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150)

72화

* * *

윈터는 아스터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이상한 일이군요.’

그래,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윈터는 대놓고 메이딜리언을 위해서 움직였다.

다들 새로 나타난 2황자와 황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윈터를 보며 흥미로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눈치 빠른 몇 명은 오늘 윈터와 아스터가 함께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고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떠나 아스터를 지지한다는 말이 터무니없는 헛소문이라는 것을.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윈터는 아스터에게 자신이 메이딜리언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아스터도 이미 그걸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윈터는 오히려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윈터는 아스터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본능에 따라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 순간 메이딜리언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아스터가 오히려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언급하고 나서야 윈터는 아차 싶었다.

‘당신이 내 옆에 남아 줘서 그런 걸까요?’

그런데 설마 거기서 그렇게 말할 줄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 윈터는 더없이 당황스러웠다.

얼핏 생각하면 고백처럼 들리는 아스터의 말이 무척이나 불길하고 오싹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윈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자꾸 이상한 데 플래그를 꽂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으아악.”

끝내 그녀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나일라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아가씨. 그러다 기껏 만진 머리가 다 망가지겠어요.”

황급히 다가온 나일라가 서둘러 윈터를 말렸다.

그러나 벌써 머리 곳곳이 삐죽 튀어나온 뒤였다.

하는 수 없이 나일라가 윈터의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길에 머리를 맡긴 채 윈터는 축 늘어졌다.

제 아가씨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영 침울하다는 것을 나일라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오늘 배 타고 야유회를 나가신다면서요?”

“으응, 그렇지.”

“어쩜, 낭만적이네요.”

아스터와 데이트하는 윈터를 상상하며 나일라가 흐뭇하게 웃었다.

힐끔 거울 너머로 그런 나일라의 표정을 알아차린 윈터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물었다.

“지금 설마 속으로 ‘어리던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자라서는…….’ 이런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왜 아니겠어요, 후후.”

윈터의 물음에 나일라가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작고 어리던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자라셨는지…….”

“으악. 하지 마.”

윈터가 민망함에 질색했다.

여전히 웃음기가 가라앉지 않은 얼굴로 나일라가 속삭였다.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세요.”

“으음, 뭐, 나야 늘 고민이 많지.”

윈터는 이리저리 눈만 굴릴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차마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일라는 늘 그런 윈터에게 당장 모든 걸 털어놓으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훌륭한 해답을 알려 주곤 했을 뿐이다.

“그럴 때는 오히려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솔깃한 듯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싱긋 웃으며 나일라가 대답했다.

“머리 말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거울 너머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면 생각보다 고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잖아요?”

비밀을 간직한 듯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뭔가에 홀린 듯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윈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흐음, 그런가?”

“그럼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나일라가 윈터의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윈터의 발악으로 엉망이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된 뒤였다.

마법과도 같은 솜씨에 윈터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우선은 데이트부터 다녀오셔야죠?”

“으응.”

그러나 데이트란 말에 윈터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오늘은 윈터와 아스터가 약속한 지 딱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윈터의 안색이 벌써 칙칙해졌다.

* * *

잔잔한 바람이 불어 윈터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기껏 나일라가 곱게 빗어 주었는데, 별 소용이 없겠네. 하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헝클어 놓은 것은 윈터의 머리카락뿐이 아니었다.

잔잔하던 물결 위로 바람이 지나간 자리가 일렁거렸다.

반짝이는 수면을 윈터가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때 아스터가 물었다.

깜짝 놀란 윈터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아스터를 돌아보았다.

예상외로 커다란 반응에 오히려 아스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제가 뭐, 이상한 걸 물어봤나요?”

“아뇨, 그건 아니고. 오늘만 두 번이나 들은 질문이어서요.”

곧 윈터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고민이 많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하하, 그렇군요.”

아스터도 여상한 대답만 내놓고는 꾹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처음 궁에서 마주했을 때처럼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실 이미 대답은 정해진 일이었죠.”

의외로 아스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이미 윈터가 내놓을 답을 짐작한 뒤였다.

묘한 죄책감과 미안함, 안타까움이 담긴 복잡한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그녀의 대답을 모를 수가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한 번 더 물어보긴 해야겠죠?”

옅게 미소 지은 얼굴로 아스터가 물었다.

“저와 함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윈터는 제게 내밀어진 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진작부터 알고 있던 답을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원작대로라면 없었어야 할 윈터, 자신이라는 변수 때문에 혹시라도 아스터가 그녀의 계산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그것이 그녀를 끝없는 고민 속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건 처음부터 이미 정해진 대답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다시 한번 죄송해요, 전하.”

“……역시, 그렇군요.”

아스터의 손이 힘없이 거둬졌다. 곧 굳게 주먹이 쥐어진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아스터의 속은 부연 흙탕물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그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우습게도, 자신도 모르던 질투가 또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애써 심호흡을 한 아스터가 감정을 가라앉히고는 물었다.

“그래도 친구는 계속해 주실 거죠?”

그 말에 윈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과는 달랐지만, 아스터다운 대답이었다.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곧 배가 멈췄다. 두 사람의 데이트도 끝이었다.

윈터가 먼저 편하게 내릴 수 있도록 아스터가 중심을 잡아 주는데, 누군가 윈터의 반대편 손을 잡았다.

익숙한 체온에 고개를 돌린 윈터가 그대로 굳었다.

“메, 메이……?”

워낙 당황한 터라 2황자 전하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도 망각해 버렸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오히려 그게 더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마중 나왔어요.”

“뭐? 아니, 잠깐…….”

작게 속삭인 메이딜리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형제 사이에 끼인 윈터가 반사적으로 아스터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메이딜리언이 한 발 더 빨랐다.

“으앗.”

“일단 내려서 말씀하시죠.”

그는 가볍게 윈터를 끌어당겨 사뿐히 뭍에 내려놓았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중심을 잡아 주려던 아스터는 윈터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텅 빈 제 손을 한 번 내려다보던 아스터가 픽 웃더니 뒤이어 배에서 내렸다.

다시 한번 이루어진 삼자대면에 궁인들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윈터가 얼른 메이딜리언의 옆구리를 툭 쳤다.

아까부터 그가 자신만 보고 있을 뿐 아스터는 본체만체했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는 메이딜리언이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누가 봐도 무성의한 태도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1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처음 본 사람이랑 인사를 나눠도 저것보다는 살가울 것 같았다.

어디로 보나 이부형제를 향한 인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메이딜리언에게 아스터는 윈터와 자신 사이에 낀 방해물이나 다름없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행히 경고하듯 이빨을 드러낸 살벌한 분위기에도 아스터는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 2황자. 근데 형제끼리 너무 사이가 멀어 보이는데, 말 편하게 하는 게 어때?”

생글생글 웃으며 건네진 말에 메이딜리언이 오히려 움찔했다.

놀란 건 윈터도 마찬가지였다.

황실 바깥에서는 어리숙하게만 보이던 아스터였는데 지금은 완전 전세가 역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아스터는 훨씬 더 여유로웠다.

오히려 메이딜리언이 뭐에 쫓기는 것처럼 초조해 보일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를 모를 리 없는 메이딜리언에게서 날카로운 반응이 되돌아왔다.

“멋대로 남의 사람 뺏어가 놓고 거리가 가까워지길 바라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일 아닌가?”

윈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생각보다도 메이딜리언의 반응이 아주 안 좋았다.

지금 둘이 합심해서 크비누스를 물리쳐도 모자랄 판인데, 메이딜리언의 반응은 철천지원수를 마주하고 있기라도 하듯 적대적이었다.

윈터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스터는 생각 외로 태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스터가 아는 메이딜리언은 늘 제게 이런 얼굴을 보여 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난처한 듯 쓰게 웃는 아스터의 얼굴에 윈터는 제가 대신 사과라도 할 생각으로 슬쩍 말문을 열었다.

“저, 1황자 전하, 그러니까…….”

그러나 윈터가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전에 아스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게. 뺏기지 않게 미리미리 잘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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