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150)

79화

메이딜리언이 가리킨 것은 윈터의 목이었다.

아마 델의 공격으로 인해 얼룩덜룩하게 멍이 올라오고 있을 터였다.

“아아, 이거. 어쩌다 보니 좀 다쳤어.”

윈터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메이딜리언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잠깐 실례할게요.”

메이딜리언이 성큼성큼 다가서며 말했다.

곧 그의 서늘한 손이 윈터의 목에 닿았다.

덕분에 윈터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메이딜리언도 움찔해서 손을 거뒀다.

“그, 치료해 주려고 한 건데, 혹시 제가 불편하면 다른 사람을 부를…….”

“아니야.”

윈터의 작은 움직임에 메이딜리언은 훌쩍 멀어졌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방 밖으로 나가 의원을 찾아볼 것처럼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윈터는 다급한 몸짓으로 메이딜리언의 손을 잡아챘다.

“아.”

제 손을 부여잡는 작은 체온에 메이딜리언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윈터였다.

마른침을 삼킨 그녀는 뒤늦게 변명을 생각해 냈다.

“음, 지금 네가 온 거 아무도 모르잖아. 밖에 나가는 건 안 돼.”

“……맞네요.”

일단 되는 대로 내뱉었는데 의외로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윈터의 시선이 다시금 자신감을 찾고 또렷해졌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어딘지 멍한 얼굴로 호응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맞닿은 손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윈터가 황급히 메이딜리언의 손을 놓고는 말했다.

“그, 그러니까, 네가 해 줘.”

그렇게 말하고 나니 어쩐지 윈터는 조금 부끄러웠다.

잠시 멈칫하던 메이딜리언은 조심스레 다시 그녀의 앞에 섰다.

“최대한 빨리 끝낼 테니까, 잠깐만 참으세요.”

“으응.”

윈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딜리언의 손이 다시 윈터의 목에 닿았다.

근육의 잔떨림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빠르게 팔딱거리는 맥박도.

이상하게 메이딜리언의 손길이 닿은 부분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서 윈터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내리감았다.

곧 메이딜리언의 손에 옅은 잿빛의 마력이 맺히더니 그대로 윈터의 상처에 스며들었다.

“……다 됐어요.”

“고, 고마워.”

마침내 영겁과도 같던 시간이 지나갔다.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윈터는 메이딜리언이 멀어지고 나서야 꾹 참았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과 함께 묘한 분위기가 방 안에 감돌았다.

“그래서, 그 상처는 대체 어쩌다 생긴 거예요?”

황급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어쩐지 화제가 조금 어색하게 바뀐 것 같았지만, 윈터는 애써 모른 척 반색했다.

“칼로프의 황태자를 발견하고 미행하다가 생긴 거야.”

‘칼로프의 황태자’라는 말에 메이딜리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신과 호각을 다툴 만한 실력을 가진 윈터를 이 정도로 다치게 할 정도의 인물은 손에 꼽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자가 아가씨를 이렇게 만든 거예요?”

“뭐, 그런 셈이지. 나를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했나 봐.”

메이딜리언의 살생부에 새로운 이름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남몰래 델에 대해 악감정을 활활 불태우는 줄도 모르고 윈터는 오늘의 짤막한 대화를 그대로 메이딜리언에게 보고했다.

“예상했던 것처럼 꽤 정신없는 사람이더라.”

“그리고요?”

“……쉽게 안 넘어올 것 같기도 하고.”

“흥.”

윈터는 드물게 자신감 없는 모습을 내비쳤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제까짓 게 뭐라고 윈터의 제안을 거절한단 말인가.

“아가씨의 계획이라면 그자가 넘어오지 않고는 못 배길 거예요.”

“정말 그럴까?”

“당연하죠. 우리 쪽에서 들고 있는 패가 좀 커요?”

메이딜리언이 그렇게 말해 주니 윈터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원작의 내용과 칼리스타의 정보력을 통해 나름대로 촘촘한 계획을 짜고 있지만, 그동안 모든 일은 윈터의 지시에 의존해 이루어졌다.

결국 일을 실행하는 자도 거대한 흐름에 끼워진 톱니바퀴일 뿐,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윈터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메이딜리언과 상황을 공유하고 나니 이제는 그림을 보고 계획을 점검할 수 있는 사람이 둘로 늘어난 것이었다.

그냥 둘이 아니라, 지력과 술수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일당백의 인물이 참여하게 되었으니 윈터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역시, 잘한 결정이었어.”

“뭐가요?”

“너랑 계획을 공유하는 거 말이야.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네.”

윈터의 편안한 얼굴을 보며 메이딜리언의 표정도 느슨해졌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또한 좋았다.

“혹시 실패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요.”

메이딜리언은 오늘 내내 연습해 온 말을 드디어 꺼냈다.

“제가 어떻게든 잘해 볼 테니까요.”

기합이 잔뜩 들어간 말에 윈터가 작게 웃었다.

곧 그녀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나는 널 믿어.”

윈터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원작에서도, 메이딜리언은 거의 황위에 가깝게 다가갔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 윈터의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의 말마따나 메이딜리언은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신뢰가 가득 담긴 금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메이딜리언의 심장에도 뿌듯함이 가득 차올랐다.

그가 고백하지 않겠다고 말한 뒤로 두 사람 사이는 전처럼 화기애애했다.

이대로 영원히 이 관계가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메이딜리언은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오늘 온 목적이요.”

“황실에서 보내는…… 초대장이네?”

“네. 제가 아가씨한테 직접 전달하고 싶었어요.”

메이딜리언이 내민 것은 황실에서 주최하는 칼로프의 황태자를 비롯한 사절단을 환영하는 무도회의 초대장이었다.

조금 긴장한 얼굴로 메이딜리언이 말문을 열었다.

“이번엔, 제 파트너가 되어 주실래요?”

윈터의 눈이 잠시 놀란 듯 동그래지더니 금세 예쁜 호선을 그렸다.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한 윈터가 대답했다.

“그럼요. 기꺼이요.”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 * *

황궁 무도회가 열리는 날은 금세 다가왔다.

늘 멀고 먼 거리를 유지하던 칼로프 제국의 사절단이 온 데다 이번에 첫 교역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느냐에 따라 후계 경합의 첫 단추도 끼워질 예정이었다.

덕분에 무도회에 참석하는 귀족들의 얼굴에는 묘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가씨도 긴장돼요?”

“윈터. 윈터라고 부르셔야죠, 전하.”

짧게 심호흡을 하는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그러나 그는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커녕 잔소리만 들었다.

철부지처럼 입술을 삐죽이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윈터가 황급히 덧붙였다.

“그리고 제게 하대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흐음, 뭐, 알겠네.”

이쪽을 주목하는 시선이 워낙 많다 보니 메이딜리언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놓고는 사람들의 눈이 조금 멀어진 틈을 타 작게 속삭였다.

“이름은 나중에 부르고, 지금은 그냥 소공작으로 할게요.”

그 ‘나중’이라는 게 대체 언젠데?

윈터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티 내지 않고 그럴듯하게 미소 지었다.

“……네, 전하. 편하신 대로 하세요.”

천천히 복도를 걸은 끝에, 두 사람이 마침내 연회장 앞에 도착했다.

앞에서 참석자를 확인하던 시종이 메이딜리언을 확인하고는 얼른 안쪽에 고했다.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 2황자 전하와 윈터 블라디미르 소공작 각하이십니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장은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홀이 펼쳐지는 구조였기에, 방문객을 확인하려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시종의 말과 동시에 이쪽을 향하던 시선들이 윈터의 몸 곳곳에 박히는 것 같았다.

메이딜리언의 팔을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내려갈까요?”

윈터의 긴장이 그대로 전해지자, 메이딜리언이 조용히 물었다.

“……네.”

자연스럽게 미소 지은 윈터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이내 천천히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머, 저기 좀 보세요.”

“1황자 전하와는 아주 갈라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두 사람의 재결합이라니. 소공작의 수완일까요, 2황자 전하의 아량인 걸까요?”

“2황자 전하께서 아량을 베푸시는 성격은 아니지 않나요?”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두 사람은 부채 너머로 속닥이는 말들로 신나게 씹혔다.

신체적인 능력이 워낙 뛰어난 덕분에 속속들이 귀에 험담들이 꽂혔지만 윈터도 메이딜리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처럼 윈터의 평판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소공작은 역시 대단하네요.”

“황도에 온 뒤로 늘 화제의 중심이시죠.”

“그 소식도 들으셨죠? 저분이 알고 보니 그 유명한 ‘칼리스타’의 단주래요!”

“네? 그게 정말인가요?”

“세상에나, 저 어린 나이에 벌써 길드의 주인이라고요?”

소문이 빠른 자들은 벌써 윈터가 칼리스타의 단주라는 소식을 접한 듯했다.

덕분에 연회장은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막 윈터가 계단을 모두 내려왔을 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이 또 하나 발생했다.

미리 연회장에 와 있던 델이 윈터를 향해 똑바로 걸어 왔기 때문이다.

“아가씨가 미리 말해 준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저는 저자가 맘에 들지 않네요.”

모래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윈터가 일러 준 외형적인 특징을 통해 지금 이쪽으로 다가오는 자가 칼로프의 황태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메이딜리언이 빠르게 윈터에게 속삭였다.

윈터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절대 티 내지 마세요, 전하.”

“당연하죠. 제가 나서서 일을 망칠 수야 없잖아요.”

평소와 달리 윈터가 잔뜩 긴장한 이유는 전부 다 저 칼로프의 황태자 때문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전생의 속담처럼, 윈터는 오늘 델과 담판을 지을 예정이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은 꿈에도 모른 채 빠르게 윈터와 메이딜리언 앞으로 다가온 델이 씩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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