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0/150)

70화

* * *

사실 어제 윈터는 리어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봤어요? 쫓아오는 사람 없어요?”

벽 뒤로 숨은 윈터가 다급하게 아스터에게 물었다.

“헉, 없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헉헉대며 숨을 고르던 아스터가 간신히 대답했다.

그렇다. 두 사람은 오늘 시종이나 호위를 전부 물리고 몰래 도망치기로 했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매번 자기들을 감시하며 오늘 나눈 대화들을 죄다 일러바치는 시종들이 거슬리기는 했었다.

덕분에 오늘은 아주 잠깐이지만 일탈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전하, 나중에 코델리아 부인에게 혼나는 건 아니죠?”

“아아, 큰일이네요. 코델리아가 화내면 무서운데.”

작은 농담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요 며칠 대화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처음의 어색함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윈터는 소설 속에서 마냥 긍정적이고 해맑던 햇살 같은 황자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꽤 즐거웠다.

아스터는 타고난 성정이 유약하기는 해도 선황 미쉘라의 핏줄이 확실했다.

어떤 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기도 했으니까.

오늘 몰래 도망가 보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아스터였다.

‘잠깐이라도 저 눈들이 없는 데 있어 보고 싶네요.’

칼리스타에서 보내 주는 정보들을 수집하던 윈터는 요즘 잠정 휴식 상태였다.

돌아다니는 소문들이 전부 자신에 대한 헛소문과 추측들이었으니, 알아도 별로 도움이 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불만을 담아 중얼거리자, 뜻밖에도 아스터가 제안했다.

‘그럼 내일은 도망칠까요?’

놀란 윈터를 보며 아스터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 비밀 통로를 하나 알거든요.’

‘……그걸 저한테 알려 주셔도 괜찮은 거예요?’

‘소공작은 날 해치지 않을 거라면서요?’

그건 그렇지. 아스터는 해치지 않겠지만, 크비누스는 해치고 싶은데.

윈터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네, 그럼요. 당연하죠.’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오늘 시종들의 눈을 피해 도망쳤다.

도서관에서 조용히 책을 읽겠다며 호위도 시종들도 전부 밖으로 내보내고, 두 사람은 사방이 조용해질 때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스터가 윈터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거대한 도서관을 제집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마침내 두 사람은 책장과 책장 사이, 얼핏 보면 반들반들한 벽처럼 생긴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

‘이건 언제 발견하신 거예요?’

‘어릴 때요. 혼자 숨바꼭질하다가 알아냈어요.’

혼자서 숨바꼭질이라니.

아스터의 외로운 어린 시절을 짐작하며 윈터는 잠시 숙연해졌다.

그러나 통로를 여는 아스터의 표정이 너무 밝아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은 그렇게 시종들의 눈을 피해 통로를 지나쳐 바깥으로 나왔다.

그들 말고 비밀 통로를 통해 나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아는데도, 도망친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열심히 달려 통로를 빠져나왔다.

“어릴 때도 이런 일은 안 해 봤는데요.”

지나다니는 궁인들을 피해 몰래 예배당으로 들어선 아스터가 중얼거렸다.

예배당의 커다란 창문을 보며 감탄하던 윈터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커서 해 봐야죠.”

그러자 아스터가 또 한 번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공작이 아니었다면 평생 이런 일은 시도할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으음, 왠지 제가 전하에게 안 좋은 물을 들이는 것 같은걸요.”

그렇게 말하며 윈터가 눈을 찡긋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예배당을 거닐며 구경했다.

아스터에게는 이제 딱히 특별할 일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윈터는 처음이었으므로 그는 충실한 가이드가 되어 예배당 곳곳을 안내했다.

색색의 유리로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부터 먼지 하나 없이 잘 관리된 반질반질한 대리석 제단, 그리고 신의 상징이라고 불린다는 만타라스 꽃이 장식된 예배당은 척 봐도 화려했다.

“신전에서 왜 좋아했는지 알겠네요.”

윈터의 직설적인 말에 아스터는 웃다 사레가 들려 콜록콜록 기침했다.

놀란 윈터가 아스터의 등을 쓸어 주던 그때, 두 사람의 뒤로 그림자가 졌다.

인기척이라곤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터라 놀라서 돌아본 윈터와 아스터는 그대로 끼룩 굳었다.

거기에는 언제 왔는지도 모를 메이딜리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메, 메이?”

너무 놀란 윈터는 반사적으로 아스터와의 거리를 벌렸다.

어쩐지 부정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그녀의 행동에 아스터의 표정은 굳었고, 메이딜리언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둘이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을 때는 분노로 시야가 벌겋게 물드는 것 같았다.

어제 아스터의 도발에 대한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윈터가 아스터와 조금 거리를 벌린 것만으로도 메이딜리언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여기 계셨군요?”

덕분에 메이딜리언은 퍽 다정한 척 말을 건넬 수 있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던 윈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올렸다.

그러나 작게 웃음을 터뜨린 메이딜리언은 윈터의 인사를 물렸다.

“둘이 있을 때는 지금처럼 그냥 메이라고 부르세요.”

둘만 있기는 개뿔.

옆에 멀쩡히 서 있는 아스터는 완전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윈터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만 굴렸다.

원작에서도 칸나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지며 메이딜리언이 저런 반응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직 그런 상황도 아닌데 왜 저렇게 아스터에게 적대적인 거지?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모종의 대화가 있었던 것 같다고 윈터는 짐작했다.

“조만간 여기서 황자 책봉식을 거행할 거예요.”

메이딜리언은 오늘 제가 예배당에 들른 이유부터 밝혔다.

아직 한산하기만 한 예배당이었다.

덕분에 윈터는 제 예상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비누스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아직까지 책봉식은커녕 황자로 입적하는 부분도 미적거리고 있었다.

물론 그것도 오늘까지겠지만.

오후에 열릴 귀족 회의에서 에른스트 후작이 황자 입적과 책봉식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의할 계획이었다.

“축하해 주러 오실 거죠?”

고개를 모로 기울인 메이딜리언이 물었다.

윈터가 뒤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황자 책봉식을 한다는 말에 예배당까지 왔다가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 공간을 보고 메이딜리언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갑자기 그가 한없이 안쓰러워진 윈터가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럼요. 당연하죠.”

크비누스가 오지 말라고 해도 부득불 쫓아갈 계획이었다.

메이딜리언의 책봉식인데, 윈터가 빠질 리가 없었다.

“꼭 갈게요!”

그리고 윈터는 제 말을 지켰다.

메이딜리언의 책봉식에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참석한 것이다.

문제는…….

“어머, 저기 두 사람 좀 보세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게 정말인 걸까요?”

“흐음, 의외로 둘이 잘 어울리는데요?”

“과연. 블라디미르 공작가는 대단하네요.”

윈터가 아스터의 파트너로서 책봉식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내 팔자야.”

다 들리게 수군거리는 목소리에 윈터는 조용히 한탄했다.

옆에 있던 아스터가 움찔하더니 작게 속삭였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네, 이 자리가 전부요.

속으로는 시원하게 대답한 윈터였으나 차마 마음 약한 황자님에게 그대로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생긋 웃으며 둘러댔다.

“아, 구두가 조금…….”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새 구두가 조금 덜 다듬어졌는지 뒤꿈치를 아프게 긁어 놓았기 때문이다.

“제가 잠깐 봐 드릴까요?”

“전하께서 제 발을요?”

아스터의 물음에 윈터가 기겁했다.

“그냥 우리는 오늘 그림처럼 가만히 있죠.”

입을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빠르게 속삭이는 말에 아스터가 쿡쿡 웃었다.

“네, 그럴게요.”

오늘 누구보다도 눈에 띄게 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덕분에 윈터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돌아볼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시선을 끌면 곤란했다.

“그럼 저한테 좀 더 기대어 서세요.”

아스터가 제 팔 한쪽을 내밀며 말했다.

윈터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 그를 거절해도 곤란하고, 더 다정한 모습을 연출해도 곤란했다.

그녀는 잠시 아스터를 올려다보았다.

사랑스러운 분홍빛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황자님이 기대에 가득한 눈빛을 제게 보내고 있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결국 윈터가 졌다.

도저히 아스터를 외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 팔에 닿는 체온에 아스터의 귓가가 조금 붉게 물들었다.

누가 봐도 막 풋풋한 연애를 시작한 연인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웅성거림은 한층 더 커졌다.

윈터의 인내심이 거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쯤, 다행히 책봉식이 시작되었다.

윈터와 칼리스타의 철두철미한 계획. 그리고 블라디미르 공작가와 에른스트 후작가의 합작으로 귀족 회의에서 메이딜리언의 책봉식 일정과 황자 입적이 빠르게 결정되었다.

쓰임을 다한 타이그는 그날 황궁에서 돌아오는 길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 2황자 전하이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예배당 끝에서 메이딜리언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평소에는 차분하게 내리고 있던 머리를 시원하게 올려 고정한 덕분에 오늘따라 안 그래도 아름다웠던 얼굴이 더욱 반짝였다.

근육이 알맞게 붙어 길고 늘씬한 몸과 유려하게 그린 듯 섬세한 이목구비에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긴장한 기색 하나 없이 단상을 향해 가던 메이딜리언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곧 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했다.

그 끝에는 아스터와, 그의 팔에 기대어 서 있는 윈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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