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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78/150)

78화

두 사람은 곧 원래 일행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안 했군.”

얼마 걷지 않아 황태자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불쑥 윈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텁고 강인해 보이는 손을 윈터는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자 영 답답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찬 황태자가 직접 윈터의 손을 가져다가 반쯤 강제로 악수를 시켰다.

“어어.”

“델 블리크 칼로프다.”

눈을 깜박이던 윈터가 곧 짧게 무릎을 숙이며 인사했다.

“윈터 블라디미르입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인사는 그쯤하고 생략하지.”

“어머, 관대하셔라.”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집어치우고 용건만 간단히 하는 점이 꽤 비슷했다.

덕분에 칼로프의 황태자, 델은 슬슬 윈터가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소공작은 호위도 없이 여긴 웬일이야?”

사람들로 복작복작한 거리를 걸으며 델이 물었다.

설마 윈터가 처음부터 자신을 뒤쫓기 위해 황도에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었다.

윈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인지 알려 드리면 전하께서는 제게 뭘 해 주실 거죠?”

상대를 도발하는 것 같은 화법에 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원래도 호승심을 자극하는 상대를 재밌어 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무례는 눈감아 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윈터는 일부러 그의 궁금증을 유발했다.

“오호, 벌써부터 거래를 권하는 건가?”

그녀의 예상대로, 델은 꽤 흥미로운 듯 되물었다.

그러나 역시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굳이 내가 소공작의 행방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샐쭉 웃는 고양이 같은 얼굴이 퍽 얄미웠다.

“오늘 나온 일이 제법 중요한 일이었거든요.”

“거래로 걸 만큼?”

“네, 거래로 걸 만큼.”

순순히 긍정한 윈터가 말을 덧붙였다.

“조만간 황도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가문 내의 비밀인 일을 처리하러 나온 거거든요.”

칼리스타의 단주로서 길드의 업무를 처리하러 나온 게 전부였지만.

아직 세상에는 그녀가 칼리스타의 단주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이었으니까.

어쨌든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행히 델은 ‘가문 내의 비밀’이라는 단어에 제대로 꽂힌 것 같았다.

“그거라면 제법 구미가 당기는걸.”

“그런가요?”

“그래. 난 보기보다 인내심이 짧거든.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한발 앞서 알 수 있다는 건 꽤 좋은 미끼지.”

윈터는 델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말끝에 굳이 ‘미끼’라는 걸 언급한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소공작의 수법에 걸려들지 않겠어.”

역시나. 델은 이미 윈터의 수작쯤은 다 계산하고 있었다는 듯 슬쩍 발을 뺐다.

잔혹한 사막의 정치판에서 오랜 시간 살벌하게 굴러 온 황태자답게 눈치가 비상했다.

윈터는 크게 아쉬울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이 정도 술수에 넘어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넘어왔다면 더 실망했겠지.

“그럼 본격적으로 구경을 시작해 볼까?”

활짝 웃는 델의 미소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윈터를 조금 골려 줬다고 생각하고는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하여간 성격 한 번 좋다고 속으로 야유하며 윈터가 델을 제지했다.

“구경하시기 전에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셔야겠는데요.”

“응? 왜?”

당장이라도 앞으로 튀어 나갈 듯 드릉드릉하던 델이 고개를 갸웃했다.

윈터는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가급적이면 수행원들을 피해서 오래오래 황도 구경을 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렇지.”

“근데 그러기엔 전하의 복장이 무척이나 튀거든요.”

누가 봐도 서쪽 사막에서 온 사람처럼 이국적인 복장이었다.

뜨거운 햇빛을 막기 위해 몸을 둘둘 감싼 새하얀 로브와 장식만으로도 이미 황도에서 독보적으로 튀었으니까.

“다들 지나가면서 한 번씩 전하를 쳐다보고 있잖아요.”

“그건 내가 잘생겨서 그런 거 아니야?”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말에 윈터는 드물게 말문이 막혔다.

“아니, 뭐, 물론, 그렇기는 한데요…….”

지나가는 사람이 한 번씩은 돌아볼 정도로 델이 잘생긴 건 맞았다.

황자라는 지위를 빼 놓고도 이국적인 이목구비며 훤칠한 키, 로브에 다 감춰지지 않는 강인한 근육까지.

시원하게 씩 웃는 입매와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타인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흐응. 소공작도 날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하는구나?”

델의 새카만 눈동자가 매혹적으로 빛났다.

반사적으로 윈터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원래 도망치면 칠수록 쫓아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델은 윈터가 물러난 거리만큼 다가가 좁혔다.

“게다가 처음 만난 남자 옷부터 벗기려 들다니, 아주 대담한데?”

“그렇게 오해하시면 제가 아주 곤란한데요…….”

하하, 어색하게 웃는 윈터의 주먹에 슬슬 힘이 들어갔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한 대 갈겨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델은 딱 그 직전에 멈춰 서서는 허리를 굽혀 윈터와 시선을 맞췄다.

“그거 알아?”

“뭘요?”

“나 결벽증이야. 남이랑 살 닿는 걸 극도로 싫어하지.”

당연히 윈터가 수집한 정보에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짐짓 모른 척 코웃음을 쳤다.

“그럼 아까 이건 뭔데요?”

윈터는 델이 처음 자신을 제압하며 생겼던 목의 멍 자국을 가리켰다.

그걸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러게. 이상하게 그대는 괜찮단 말이야.”

그러나 그 말에 오히려 윈터가 멈칫했다.

어딘가 묘하게 플래그를 꽂는 듯한 대사였기 때문이다.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델이 속삭였다.

“어때, 소공작?”

“무, 뭐가요?”

“나의 첫 예외가 된 기분 말이야.”

“흐익.”

귓가에 낮게 가라앉는 음성에 소름이 쭉 끼쳤다.

제 귀를 붙잡고 괴상한 신음을 낸 윈터가 훌쩍 뒤로 물러섰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윈터의 반응에 델이 킬킬 배를 잡고 웃었다.

“푸핫. 아아, 미안하네, 소공작.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여성을 희롱하는 건 내가 신사답지 못했어.”

“눈에 고인 눈물부터 닦고 말씀하시죠.”

윈터는 한숨을 푹 내쉬며 델의 말을 받아쳤다.

유별난 성격에 대해 알고 있기도 했고, 그거에 대해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도 했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기가 쭉 빠졌다.

그래도 딱히 불쾌하지 않았던 것은, 말은 치근덕대는 듯해도 묘하게 담백한 델의 태도 때문이었다.

어디로 보나 진심으로 추파를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다시 한번 사과하지.”

두 손을 들고 물러서더니 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은 윈터가 짧게 응수했다.

“전하의 잘난 얼굴을 봐서 이번만 특별히 용서해 드리죠.”

“하핫, 미모도 인정받고 용서도 받으니 두 배로 기분이 좋은데?”

두 사람이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였다.

“전…… 아니, 델 님!”

저 멀리서부터 델과 비슷한 복식의 사람들이 우르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들을 보며 델이 짧게 혀를 찼다.

“쯧, 예상보다 빨리 찾았는데?”

“전하의 복장이 워낙 독특하니 금방 소문이 났겠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서쪽 사막 복식을 한 미남자를 봤냐고 묻는다면 누구든 델이 여기 있다고 알려 줬을 것이다.

“소공작 말대로 옷을 갈아입긴 했어야 했군.”

애초에 델이 본격적으로 잠행을 하고자 들었다면 그 또한 복식부터 갈아입고 얼굴도 가렸을 것이다.

어차피 황도 구경을 오래 할 생각도 없었기에 굳이 의상을 바꾸지 않았겠지.

엉덩이 가볍고 자유분방하고 뭐든 즉흥적인 황태자.

그게 델이 제니어스 제국에 보여 주고 싶은 자신의 대외적인 이미지였다.

저렇게 호들갑을 떨며 우르르 몰려드는 수행원들까지 황도 한복판에 나타났으니 못해도 반나절이면 제국에 칼로프의 황태자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짜하게 퍼질 것이었다.

“아무튼 오늘은 고마웠어.”

“별말씀을요.”

“다음엔 황궁에서 보게 되는 건가?”

“아마도요.”

수행원들이 가까워지는 동안 윈터와 델은 짤막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도 나랑 놀아 줄 거지?”

“기꺼이요.”

눈을 찡긋하며 너스레를 떠는 델의 말에 윈터가 픽 웃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전하와 저는 꽤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을 거라니까요.”

“흐음, 좋아. 다음에 만날 땐 그대가 가져올 상품을 기대하지.”

“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윈터의 자신만만한 말에 델의 눈빛이 달라졌다.

오늘은 그저 우연히 마주치게 된 블라디미르 소공작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곧 황도에 그녀가 칼리스타의 단주라는 사실까지 퍼져 나간다면 델의 수행원들이 한층 더 바빠질 것이다.

윈터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물어 와야 할 테니까.

“그럼 이만.”

델의 손을 잡아 이마에 댄 윈터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완전한 칼로프식 인사였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던 델이 곧 픽 웃었다.

“그대와 만날 다음을 기다리고 있겠네.”

생긋 웃은 윈터는 그대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델은 한참 동안 멀어진 윈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 *

델과의 짧은 대면 끝에 기운이 쭉 빠진 윈터는 터덜터덜 제 방으로 들어섰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 웃어도 델이 보이는 것만큼 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잔뜩 긴장한 탓이었다.

“……후우.”

“늦었네요.”

한숨을 푹 내쉬던 윈터가 우뚝 멈춰 섰다.

어둑한 방 안에 우뚝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메이……?”

익숙한 목소리에 윈터가 조심스레 묻자, 빛 아래로 메이딜리언이 걸어 나왔다.

“여긴 어떻게 왔어?”

“황궁 빠져나오기야 뭐, 저한테는 크게 어렵지 않아서요.”

윈터의 물음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메이딜리언이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갔던 일은 잘 마쳤…….”

평소처럼 대화를 이어가려던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싸늘하게 굳었다.

“이거,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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