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150)

73화

경악한 윈터의 목이 끼기긱 녹슨 소리를 내는 듯 돌아갔다.

설마 저렇게까지 까칠한 아스터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원작에서는 늘 부드럽고 여린…….

‘오늘도 2황자가 우리 쪽 일을 훼방 놓는군요. 슬슬 거슬리기 시작하네요.’

‘크비누스를 해치우는 것만 아니면 그자와 손을 잡는 일은 없었을 텐데.’

‘설마 그런 식으로 후계 선발 과제를 해치울 줄이야. 발상의 전환이라고 좋게 표현해 줘야겠죠?’

아니, 잠깐만. 아스터가 정말 마냥 여리기만 한가?

소설의 주요 장면들을 떠올려 보던 윈터가 멈칫했다.

칸나의 시선에서는 어디까지나 부드럽고 선량한 황자님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대사들에서 알게 모르게 싸한 부분이 많이 느껴졌다.

원작이 칸나 시점으로 진행되었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린 윈터가 턱,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 뭐?”

물론, 아무리 그래도 원작에서 이미 인성 박살 난 걸로 유명한 메이딜리언을 따라올 수는 없었다.

최근에 윈터와 아스터가 엮이게 되며 부쩍 초조해진 메이딜리언은 평소보다 끓는 점이 낮아진 상태였다.

덕분에 메이딜리언은 금세 이빨을 드러내고 아스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원한다면 그때 못한 거, 마저 해 줄 수도 있는데 말이야.”

“또 수호 마법이라도 발동시키려고?”

메이딜리언의 협박에 아스터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대체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척 봐도 좋은 건 아니라는 건 알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을 듯 살벌한 분위기에 윈터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메이딜리언과 아스터 사이에는 절대적인 무력의 차이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윈터는 황급히 메이딜리언을 말렸다.

이러다가는 크비누스를 처치하기 전에 아스터가 먼저 메이딜리언의 손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2황자 전하, 그만하시죠.”

그러나 그 말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메이딜리언의 눈동자 속 초점이 흐려졌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고개를 돌리자 윈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메이딜리언의 머릿속에서는 다시금 베르무트로 가는 길목에서 일어났던 일이 악몽처럼 재생되었다.

자신이 생각 없이 날뛴 탓에 또다시 윈터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도,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활활 새파란 질투가 튀어 올랐다.

“제 앞에서 저자를 감싸지 마십시오.”

까드득 이를 갈며 낮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경고 같기도,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 같기도 했다.

그러나 윈터의 입장에서 그녀는 지금 아스터를 감싸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은 윈터가 다시금 메이딜리언을 만류했다.

“……메이.”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작게 속삭이는 제 이름에, 메이딜리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드득 놀라 저를 잡은 윈터의 손을 떼어냈다.

순식간에 멀찍이 떨어진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윈터를 밀어낸 손이 덜덜 경련하고 있었다.

제 나름대로 참는다고 참았는데, 윈터의 앞에서 그동안 보여 준 자신의 모습은 전부 엉망이었다.

그걸 자각하게 되자 메이딜리언은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전하?”

평소와는 다른 메이딜리언의 반응에 윈터가 조심스레 다시 그를 불렀다.

그러자 메이딜리언이 휙 고개를 들었다.

가늘게 떨리는 붉은 동공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 같더니, 그대로 그가 몸을 돌려 사라졌다.

“메이!”

놀란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뒤따라가려는데, 그런 그녀를 아스터가 잡았다.

순간적으로 아스터의 존재를 잊었던 윈터가 아차 싶어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이미 아스터는 윈터의 생각을 눈치챈 듯 쓰게 웃었다.

“2황자에게 가실 겁니까?”

윈터는 이번엔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자신을 마주한 청명한 금빛 눈동자를 보며 아스터는 제 앞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을 느꼈다.

이것이 바로 메이딜리언과 그의 차이였다.

아스터는 이 순간 명백하게 선 바깥의 사람으로 밀려났다.

“죄송해요, 전하.”

윈터는 기왕 대화의 물꼬를 튼 김에 아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오늘 2황자 전하의 언행은 주제넘은 일이겠지만,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꾸벅, 저를 향해 깔끔하게 숙인 머리에 아스터의 뺨이 굳었다.

“2황자 전하께서는 아직 궁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고, 어릴 적부터 말 못 할 사정들로 타인과 교류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으십니다.”

거기까지 말한 윈터가 잠시 숨을 골랐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언행이 없도록…….”

“그만.”

아스터가 손을 들어 윈터의 말을 멈췄다.

“더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윈터가 결코 자신의 사람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이런 식으로 확인받게 될 줄은 미처 몰랐지만.

뻔히 적혀 있는 답을 애써 모르는 체하며 아스터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가십시오.”

그러고는 제가 허락해서 윈터를 보내는 척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스스로 갈 수 있었지만.

상냥한 윈터는 그런 아스터를 향해 옅은 미소를 돌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

이미 제가 가야 할 길을 정해 놓은, 굽힘도 흔들림도 없는 곧은 등이 점차 멀어졌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스터가 소리 없이 고개를 떨궜다.

* * *

윈터는 어느 때보다 빨리 2황자 궁에 도착했다.

공식적으로는 첫 방문이었지만, 메이딜리언이 이 궁을 배정받은 그 순간 진작에 조사를 끝낸 뒤였다.

“그쪽은 본인 원래 하던 업무나 잘하시죠?”

“하,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를 개뼈다귀 같은 게!”

“뭐? 당신 말 다 했어?”

“다 안 했다, 어쩔래!”

이 심각한 상황에, 애석하게도 윈터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금방이라도 이마가 닿을 듯 얼굴을 맞댄 채 으르렁대고 있는 칸나와 아디엘이었다.

“오늘 어딜 가나 싸움판이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윈터를 발견한 칸나와 아디엘의 표정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밝아졌다.

“아가씨!”

“소공작 각하!”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와 잠시 이마를 짚고 있던 윈터는 일단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칸나, 오랜만. 아디엘 경도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예, 저는 뭐, 2황자 전하를 만난 뒤로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디엘은 제 출셋길을 열어 줄 사람은 메이딜리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첫발을 떼게 해 준 건 윈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에른스트 후작령에 있으면서 일행들을 통솔하는 모습도 그렇고, 메이딜리언이 윈터 앞에서는 꼬리 감춘 개처럼 얌전하고 온순해지는 모습을 익히 목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저도요, 아가씨!”

생각보다 화기애애해 보이는 분위기에 칸나가 질세라 끼어들었다.

자신과 윈터 사이에 칸나라는 불청객이 끼어들자 아디엘의 눈초리가 다시 사나워졌다.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다시금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윈터가 한숨을 삼켰다.

안 그래도 둘이 누가 호위를 주관하느냐를 가지고 잡음이 많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교통정리를 해 줘야지 싶었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다.

지금은 두 사람보다 메이딜리언이 먼저였다.

결국 윈터는 평소라면 시도하지 않았을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칸나와 아디엘을 봉합하기로 했다.

“아디엘 경.”

“넵.”

“늘 2황자 전하를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하하, 별말씀을요.”

아디엘은 보란 듯이 목을 꼿꼿이 세웠다.

칸나는 자신이 최고라며 칭찬해 주던 아가씨가 애먼 인간에게 감사를 전하자 서운함에 삐죽 입술이 나왔다.

그 뻔히 보이는 속을 모를 리 없는 윈터가 애써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내가 경황이 없어서 미처 소개를 못 했는데, 우리 칸나 좀 잘 부탁해요.”

그러나 곧 ‘우리 칸나’라는 말 한마디에 칸나의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아가씨가 ‘우리 칸나’라고 불러 주셨어!’ 하고 감격하며 금방이라도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릴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반대로 아디엘의 표정은 조금 낮게 가라앉았다.

윈터는 그런 아디엘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서며 속삭였다.

“경도 아시다시피 궁에는 2황자 전하의 사람이 몇 없잖아요? 평소에 워낙 요령이 없으시니까, 궁에 제 사람을 미리 좀 배치해 뒀어요.”

그렇다기엔 이미 착실히 2황자 궁을 장악한 것 같지만.

아디엘은 굳이 윈터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사실 윈터가 언급한 ‘제 사람’이라는 말에 칸나도 아디엘도 신경이 쏠려 있었다.

칸나는 공식적으로 자신이 윈터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이미 날아갈 듯 기뻐하는 중이었다.

반면에 아디엘은 윈터의 부드러운 경고를 제대로 알아들었다.

자신이 손수 2황자 궁에 꽂아 넣은 인물이니 쓸데없는 잡음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었으니까.

분명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던 제 출셋길이 조금 어둑해지는 걸 느끼며 아디엘의 표정도 칙칙해졌다.

“물론 2황자 전하가 자리를 잡고 나면 저는 더는 관여하지 않을 거랍니다. 그 뒤는 당연히 여기 계신 아디엘 경이 잘해 주시겠지요?”

“……예?”

그러나 뒤이어 나온 말에 아디엘의 눈이 커졌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머리는 윈터의 말을 한 템포 늦게 이해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눈엣가시 같은 칸나는…… 임시직이라는 뜻이었다!

비록 제 4기사단장이라는 한직에 있던 인물이라고는 하나 아디엘도 나름 궁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찰떡같이 제 말을 이해하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윈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고심해서 골라 넣은 인물다웠다.

“아무튼 앞으로 두 분의 활약을 기대할게요.”

“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저한테 맡겨만 주세요!”

윈터의 말에 서로 자신이 우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하는 얼굴로 칸나와 아디엘이 대답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윈터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2황자 전하는 지금 어디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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