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50)

75화

눈물 젖은 촉촉한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반짝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메이딜리언의 손이 윈터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훅 거리가 가까워지고, 윈터가 어버버하는 사이에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낮췄다.

그때 윈터가 손을 올려 짝 소리가 나게 뺨을 때렸다.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아니었다. 제 뺨이었다.

“……아가씨?”

놀란 메이딜리언이 얼른 윈터의 손을 잡아챘다.

한 대 더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아직도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저,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아서.”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윈터가 중얼거렸다.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못 차린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윈터는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이 코앞에서 그걸 보고 있는데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줄 리가 없었다.

“윈터!”

평소와 다른 모습에 메이딜리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윈터는 다행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에 초점이 돌아온 그녀를 보고 메이딜리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윈터는 잡힌 손을 빼내고 메이딜리언을 밀어냈다.

잠시 입술을 삐죽이던 메이딜리언이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정신을 차린다는 둥 이상한 소리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하는 윈터의 심정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건 우회적인 거절이었다. 제 마음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메이딜리언은 잘 알았다.

깊게 숨을 몰아 내쉰 그는 여전히 허공에 멈춰 있는 윈터의 손에 이마를 기대고 중얼거렸다.

“고백 같은 거 안 할게요.”

“…….”

“아무것도 안 할게요. 그러니까…….”

“…….”

“그러니까 날 떠나지만 마요.”

윈터는 늘 메이딜리언에게 약했다.

지금도 축 처진 어깨를 보니 괜히 마음이 안쓰러워졌다.

그리고 자신이 더욱 노력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오늘은 우리 둘 다 멍청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자.”

잔뜩 시무룩해진 메이딜리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윈터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난 앞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한테 다 공유할게.”

사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다.

앞으로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동안의 윈터는 다소 독선적이고 통제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을 계기로 그녀는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처럼 해서는 메이딜리언에게 독이 될 뿐이라는 걸.

“비밀을 만들지도 않을게.”

차라리 모든 것을 공개하고 메이딜리언의 협조를 구하는 편이 빨랐다.

윈터의 태도가 달라진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메이딜리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황자는요?”

“응?”

“1황자랑은 이제 안 만날 거죠?”

다른 걸 다 떠나서 메이딜리언은 윈터와 아스터를 떼어 놓고 싶었다.

잠시 멈칫하던 윈터는 곧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1황자 전하랑 친구는 해도 약혼의 ‘약’자도 못 꺼내게 할게. 됐지?”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 제가 기대했던 말을 듣게 된 메이딜리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도 반짝이는 메이딜리언의 얼굴을 마주한 윈터가 움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해로운 미모였다.

“후, 날이 벌써 어두워졌네. 그만 가야겠다.”

황급히 시선을 피한 윈터가 얼른 문을 벌컥 열었다.

“곧 다시 연락할게. 그때까지 잘 지내고 있어야 해. 아, 알겠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윈터의 당부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메이딜리언이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려 했다.

그러나 윈터는 얼른 메이딜리언을 막았다.

“배, 배웅은 안 해 줘도 돼. 나 혼자 갈게.”

한사코 따라오는 것을 말리니 괜히 심술이 일었지만 메이딜리언은 애써 그런 기색을 감췄다.

아무래도 오늘 자신이 윈터를 너무 많이 괴롭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메이딜리언이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덕분에 윈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던 윈터는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지고 나자 그대로 휘청거리며 기둥을 붙잡았다.

“……미친.”

사실 그녀는 안에서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직도 정신이 혼미했고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아가씨.’

울면서 애원하는 최애라니.

다시 생각해도 머리가 아찔했다.

‘지금 키스하면…… 화내실 건가요?’

그 촉촉한 얼굴에 하마터면 승낙해 버릴 뻔했다.

“후우,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자.”

깊게 숨을 몰아 내쉰 윈터가 굳게 다짐했다.

* * *

얼마 뒤 크비누스가 공식적으로 후계자 경합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수면 위로 떠오른 1황자와 2황자의 경쟁에 황도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대체 무슨 과제를 낼까요?”

“으음.”

초조한 듯 책상을 두드리며 엘리슨이 중얼거렸다.

딱히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은 채 윈터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사실 앞으로 크비누스가 낼 과제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과제에 대한 정답지마저도.

그렇기에 이 싸움은 처음부터 아스터가 진 거나 다름없었다.

“내 예상엔 쓸데없는 소모전을 시킬 것 같네만.”

에른스트 후작이 진실에 가까운 추측을 했다.

윈터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도 크비누스는 의미도 없는 오락적인 형식이 강한 과제들을 냈었으니까.

에른스트 후작의 예상이 맞았다.

역사적으로 후계 경합은 황자들의 자질을 가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지하는 가문들의 경쟁이기도 했다.

크비누스는 무의미한 과제들을 내며 혼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이용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들었다.

이미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있던 윈터였지만, 새삼 열이 받았다.

“오히려 시간을 버는 거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슨의 말에 시선이 모였다.

“이제 크비누스의 실각을 준비해야죠.”

그러나 윈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더 있어야 해.”

그녀는 가장 적당한 시기를 가늠하며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 윈터를 보며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잠시 멈칫하던 엘리슨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저희에게 아직 말씀하지 않으신 게 있으십니까?”

윈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수를 줄이려면 아는 사람이 적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윈터는 가급적이면 미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런 윈터를 봐 왔던 엘리슨은 답답해도 꾹 참았다.

어차피 때가 되면 윈터가 스스로 밝힐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메이에게는 미리 말해 둘게.”

그런데 오늘은 윈터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던 에른스트 후작이 물었다.

“갑자기 왜?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이제 숨기지 않고 다 털어놓기로 했거든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윈터가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슨과 에른스트 후작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 * *

며칠 뒤 크비누스가 첫 번째 과제를 공개했다.

바로 칼로프 제국에서 방문하는 사절단을 접대하는 일이었다.

칼로프는 머나먼 서역의 사막에서 패권을 쥔 제국이었다.

동부의 제니어스와는 오랜 경쟁 체제였으나 최근 즉위한 황태자는 폐쇄적이던 사막 부족들 사이에서 젊은 지도자들을 위시로 한 신진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번 사절에는 다름 아닌 그 유명한 황태자, 델 블리크 칼로프가 포함되어 있었다.

“워낙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성격으로 알려져서 비위 맞추기는 좀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

준비해 뒀던 자료들을 메이딜리언 앞에 펼쳐 놓으며 윈터가 설명했다.

이번 과제는 칼로프 제국과 황태자를 잘 구슬려서 앞으로 있을 교역에 얼마나 많은 이득을 취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자기는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교역에서 떨어지는 콩고물만 얻으려는 크비누스의 심보는 여전히 언짢았다.

하지만 애초에 윈터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대비해 왔다.

어차피 이러려고 힘을 키운 거였으니까 크게 상관없었다.

“난 우선 이렇게 진행했으면 하는데, 어때?”

앞으로는 메이딜리언과 뭐든 함께 의논하기로 약속한 윈터였다.

그녀는 제 말을 그대로 지켰다.

꼼꼼하고 더없이 완벽하게 준비한 자료들이 메이딜리언의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막힘없이 이야기하는 윈터를 보며 메이딜리언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막연히 예상하던 것보다도 윈터의 수완이 더욱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런 걸 언제부터 준비한 거예요?”

도무지 단시간 내에 이뤘다고는 할 수 없는 방대하고 촘촘한 자료들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윈터는 솔직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그 말에 메이딜리언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곧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가요. 전 좋아요. 대신에…….”

길고 긴 보고서의 끝에 메이딜리언이 한 곳을 짚었다.

활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와락 미간을 찌푸린 그가 말했다.

“칼로프의 황태자를 유혹한다는 대목만 좀 빼죠. 어차피…….”

“쉿.”

윈터는 황급히 메이딜리언의 말을 막았다.

제 입에 닿은 손가락에 잠시 움찔한 메이딜리언이 금세 샐쭉 웃었다.

미인계에 넘어가지 않기로 다짐했던 윈터는 황급히 손을 떼어 내고는 속삭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 몰라?”

“처음 듣는데요?”

“……크흠, 아무튼. 주변에 눈이 많으니까 이건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는 거지.”

윈터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 메이딜리언이 깃펜으로 주욱 줄을 그었다.

“아무튼 이 계획은 안 돼요.”

“쯧, 알겠어.”

어차피 메이딜리언이 그 정도 훼방은 놓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이미 다른 대책까지 마련해 놨던 윈터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럼 이대로 진행할게.”

“좋아요.”

메이딜리언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윈터는 그저 정해진 대로만 진행하면 되는 계획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또 방해가 들어왔다.

“이건 유례없는 일입니다!”

다름 아닌 알버트와 리비우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