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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71/150)

71화

그 시선에 윈터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크비누스의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아스터의 파트너로 참석하는 걸 수락했는데, 설마 메이딜리언의 반응이 저럴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책봉식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뜻밖의 대치 상황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어머, 어머,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설마 1황자와 블라디미르 가문의 결탁을 2황자는 몰랐던 걸까요?”

“흐음,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저기서 왜 저러고 있는 거죠?”

사람들의 의문이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메이딜리언에게 아스터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윈터였다.

아닌 척 평소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메이딜리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미묘하게 안색이 창백한 걸 보니 어딘가 아픈 데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유심히 살피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메이딜리언의 행동이 남들이 보기에는 지옥의 삼각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아주 잘 어울리는군, 백작.”

세 사람의 대치 상황을 보고 있던 크비누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본인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크비누스의 곁에 있던 아르만 백작도 능숙하게 속내를 감춘 채 속닥거렸다.

“예. 아주 훌륭한 계책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윈터를 향하는 아르만 백작의 시선은 그리 곱지 못했다.

아스터에게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기회를 잡아 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백작은 아스터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남을 그럴듯하게 속이거나 유혹하기에, 그의 아들은 너무 물러터졌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르만 백작의 마음 한편에서 윈터를 향한 의심이 피어올랐다.

척 봐도 영악해 보이는 블라디미르 소공작이 왜 굳이 아스터의 장단에 어울려 주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치겠네.”

여러 생각들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 윈터는 작게 중얼거렸다.

무려 그렇게 기다리고 고대하던 메이딜리언의 책봉식인데 첫 단추부터 이상하게 끼워진 것 같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윈터가 잔뜩 눈에 힘을 줬다.

‘메이! 얼른 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고!’

지금 워낙 주목을 받고 있는 터라 대놓고 뭐라고 말은 못 하는 상황이니, 텔레파시라도 쏘려는 심산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줄곧 윈터를 바라보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빠르게 반응했다는 것이었다.

‘아가씨도 절 사랑하신다고요? 저도 그래요.’

“……아니, 뭐?”

아무래도 텔레파시가 잘못 전달된 것 같았다.

뭘 신나게 오해한 것인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가 싱긋 웃더니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는 메이딜리언의 뒷모습을 보며 윈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마치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아.”

부쩍 피곤해진 윈터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탱하고 있던 아스터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쓰게 웃은 윈터가 처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 책봉식이 시작되었다.

신 앞에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황가의 핏줄이 하나 더 나타났음을 알리고, 제단에 불을 피웠다.

메이딜리언의 피가 섞인 성수가 신관의 기도와 함께 푸르게 타올랐다.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몸을 숙이고 있는 메이딜리언의 머리 위로 작은 왕관이 올려졌다.

“이로써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 그대를 제국의 2황자로 임명한다.”

크비누스가 엄숙하게 선언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예배당 안의 귀족들이 박수를 쳤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메이딜리언이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단상을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잠깐.”

크비누스가 메이딜리언을 불러 세웠다.

허공에 펼쳐진 크비누스의 손에 맞춰, 박수 소리가 우뚝 멈췄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손뼉을 치던 윈터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다들 모인 김에 중대한 발표를 하나 할까 하는데.”

비식 웃으며 꺼내는 말에 메이딜리언이 다시 몸을 돌렸다.

미리 신호라도 주듯 아르만 백작 또한 아스터에게 힐끔 눈짓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모이자 크비누스가 입을 열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2황자도 있으니, 둘 중 누가 차기 황위를 이을지 정해야 하지 않겠나?”

“……설마.”

크비누스의 말에 윈터의 눈이 커졌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원작과 흐름이 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설마 책봉식에서 이걸 발표할 줄은 몰랐는데.

“조만간 황태자 경합을 열겠다.”

황태자 경합.

그 단어만으로 장내에 소란이 일었다.

수면 아래에서 불안하게 일렁이던 화제가 드디어 전면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황태자 경합이라니!”

“벌써 진행하는 건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섭정께서 누구에게 무게를 두고 있는지 알 것 같군요.”

“설마 그걸 2황자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말과 눈빛, 손짓이 여러 번 오고 갔다.

그 사이에서 메이딜리언과 아스터의 시선이 짧게 맞부딪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리는 이만 가죠.”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던 아스터가 말했다.

그러나 윈터는 선뜻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도 지지자들이랑 말해 봐야 하지 않나요?”

멈칫하며 꺼낸 말에 아스터가 쓰게 웃었다.

“그들이 누구에게 갔는지 보세요.”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오른쪽으로 향했다.

황태자 경합이 발표되자마자 몇몇 무리들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중 한 무리가 바로 저기에 있었다.

1황자인 아스터가 아닌, 아르만 백작 주위에.

“……나는 아버지가 싫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아스터가 작게 고백했다.

그런 그의 옆얼굴이 더없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원작에서는 이럴 때마다 칸나가 위로하고 지지해 줬겠지만, 지금 아스터의 곁에는 칸나조차 없었다.

덕분에 윈터는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만 가요, 전하.”

아스터를 잡아끌며 윈터가 말했다.

그런데 예배당을 나가려는 두 사람을 메이딜리언이 가로막았다.

이미 기척을 감지하고 있던 윈터는 놀라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인사를 올렸다.

“2황자 전하, 책봉식을 무사히 마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러나 정작 메이딜리언은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대뜸 말했다.

“나랑 같이 가요.”

윈터의 앞으로 그의 손이 내밀어졌다.

메이딜리언은 오로지 윈터만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애석하게도, 윈터의 시선은 메이딜리언을 향해 있지 않았다.

메이딜리언의 뒤로 에른스트 후작을 필두로 한 2황자의 지지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들은 윈터가 엘리슨과 며칠 동안 밤을 새워 골머리를 앓으며 골라 놓은 인물들이었다.

황위를 위해서라면 메이딜리언에게 꼭 필요한 자들.

저들과의 결속을 단단히 다져 두려면 첫인상부터 신중하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그러니 메이딜리언은 오늘 여기서 아스터보다 빛나야 했다. 반드시.

“아니요.”

그래서 윈터는 메이딜리언의 손을 피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 메이딜리언의 눈이 커졌다.

“저는 오늘 파트너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전하도 전하의 의무를 다해 주세요.”

윈터가 담담하게 말했다.

마침 타이밍도 좋게 에른스트 후작이 뒤에서 다가왔다.

“2황자 전하.”

에른스트 후작과 짧게 눈인사를 나눈 윈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가시죠, 전하.”

“네.”

아스터도 순순히 윈터를 따라 예배당을 나왔다.

윈터는 머릿속에서 지금 상황을 몇 번이고 되감아 보며 치밀하게 계산했다.

이미 신전에서 친자 증명까지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크비누스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메이딜리언의 정당성을 의심하도록 여론을 부추길 것이다.

그러나 윈터는 고작 그런 데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사교계에 ‘과연 2황자는 자격이 있는가’로 메이딜리언이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으려면 다른 화제가 필요했다.

그럴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역시 남녀 간의 애정 다툼 같은 게 시선을 끌기 좋았다.

‘블라디미르 소공작이 1황자와 약혼을 한다네요?’

‘그럼 2황자는 어떻게 되는 거죠?’

‘글쎄요. 둘이 무투 대회도 출전할 만큼 끈끈한 사이 아니었나요?’

‘어쩜. 2황자 전하도 가엾네요.’

이런저런 소문들로 뒤덮이다 보면 곧 메이딜리언의 뿌리나 출신 같은 화제는 잠시 사그라들 것이다.

그런 것보다야 치정 싸움 쪽이 훨씬 재밌고 자극적일 테니까.

그 사이 윈터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빠르게 진행할 예정이었다.

“……전하?”

예배당을 빠져나온 윈터는 아스터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하, 혹시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신가요?”

그런 그를 살피며 윈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아스터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뭐가요?”

“당신이 왜 2황자를 밀어냈는지 압니다.”

그 말에 윈터가 움찔했다.

처음부터 약혼을 거절할 생각이라고 했던 윈터였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과 친밀한 척 함께 움직이는 윈터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터는 그저 묵인했다.

“저기에 남을 2황자보다 내가 훨씬 한심해 보일 거라는 것도 알고요. 근데…….”

아스터는 윈터가 철저히 메이딜리언을 위해 움직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윈터가 탐이 났다.

메이딜리언을 거절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윈터가.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윈터는 자신과 함께 예배당을 나왔다.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습니다.”

아스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그가 곧 희미하게 웃었다.

윈터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반짝였다.

“당신이 내 옆에 남아 줘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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