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50)

69화

안에는 재클린과 올리비아라는 짤막한 이름만 적혀 있었다.

“예에, 알겠습니다.”

일단 메이딜리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한 칸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 넓은 궁에서 대체 재클린과 올리비아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저기요.”

결국 그녀는 지나가는 시녀 하나를 붙든 채 물었다.

“재클린이랑 올리비아가 누구입니까?”

“네? 재클린이랑…… 올리비아요?”

처음엔 영 낯선 듯 고개를 갸웃하던 시녀가 금세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건 시녀장님이랑 시종장님 이름인데요?”

“네에?”

놀란 칸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메이딜리언 그 인간은 그냥 2황자 궁의 관리인을 데려오라고 하면 될 것이지 뭘 굳이 또 이렇게 이름만 달랑 적어서 시킨단 말인가.

“하여간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윈터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벌써 문짝을 뻥 차고 성질을 부렸을 거라며 칸나가 툴툴거렸다.

그러나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이었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칸나는 성실하게 시녀장과 시종장을 찾아냈다.

“올리비아 시녀장님?”

“네.”

“그리고 재클린 시종장님?”

“그런데요?”

“2황자 전하가 부르십니다.”

메이딜리언이 부른다는 말에 올리비아와 재클린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칸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금방 가지요.”

허리를 바로 세운 올리비아가 말했다.

곁에서 재클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칸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태 차를 마시며 한가롭게 담소나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인데.

2황자가 부른다는 말에 당장 일어나기는커녕 미적거리고 있다니.

“황자 전하께서 지금 당장 두 분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윈터에게 거의 세뇌되다시피 달달 외운 <곤란할 때는 이렇게 행동하세요!> 라는 황궁 생활강령을 떠올린 칸나가 재차 말을 꺼냈다.

표정을 조금 찌푸린 그녀를 보던 올리비아와 재클린이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시종일관 시선을 마주하며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칸나는 두 사람을 앞세워 메이딜리언이 있다는 집무실로 향했다.

“전하, 두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칸나가 문을 두드리며 그렇게 말했다.

곧 안에서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무료한 듯 창밖을 보고 있던 메이딜리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수고했어. 넌 그만 가 봐.”

“……예? 예, 알겠습니다.”

남들 앞에선 가급적 메이딜리언의 말에 토 달지 말고 지시에 응하기.

윈터가 최우선으로 강조하던 말을 떠올린 칸나가 순순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영 석연치 않다는 듯 찌푸려진 상태였다.

“아까 분명히…….”

이미 닫힌 문을 돌아보며 칸나는 메이딜리언을 만나기 직전 재클린이 중얼거린 말을 떠올렸다.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했지……?”

보통 그런 말을 할 때는 별일이 생기곤 했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가 염려스러운 마음에 칸나는 결국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대로 집무실 앞을 지켰다.

* * *

칸나가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가자, 메이딜리언이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척 봤을 때도 늘씬하게 균형 잡혀 있던 몸이, 자세를 바로 하자 한층 더 건장하고 위협적인 느낌을 풍겼다.

화려한 외양과 달리 금방이라도 상대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에 올리비아와 재클린은 자신들도 모르게 긴장했다.

“앞에 있는 걸 열어 봐.”

메이딜리언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이 오기 전부터 집무실 한복판에 놓여 있던 상자를 가리켜 보였을 뿐이었다.

서로의 눈치만 보며 눈을 굴리던 올리비아와 재클린은 주춤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흐, 흐아아악!”

“꺄아악!”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새된 비명을 질렀다.

상자 안에는 사람의 잘린 머리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집무실을 울리는 비명에도 메이딜리언의 표정은 여전히 지루하기만 했다.

그는 몸을 낮춰 작게 속삭였다.

“쉬잇.”

“흡, 흐읍.”

잔뜩 겁에 질린 올리비아와 재클린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상자 안을 잘 봐. 익숙한 인물들이지 않아?”

이번 베르무트 행에 참가했던 시녀와 기사였다.

표면적으로는 메이딜리언의 수발을 들고 호위하기 위한 인물이었겠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것도 익숙하지?”

새카만 오닉스와 비슷한 모양의 단추였다.

그 곁에는 메이딜리언의 옷에 촘촘히 달려 있던 장식물도 놓였다.

가장 마지막에 놓인 것은 리어트의 손에서 박살 났던 마도구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윈터를 괴롭히던 원인.

윈터도 없는 궁에서, 메이딜리언은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먼 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배후가 누구인지는 이미 알아.”

보나 마나 크비누스나 아르만 백작의 끄나풀이겠지.

황도로 오기 전 메이딜리언은 엘리슨에게 2황자 궁에 배정된 인물 중 요주의 인물들을 골라내라고 지시했다.

눈에 안 보이는 잔챙이들은 제외하고, 잃을 것도 많고, 그래서 두려움도 많고, 설득 아닌 설득이 먹힐 만한 자들로.

그래서 나온 게 바로 올리비아와 재클린이었다.

2황자 궁의 살림을 담당하는 두 사람이 모두 크비누스의 수족이라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곧 아니게 되겠지만.

“쉽게 결정할 수 있도록 선택지를 줄게.”

메이딜리언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하나는 지금처럼 지내다가 저 상자에 똑같이 박제가 되는 거고.”

“우욱.”

“다른 하나는, 내게 얌전히 협조하는 거야.”

상자의 인물들과 본의 아니게 눈이 마주친 올리비아가 헛구역질을 했다.

메이딜리언은 더없이 상냥한 얼굴로 대답을 종용했다.

“어떤 걸 선택할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저, 전하를…… 따르겠습니다.”

재클린이 덜덜 떨며 말했다. 올리비아 또한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재클린과 나란히 무릎을 굽혀 앉은 상태였다.

“잘 생각했어.”

역시, 남을 지배하는 데는 공포만큼 유용한 게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메이딜리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노을에 흠뻑 물든 붉은 미소가 악마처럼 빛났다.

* * *

한편 물밑에서 활동을 시작한 사람은 메이딜리언뿐만이 아니었다.

“준비는 다 마쳤지?”

칼리스타에 방문한 윈터는 바쁘게 서류를 검토하며 오랫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 하나를 마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응, 타이그도 내일쯤 황궁에 방문하도록 했고, 조세핀 가문의 증언도 확보했어.”

어릴 적부터 메이딜리언을 학대하던 그 몹쓸 마구간지기를 드디어 써먹을 때가 왔다.

그자가 제가 겪은 이야기를 내일 귀족 회의에서 발언하면 블라디미르 공작가와 에른스트 후작가를 위시로 한 다른 귀족들이 메이딜리언의 책봉식을 앞당기자는 제안을 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이미 친자 증명까지 마친 마당에 굳이 이렇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윈터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메이딜리언이 태어났던 당시 그를 황궁에서 빼돌렸던 시녀 조세핀의 가문에서도 어렵게 증언을 요청해 서면으로 작성해 둔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당연하지. 아무리 크비누스라도 책봉식을 미루겠다는 얘기는 못 할 거야.”

원작에서도 크비누스는 메이딜리언에게 아직까지 의구심이 남는다며 여러 가지 의혹을 제기했다.

물론 크비누스는 뒤에서 부채질만 하고, 불을 붙인 건 아르만 백작이었지만.

신전에서 아무리 친자 증명을 마쳤다고 하나 그 이후는 인간의 일이었다.

정치질로 잔뼈가 굵은 귀족들을 에른스트 후작가와 메이딜리언이 상대하느라 꽤 애먹었었지.

심지어 그때는 이미 메이딜리언이 블라디미르 공작가를 멸문시킨 뒤였기 때문에, 혹시 자신들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 귀족들의 반발감이 심하던 때였다.

“으으.”

원작대로 갔다면 지금쯤 세상에 없었을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윈터가 몸서리쳤다.

아무튼 윈터는 이번에도 크비누스가 책봉식을 준비하는 데 차질이 생겼다 어쩐다 하면서 메이딜리언을 정식 황자로 입적시키는 일을 차일피일 미룰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시간이 없어 죽겠는데, 윈터는 크비누스의 고의적인 게으름을 기다려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요즘 데이트는 어쩌고 있어?”

“그냥저냥.”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서류를 검토하며, 리어트가 슬쩍 물었다.

조세핀의 가문에서 나온 증언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윈터가 대답했다.

“은근히 공통점이 많더라고.”

어릴 적부터 몸이 병약했던 터라, 윈터와 아스터는 가히 혼자 놀기의 달인들이었다.

혼자서도 잘 놀던 사람들이 둘이나 있으니 책과 문화, 정세에 이르기까지 그냥 앉아서 수다만 떨어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흐응, 꽤 재밌나 보네.”

그리 나쁘지 않은 윈터의 표정을 보며 리어트가 입술을 삐죽였다.

윈터는 그저 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친구를 사귀는 건 늘 즐겁지.”

과연 아스터도 윈터와 같은 마음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속으로 심술 궂게 덧붙인 리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일은 어디 가기로 했어?”

“으음, 아마 예배당일걸?”

“그 커다랗게 새로 지은 건물 말하는 거야?”

“맞아.”

크비누스는 원래 후계 싸움에서 밀려나고 종교에 귀의했던 자였다.

추기경까지 올랐던 그는 선황 미쉘라가 죽고 나자, 마땅한 후계가 없다는 이유로 환속하고 섭정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국가의 재난적인 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속세로 나와야 했지만 아직도 신을 기리는 신실함은 사라지지 않았다나 뭐라나.

실제로 크비누스는 현재 자식은커녕 부인조차 없었다.

게다가 신을 기리는 마음으로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서 황궁 안에 있던 예배당을 증축하기까지 했다.

신전에서 그 일을 두 손 들고 반겼음은 물론이었다.

“볼 것도 많고 좋겠네. 가서 재밌게 놀다 와.”

생긋 웃은 리어트가 말했다.

어딘지 뼈가 있는 말투였으나 서류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던 윈터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응, 그럴게.”

덕분에 리어트는 애꿎은 입술만 삐죽거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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