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윈터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꾹 눌렀다.
지난 무투 대회 때 된통 깨진 뒤로 한동안 잠잠하더니 최근에 다시 슬슬 기어 나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알버트가 최근에 너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퍼뜨려 달라고 의뢰했던데.’
‘음? 알버트가 누구야?’
‘……너는 이제 네 사촌 이름 정도는 기억해라.’
리어트와의 대화를 짧게 회상한 윈터는 눈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알버트를 노려보았다.
최근에 그녀가 메이딜리언과 아스터, 두 황자를 농락한 희대의 악녀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던데 그게 다 저 주둥이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한 짓이 찔리기는 하는지, 윈터와 시선이 마주치자 알버트가 흠칫했다.
‘적당히 핑계 대고 거절할까?’
‘그럴 리가. 오히려 비싸게 받고 원하시는 대로 해 드려야지.’
물론 윈터는 크게 타격이 없었다.
오히려 리어트를 부추겨 평소의 배는 되는 금액을 받아내 뒷공작을 펼쳤다.
리비우스의 주머니에서 나왔을 자금은 착실히 윈터의 곳간을 불려 주었다.
‘애초에 이런 반응을 의도한 거였잖아? 원래 하려던 거 돈 받고 하면 더 기분 좋지.’
‘너는 진짜…….’
킬킬 웃으며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만들어내는 윈터를 보며 리어트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감탄인지 비난인지 모를 눈빛을 받았던 게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겉으로는 분노한 척하고 있지만 사실 오늘 윈터는 꽤 기분이 좋았다.
곧 허옇게 질릴 리비우스와 알버트 부자의 표정을 상상하면 더욱 그랬다.
“첫 번째 안건은 최근 섭정께서 공표한 후계 경합에 대한 건입니다.”
오늘은 매달 열리는 가문의 대회의 자리였다.
물론 원래라면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 수도 있는 화제였으나 하필 두 황자 사이에 윈터가 절묘하게 끼어 있는 상황이라서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항상 귀족들의 수장 격이었던 블라디미르 가문이 이런 식으로 전면에 나서서 후계 싸움에 덤비다니요.”
안건이 발표되기 무섭게 리비우스가 말문을 열었다.
“가주님께서도 동의하신 일인지 심히 의심스럽군요.”
그는 윈터가 마치 아주 천박한 짓을 하고 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리비우스의 곁에 둘러앉은 가신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 마디씩 얹었다.
“맞습니다. 이건 블라디미르답지 않습니다.”
“크흠, 아무래도 최근의 행보는 재고해 보심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맞는 일이지요.”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훼방을 놓는 인물들을 윈터는 유심히 살폈다.
공작과 꼭 닮은 금빛 눈동자가 자신들을 향하자 그들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윈터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알버트의 아버지인 리비우스였다.
“가주님께서는 어떠십니까?”
리비우스는 기세도 좋게 블라디미르 공작을 걸고넘어졌다.
“가주께서도 2황자를 지지하시는 겁니까?”
돌아가는 상황이 재밌다는 듯 픽 웃던 공작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윈터를 지지하네.”
가볍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묵직하게 내려앉은 말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 공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자가 바로 오필리아 블라디미르였다.
어린 시절부터 촉망받은 인재였고, 공작위 또한 어떠한 잡음 없이 이었으며 그 뒤로도 줄곧 귀족들을 대표해 왔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윈터를 자신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냥 싸고돌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신들은 오랜 경험으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공작은 명확하게, 2황자 메이딜리언이 아닌 윈터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때 윈터가 오른손을 들었다.
“이 상황에 이런 말을 꺼내서 좀 죄송합니다만.”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공작은 윈터에게 이미 이야기를 해 두었다.
‘나는 너를 지지한다. 하지만…….’
걱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또렷한 눈빛이 딸을 응시하고는 싱긋 웃었다.
‘가신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네 몫이야.’
당시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금 그녀가 꺼낼 말은 그 행동과 상반되는 말이었다.
“가문의 도움은 크게 필요 없습니다.”
윈터의 말에 가신들이 술렁였다.
리비우스 또한 예상치 못한 윈터의 말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오직 블라디미르 공작만이 윈터의 생각을 짐작한 듯 꾹 웃음을 참았을 뿐이었다.
윈터는 처음부터 가신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만한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이번 후계 경합은 가문과 상관없이 저 혼자 단독으로 나서겠습니다.”
오래전부터 생각한 일이었다.
메이딜리언을 황제로 만드는 일은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윈터의 그림에는 단 한 번도 블라디미르 공작가가 등장하지 않았다.
원작에서는 가문이 멸문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처음 계획을 짤 때부터 윈터는 가문의 지지는 전혀 계산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상관없었다.
굳이 블라디미르 가문의 재력이나 권력이 없어도, 윈터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얼마든지 메이딜리언을 황위에 올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후계 경합은 어디까지나 블라디미르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봐도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이쯤 되니 윈터를 불신하던 가신들도 슬슬 궁금증이 생겼다.
“아니, 그럼 대체 가문의 지원도 없이 어떻게 혼자 후계 경합에 참가한다는 겁니까?”
마침내 기다렸던 질문이 들어왔다.
윈터는 기다렸다는 듯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칼리스타랑 협업해서요.”
그 말에 리비우스가 움찔했다.
설마 가문 회의에서 칼리스타가 언급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두려운 것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의뢰들을 칼리스타에 요청해 왔는데, 갑자기 윈터가 칼리스타와 협업을 한다고 하니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알버트만은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칼리스타가 뭔데 널 도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리비우스가 황급히 제 아들을 말리려 했지만 알버트의 혓바닥이 더 빨랐다.
면전에 대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질문에도 윈터는 웃었다.
씨익 윈터가 미소 짓자 알버트가 움찔했다.
이제 그 또한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돕는 게 아니라 지시하는 거야.”
두 번째로 기다리던 질문의 등장에 윈터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의자에 등을 기댄 느슨한 자세에서 지배자의 면모가 물씬 풍겼다.
“칼리스타는 처음부터 내 것이었으니까.”
“뭐, 뭣?”
당황한 알버트가 되물었으나 윈터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아들을 말리던 리비우스마저도 어느새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윈터는 리비우스에게 한 번 더 확신을 주듯 시선을 던졌다.
흠칫한 리비우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으나 이미 굳어진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저, 정말 칼리스타가…….”
“소가주의 것이 맞습니까?”
“굳이 이런 걸로 거짓말할 필요는 없겠죠?”
가신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출범한 지 채 얼마 되지 않은 길드였으나, 처음에 소유주를 몰랐던 블라디미르 공작마저도 견제하려고 했을 만큼 칼리스타의 성장세는 매서웠다.
그런데 베일에 감춰져 있던 칼리스타의 단주가 다름 아닌 윈터였다니.
“그, 그렇다면 혼자 후계 경합에 참가한다고 한 것도…….”
“칼리스타의 단주라면 충분하겠지요.”
윈터의 자신감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가신들의 표정도 점점 굳어 갔다.
아직 몸 상태가 완벽하게 회복이 안 되었다는 말과 함께 리비우스 부자의 공작에 넘어갔던 이들은 특히나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들이 선택한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참가하시겠다고 하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윈터는 퍽 너그러운 척 말했다.
덕분에 칙칙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가신들도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윈터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안 그래도 어릴 적부터 ‘제국 절반의 황금은 블라디미르에게.’라는 격언을 듣고 자란 그녀였다.
처음 메이딜리언을 황위에 올리고자 결심했을 때부터 윈터는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잔뜩 웅크린 채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게다가 애초에 돈지랄은 그녀의 전문이었다.
도무지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저어, 소가주. 아까 대회의 때 말씀하신 것 말입니다만…….”
“요즘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칼리스타의 주인이시라니, 과연 대단하십니다!”
“어릴 적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벌써부터 수완이 엄청나시군요, 크흠.”
“소가주께서는 그러니까, 2황자 전하를 지지하신단 말씀이시죠?”
대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가신들이 윈터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황도에 복귀했을 때보다 더 북적거리는 것 같았다.
오늘부로 윈터가 칼리스타의 단주라는 사실이 널리 널리 퍼져 나갈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지지하는 메이딜리언의 위상도 같이 높아지겠지.
기회를 틈타 체면 불고하고 빌붙는 인간들은 질색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윈터도 기꺼이 어울려 주었다.
질투와 열등감에 휩싸여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젠장.”
바로 리비우스였다.
그는 윈터 곁에서 알랑방귀를 뀌고 있는 가신들을 보며 까드득 이를 갈았다.
기껏 펼친 자신의 회유책이 윈터의 한 마디에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다.
리비우스는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하는 윈터가 무척이나 못마땅했다.
“아버지, 이걸 이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알버트도 마찬가지였다.
촌구석에서 요양이나 하던 애가 갑자기 칼리스타의 단주라니,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 저희가 모르는 뭔가가 있습니다.”
보나 마나 블라디미르 공작이 제 딸을 위하는 마음으로 뒷공작을 펼쳐 둔 거겠지.
알버트가 흰 눈으로 윈터를 노려보며 속닥거렸다.
가볍게 코웃음을 친 리비우스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조만간 황도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