 내 자매들이 죽은 이유야.”

픽 쓰게 웃은 델이 제 귓가를 가리켰다.

죽은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변명으로 가장한 제 목숨줄이었다.

“내가 남자로 가장해야 하는 이유고.”

어린 시절 칼로프의 황제가 사생아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여자아이면 죽인다는 말에 델은 억울했다.

고작 그깟 예언 때문에 어머니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니.

에르윈트, 그러니까 윈터가 없었더라면 죽어서도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에르윈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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