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2황자.”
윈터와 약속했던 것처럼 메이딜리언은 적개심을 감추고 델과 인사를 나눴다.
“칼로프의 황태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입니다.”
“델 블리크 칼로프입니다.”
짧은 인사치레가 끝나고 델의 시선이 윈터에게 향했다.
“2황자, 내가 그대의 파트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도 되겠소?”
“제가 계신 곳에서라면 얼마든지요.”
반대로 말하자면 단둘이서 대화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말에 델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질투가 심한 남자는 보기 좋지 못한 법이요.”
밉지 않게 면박을 준 델이 윈터를 보며 씩 웃었다.
메이딜리언의 거절에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며칠 새에 소공작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군그래.”
“제가 그때 말씀드렸잖아요.”
윈터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럼 나와 할 거래는 준비를 마친 건가?”
“물론이죠.”
“그대의 제안을 기대하지.”
그렇게 말한 델이 눈인사를 한 뒤 칼로프의 사신단 측으로 돌아갔다.
“이따가 방해하시면 안 돼요, 전하.”
그 틈을 타 윈터가 다시 한번 메이딜리언에게 주의를 주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영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이번 작전에 윈터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아는 메이딜리언은 철부지처럼 굴지 않기로 했다.
“……알겠어.”
확답을 받아 낸 윈터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한편 칼로프의 황태자와 꽤 친근한 듯 대화를 나누는 윈터를 보고 귀족들은 다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칼로프의 황태자는 제니어스와 전혀 교류가 없지 않았나요? 소공작은 대체 언제 황태자를 만난 걸까요?”
“칼리스타의 단주라더니 황태자가 뭔가 의뢰를 했던 건 아닐까요?”
“벌써 친분을 쌓다니, 대단하군.”
“설마 첫 번째 경합의 승자가 벌써 나온 건 아니겠죠?”:
“친분만으로 교역이 성사될 리는 없겠지. 상대는 칼로프의 황태자이지 않은가.”
저마다 상황을 추측하며 한 마디씩 얹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한 가지만큼은 동의했다.
“2황자가 블라디미르 소공작을 포용할 만한 이유가 있었네요.”
“암, 나라도 저 정도 인재라면 놓지 못하지.”
“그럼 1황자는…….”
다들 생각하는 바는 비슷했으나 말끝을 흐렸다.
아직 아스터나 크비누스는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끄나풀이 곳곳에 있었다.
괜히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좋지 못한 꼴을 볼 게 뻔했다.
“아, 여기 있었군, 소공작.”
메이딜리언이 다른 귀족들과 친교를 나누러 떠난 사이 델이 다시 윈터에게 접근했다.
“그동안 내가 소공작에 대해 몇 가지를 알아봤는데 말이야.”
손에 든 샴페인 잔 하나를 내밀며 건네는 말에 윈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 뒷조사를 했다고 고백하시는 건가요?”
그러나 델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뭐, 거래 상대에 대해 자세히 알아 둬야 하지 않겠나?”
“흐음, 꽤 좋은 변명이었어요.”
“칭찬 고맙군.”
델이 제니어스식 인사를 돌려주며 픽 웃었다.
샴페인으로 짧게 목을 축인 윈터가 물었다.
“그래서, 제 뒷조사를 해 보시니 어떠셨어요?”
“뒷조사는 어감이 좀 그렇고, 탐색이라고 하는 게 어떤가?”
“그래요. 탐색 결과는 어떠셨는데요?”
잠시 말을 고르던 델이 짤막하게 평했다.
“인상적이었지.”
윈터 블라디미르는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대단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죽을 뻔한 고비도 넘기고, 가문의 도움 없이 홀로 길드를 창단해 벌써 황도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아무런 기반도 없던 2황자 메이딜리언을 단숨에 후계 경합까지 겨룰 수 있는 위치로 올려 두었고.
황자들 사이에서 추문 비슷한 염문이 돌고 있었지만 윈터의 태도가 더할 나위 없이 담백한 것을 봐서는 그것도 어느 정도 와전된 게 분명했다.
델은 알고 보면 황자들이 윈터에게 목매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추측했다.
“어떤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셨어요?”
“그대가 조만간 황도에 퍼질 거라고 한 대단한 소문이 특히나 그랬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거래를 하자고 할까 조금 후회했어.”
그 말에 윈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꽤 아쉽게 되셨네요.”
“뭐, 그래도 나름 소공작이 귀띔을 해 줬던 덕분에 깜짝 선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지.”
그렇게 말한 델이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남들은 다 놀랄 때 나 혼자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반응하는 것도 제법 재밌더군.”
“제 덕분에 요 며칠 즐거우셨겠어요?”
“그래. 제니어스에서 소공작을 만나게 된 건 아주 잘한 일이었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 델이 샴페인을 시원하게 털어 마시더니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으, 술이라기에 받아 왔더니 영…….”
델에 대해 알려진 정보 중에는 타고난 술꾼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걸 상기한 윈터가 말을 붙였다.
“그건 아마 도수가 약해서 그럴 거예요. 제가 제니어스에 오신 기념으로 조만간 좋은 술을 선물해 드리죠.”
그러자 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게 내게 제안하는 첫 번째 거래인가?”
“이런, 보기보다 성급하시네요.”
“그때 말했잖아. 난 인내심이 없다고. 그리고 소공작도 쓸데없는 방해물이 나타나기 전에 빨리 얘기를 끝내는 게 좋지 않겠어?”
아무래도 델은 제국에 체류하는 사이 이미 제니어스 내부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아낸 모양이었다.
윈터 역시 크비누스나 아스터를 위시로 한 1황자 파가 나타나기 전에 거래를 마치고 싶기는 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표정이 굳어 있다고, 소공작.”
델이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 말에 윈터의 손이 움찔했다.
“……제 나름대로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전하께는 벌써 다 들켰네요.”
“내가 원래 눈썰미가 좋거든. 특히 소공작 같은 미인한테는 말이야.”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죠.”
“음? 왜 그렇게 생각해? 난 더없이 진심인데.”
윈터는 델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더없이 자연스러운 태도에 오히려 델은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일단 주위에 보는 눈이 많으니 자리를 옮길까요?”
그렇게 말하며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이쪽을 응시하고 있던 메이딜리언과 금세 눈이 마주쳤다.
윈터는 얘기해 두었던 작전을 실행하겠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메이딜리언도 그녀가 한 것처럼 끄덕이고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되게 친해 보이네?”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을 보며 델이 운을 띄웠다.
무투 대회에 대타로 나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어디까지나 2황자를 등장시키기 위한 윈터의 술수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까 메이딜리언이 윈터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보다 두 사람의 사이가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다.
“뭐, 그렇죠.”
윈터는 순순히 그의 말에 긍정하며 자리를 옮겼다.
델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제니어스의 귀족들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칼로프의 황태자에 블라디미르 소공작까지 함께 있으니 저마다 눈도장이라도 찍으려 난리도 아니었다.
“후, 테라스로 가는 길이 멀기도 하군.”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아 주며 델이 투덜거렸다.
“사교계 시즌이기도 하고, 황태자 전하도 오셨잖아요.”
그러고는 윈터가 신랄하게 덧붙였다.
“한몫 잡아 보려는 인물들이 많겠죠.”
“그대는? 어느 쪽이지?”
“어느 쪽인 것 같으세요?”
앞만 보며 똑바로 걷던 윈터가 휙 몸을 돌렸다.
그녀는 제 의상을 보란 듯이 살짝 양팔을 벌려 보였다.
윈터는 흰색과 은빛이 섞인 엠파이어 드레스에 루비로 된 장신구를 걸치고 있었다.
은빛과 붉은빛. 그게 누구의 색에서 따온 것인지 델은 금세 알아차렸다.
착용한 의상과 장신구 모두 자신이 누구의 사람인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보기보다 충심이 대단한데?”
“요즘 들어 절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과시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눈을 찡긋한 윈터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토록 유능하고 대단한 사람의 지지를 받다니.
델은 새삼 2황자 메이딜리언이 다시 보이기도 했고, 좀 부럽기도 했다.
앞으로의 일을 도모하려면 그에게도 이런 인재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소공작.”
“네?”
“혹시 나한테는 관심 없나?”
“무슨 관심이요?”
“그냥, 여러 가지로.”
“뭐, 약간은 있기는 한데 그게 전하가 원하는 쪽의 관심은 아닐 것 같은데요?”
“그거 아쉽게 됐군.”
델의 추파 아닌 추파를 털어 낸 윈터가 드디어 테라스 앞에 다다랐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쓸데없는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두꺼운 커튼을 내렸다.
그것도 모자라 윈터는 팔에 걸치고 있던 마도구를 작동시켜 방음막까지 설치했다.
“그거 그냥 루비 팔찌 아니었어?”
“루비 팔찌 겸 마도구이기도 하죠.”
“희한하네. 그런 건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제가 누구인지 잊으신 건 아니시죠?”
윈터는 자신이 칼리스타의 단주라는 것을 다시금 델에게 주지시켰다.
칼리스타는 신기하고 기발한 마도구를 개발해 판매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니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인가?”
“그럼요.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은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서는 안 되거든요.”
“왜?”
“전하께서 위험해지실 테니까요.”
그 말에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델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그가 물었다.
“거래를 청하는 줄 알았는데, 협박으로 시작하는 건가?”
“협상이라고 생각하시죠.”
“무슨 협상을 말하는 거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협상이요.”
“어떤 협상이 그런데?”
잠시 심호흡을 한 윈터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칼리스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습니다. 대신…….”
“나는 이번 후계 경합에서 2황자의 손을 들어 주란 말인가?”
윈터의 말을 끊어 낸 델이 그 뒤를 자연스럽게 이었다.
“네, 정확합니다.”
“흐음, 생각보다 실망인걸?”
그러나 델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소공작이 하는 말은 그럴싸하지만 내게 크게 이득이 되지는 못해. 1황자 측도 비슷한 제안을 해 올 테니까. 설마 그들의 제안이 무엇이든 그보다 더한 걸 줄 거라는 막연한 제안을 내미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고개를 가로저은 윈터가 덧붙였다.
“하지만 말씀하시는 거랑 비슷한 제안이긴 합니다.”
좀처럼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델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윈터가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이번 교역뿐만 아니라, 앞으로 황위에 오르게 된 후에도 칼리스타의 도움이 필요하실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