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 *
“그래서, 결국 네가 칼리스타의 단주라는 걸 밝혔다는 거지?”
“으응.”
윈터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던 리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맞은 편에는 이미 윈터가 잔뜩 나른하게 널브러진 상태였다.
“상황이 꽤 볼만했겠는데?”
“뭐, 그런 셈이지. 당분간은 함부로 나대지 못할 거야.”
그동안 칼리스타를 통해서 의뢰했던 일의 배후가 자신이라는 게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리비우스는 지금 충분히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소득이 나름 짭짤했는데 아쉽게 됐네.”
우량 고객을 놓친 리어트가 아쉬운 척 입맛을 다셨다.
픽 웃은 윈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의 창을 열었다.
몸을 조금만 기울이면 황도 거리가 한눈에 보였다.
“그럼 곧 도착할 칼로프의 황태자는 어떻게 할 거야?”
“만나야지.”
“어떻게?”
윈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래만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리어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그가 스스로 정답을 내놓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윈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윈터가 확신을 주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여기에 나타날 거야.”
“황태자가? 아니, 대체 왜?”
제국에서 칼로프의 황태자를 환대하는 행렬을 열심히 준비 중일 텐데, 그걸 즐겨도 모자랄 황태자가 갑자기 왜 황도 한복판에 나타난단 말인가.
그보다 과연 윈터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도 의문이었으나, 워낙 어릴 때부터 윈터의 신통방통한 예지력을 많이 겪었던 리어트는 그런 사소한 문제는 뒤로 넘겨 버렸다.
“그 인간도 약간…….”
여전히 시선은 거리에 둔 채, 윈터가 적당한 말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황태자를 표현하는 데 이만한 단어가 없는 것 같았다.
“또라이거든.”
간단하게 칼로프의 황태자를 평한 윈터가 줄곧 기대어 있던 테라스에서 몸을 뗐다.
고개를 돌린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이만 가 볼게.”
“어딜? 황태자 만나러?”
“어어.”
“같이 갈래?”
리어트가 혹시나 싶어 물었으나 윈터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굳이?”
혼자 황태자의 뒤를 밟아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거기에 꼬리 하나를 더 붙일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
그걸 모를 리 없는 리어트도 픽 웃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난 그럼 이제 진짜 간다.”
힐끔 거리로 시선을 던진 윈터가 짧은 인사만 남기고 그대로 테라스 아래로 뛰어내렸다.
“조심해!”
놀란 리어트가 다급히 외쳤으나 윈터는 어느새 사뿐하게 착지해서는 태연하게 손만 살랑살랑 흔들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리어트가 작게 투덜거렸다.
“하여간, 매번 목숨이 한 열댓 개는 있는 사람처럼 굴지.”
이내 느슨하게 풀어졌던 리어트의 표정이 굳었다.
윈터는 심장을 어디 다른 데 두고 온 사람처럼 겁 없이 전면전을 치르고 있었지만, 누구나 그렇듯 그녀의 목숨도 하나였다.
리어트는 윈터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그동안 준비해 온 모든 것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자, 그럼 우리도 움직여 볼까?”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더니 그 안에서 속속들이 여섯 명의 인물들이 빠져나왔다.
“단주께서 시키신 일은 완벽하게 해야지. 안 그래?”
리어트의 보랏빛 눈동자가 소리 없이 접혔다.
그림자에서 나온 인물들이 대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숙였다.
날카로운 손톱이 일제히 그림자 위로 길게 늘어졌다.
* * *
한편 황도의 한복판으로 떨어진 윈터는 마치 좀 전까지도 그 길로 다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걸었다.
그러나 그녀의 날카로운 눈은 사람들 속에 숨어든 새하얀 로브를 놓치지 않았다.
“……찾았다.”
씨익 웃은 윈터는 기척을 죽인 채 로브의 주인을 따라 걸었다.
칼로프의 황태자를 맞이하기 위해 황도는 또 한 번 떠들썩해지고 있었다.
색색의 종이들로 장식한 거리를 살펴보느라 로브의 주인은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때때로 군침 도는 먹거리나 반짝이는 길거리의 장신구에 시선을 뺏기는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했다.
로브 속에서 흑요석을 박아넣은 듯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때때로 바람이 불어 그 안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햇볕 아래에서 그의 머리카락은 마치 사막의 모래와 같은 색으로 빛났다.
“……어?”
그때 느닷없이 로브의 주인이 골목 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나게 황도를 구경하던 인간이 대체 골목길에는 무슨 볼일이 있는가 싶었지만 윈터는 우선 황급히 그 뒤를 쫓아 달렸다.
“뭐지……?”
그러나 기껏 뒤따라간 골목길 어디에도 로브의 주인은 없었다.
윈터가 당황하는 사이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뒤늦게 기척을 감지한 윈터가 휙 몸을 돌렸지만 상대가 한 발 더 빨랐다.
“윽!”
어깨를 잡혀 그대로 몸이 돌려진 윈터는 퍽 소리가 나게 벽에 처박혔다.
단단한 팔이 윈터의 목을 누르며 움직임을 제압했다.
급습에 반격하기 위해 윈터의 손에 서서히 마력이 맺히던 순간이었다.
“너 뭐야?”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코앞에 새카만 눈동자가 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윈터가 황도 거리에서부터 줄곧 뒤를 밟았던 바로 그 로브의 주인이었다.
무의미한 반항을 멈춘 윈터는 잔뜩 목이 졸린 채 자기소개를 했다.
“……윈터, 블라디미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흠칫한 상대방의 팔이 느슨해졌다.
눈이 동그래진 로브의 주인이 대뜸 물었다.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자제가 왜 여기 있어?”
다행히 그도 블라디미르 공작가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제가 제압한 게 소공작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지만.
덕분에 압박은 한층 더 느슨해졌다.
“당신이 보여서요.”
“내가 누군 줄 알고?”
“어떻게 모르겠어요.”
너무 당연한 질문에 윈터는 픽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적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상한 데서 순진했다.
오늘 이 시간, 여기에 칼로프의 황태자가 나타난다는 것을 몰랐더라도 누구든 그를 봤다면 단번에 이곳의 제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모래색 금발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이런 특이한 옷까지 입고 다니는데 모르는 사람이 이상…….”
미리 준비해 뒀던 변명을 이어가던 윈터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놈의 황태자가 기껏 말을 시켜 놓고 전혀 집중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뭐 하세요?”
바싹 붙은 거리에서 킁킁대는 미남자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연히 골목 안으로 시선을 줬다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칼로프의 황태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너한테서 좋은 냄새 나.”
대체 뭘 말하는 건가 싶어 윈터도 킁킁대 봤지만 전혀 알 수 없었다.
칼로프의 황태자가 또라이인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의나 격식까지도 쥐뿔 모르는 인간이라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었다.
애써 한숨을 삼킨 윈터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마 입욕제 향인 것 같은데 시녀한테 알아봐 드릴게요.”
“아니, 그거 말고.”
칼로프의 황태자가 와락 미간을 구겼다.
“내가 입욕제랑 그것도 구분 못 할 것 같아?”
툴툴대는 말투와 달리 황태자는 팔에 힘을 풀고 뒤로 물러섰다.
그 잠깐 사이에 눌린 목이 뻐근했다.
무력이 대단하다더니, 눈 깜짝할 새에 자신을 제압할 정도면 과연 실력이 출중한 듯하다고 윈터는 생각했다.
“뭐, 아무튼 신원 확인은 됐고. 굳이 날 따라왔다는 건 나한테 얻어먹을 게 있어서겠지?”
적정 거리까지 물러난 황태자가 물었다.
벽에 기댄 느슨한 자세는 황족이 아니라 꼭 불량배 같았다.
그러나 윈터는 결코 그런 그를 얕잡아 보지 않았다.
자유분방하고 격의 없는 말투로 상대가 방심하도록 만드는 게 그의 수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행을 감행하면서까지 따라온 보람이 있었다.
최소 중상을 입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황태자가 제법 신사적이기도 했고.
거래에 대한 운은 띄울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윈터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꼭 얻어먹는다기보다는, 우리가 서로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모호하고 의미심장한 말에 황태자가 한쪽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는 뭐든 솔직하고 명확한 걸 좋아했다.
제니어스의 귀족들은 사교계 말투라느니 하면서 제법 간지러운 말들을 쏟아낸다고 듣기는 했는데.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건 그가 익히 들어온 제니어스 귀족들의 말투라기보다는 다른 쪽으로 익숙했다.
“그대는 귀족 영애가 아니라 꼭 장사꾼처럼 말하는군.”
제 턱을 쓸던 황태자가 윈터를 떠보듯 말했다.
얕은 도발에 윈터는 기꺼이 응해 주었다.
“전하께서는 왈패처럼 구시고요.”
어느새 벌겋게 부은 목을 가리키며 윈터가 씩 웃었다.
하룻밤만 지나도 새파랗게 멍이 올라올 것 같았다.
그 생생하고 되바라진 모습에 황태자가 킥킥 웃었다.
“좋아, 순순하지 않은 게 꽤 맘에 드는군.”
지금 황태자의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제니어스의 귀족이 윈터라는 게 작은 행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버릇처럼 턱을 톡톡 두드리며 뭔가를 고민하던 그는 곧 홀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럼 나랑 같이 가지.”
다소 즉흥적인 결정에 윈터가 움찔했다.
“어디를요?”
“황도 구경.”
“아니, 하지만…….”
“수하들이 걱정할 거란 말은 하지 마. 나도 내 한 몸은 지킬 줄 아니까.”
윈터의 말을 끊어 낸 황태자가 근엄하게 말했다.
선명한 그의 눈동자에서 사막 부족의 강인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까 한 방에 윈터를 제압한 걸 보면 마냥 허세 같지도 않고.
애초에 제 실력에 자신이 없었다면 황태자가 홀로 황도를 구경나올 리가 없었다.
짧은 고민을 끝낸 윈터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네. 그럼 안내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