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50)

68화

* * *

한편 알현실을 나온 메이딜리언은 저를 기다리고 있던 아디엘과 마주쳤다.

“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메이딜리언과 지내던 며칠 사이에 아디엘은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

저를 소모품쯤으로 취급하는 섭정 황제나 언제 그에게 암살될지 모를 아스터보다는 메이딜리언이 가장 저의 출셋길에 보탬이 되리라는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덕분에 베르무트에서 황도까지 쉬지도 않고 달려 녹초가 된 와중에도 그녀는 충직하게 메이딜리언이 알현실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

잠시 그런 그녀를 미심쩍게 바라보던 메이딜리언이 순순히 대답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핼쑥한 아디엘과 달리 어디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메이딜리언은 산뜻하기만 했다.

지친 기색이라곤 하나 없는 메이딜리언을 보며 아디엘은 다시금 감탄했다.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하.”

그때 시종 하나가 다가와 메이딜리언 앞에 조아렸다.

이에 질세라 아디엘 또한 얼른 말을 붙였다.

“제가 가시는 길을 호위하겠습니다.”

물론 메이딜리언에게 아디엘은 그저 의도치 않게 따라붙은 혹일 뿐, 그에게 호위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고, 메이딜리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4기사단장이 친히 호위를 자처하는 모습이 궁인들의 눈에 속속들이 보였을 테니까.

그것만으로 어떤 소문이 퍼져나갈지 메이딜리언은 퍽 기대가 되었다.

옅은 미소를 지은 메이딜리언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의 앞에 또 한 번, 방해물이 나타났다.

“2황자.”

이번엔 제법 거물이었다.

무려 1황자, 아스터였으니까.

사실 황궁까지 오는 길에, 메이딜리언은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다름 아닌 윈터와 아스터의 약혼 소식이었다.

‘매일 궁을 드나들며 함께 지낸다더군.’

‘그럼 공작가에서는 공식적으로 1황자를 지지하는 건가?’

‘모르지. 2황자는 베르무트로 가서 여태 소식도 없지 않은가.’

물론 윈터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 입에서 둘이 엮여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메이딜리언의 눈이 돌아 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 그 달갑지 않은 당사자가 친히 저를 만나러 와 주었다니.

메이딜리언은 애써 들끓는 살기를 잠재운 채 그에게 다가갔다.

“……정말로, 2황자였군요.”

아스터의 분홍빛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메이딜리언은 처음부터 이 남자가 맘에 들지 않았다.

자신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든 게 극과 극인 인간이었다.

저 비실비실한 자와 황좌를 두고 겨뤄야 하는 것도 못마땅하기 짝이 없는데, 이제는 윈터를 두고도 같이 묶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다니.

메이딜리언은 다른 걸 다 떠나서 사람들이 윈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 자체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 맘에 들지 않는 일의 원인이 저 인간 때문이라는 생각에 더욱더 기분은 저조해졌다.

몇 걸음 만에 아스터에게 바짝 다가선 메이딜리언은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가씨, 아니, 윈터를 끌어들인 겁니까.”

이래도 시큰둥, 저래도 시큰둥, 무덤덤하던 메이딜리언의 모습만 기억하는 아스터는 조금 놀랐다.

어디서 접한 건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윈터와 자신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예민한 반응에 아스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몰랐습니까?”

“그게 무슨…….”

“당신을 이 판에 끌어들인 이상 나랑도 엮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생긋 웃는 아스터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예전에 황궁 밖에서 봤을 때랑은 아스터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어딘가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전보다 눈동자에 심지가 생긴 느낌이었다.

“너…….”

메이딜리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누군가 잠들어 있던 아스터를 깨웠다는 것을.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그것은 윈터겠지.

메이딜리언의 기분이 한층 더 낮게 가라앉았다.

슬슬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에 살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제가 부디 당신을 죽이고 싶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형님.”

퍽 친근한 호칭에 아스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들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한 말이라서 그런가.

귓가에 들리는 단어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난 황제가 될 겁니다.”

주위의 기척을 살피던 메이딜리언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아스터의 어깨가 흠칫 굳었다.

황궁에서, 심지어 크비누스의 눈과 귀가 곳곳에 있는 이 상황에 설마 메이딜리언이 저렇게 대놓고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전하, 오늘 제가 여기 왜 왔는지 이미 짐작하고 계시죠?’

그런 메이딜리언을 마주하며 아스터는 자연스레 다른 누군가를 떠올렸다.

‘저는 우선 이 약혼을 거절할 거예요.’

상대를 올곧이 바라보던 금빛 눈동자.

그 안에 든 것은 순수한 열정이었다.

‘뻔히 눈에 보이는 수에 넘어가 줄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 메이딜리언의 눈동자에서도 그런 열망이 느껴졌다.

그것은 황좌를 차지해야겠다는 권력욕이나 지배욕이 아니었다.

그저 황제라는 지위를 하나의 수단처럼 여기는 자의 눈빛이었다.

아마도 메이딜리언의 목적도 윈터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스터는 깨달았다.

‘……그 애가, 메이딜리언이 전부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아스터는 또 한 번 자신도 모르고 있던 지독한 갈증에 멍하게 입을 벌렸다.

눈앞의 모든 것을 손안에 그러쥐고 싶었다.

두 사람의 끈끈한 유대부터 뜨거운 열망과 애정까지 전부.

“그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순순히 협조하시죠.”

메이딜리언의 말에 아스터가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마주하게 된 아우조차도 제가 아무 욕심이 없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얼마 전부터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갈증은 윈터를 만날 때만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제 몫이 아닌 애정을 훔쳐보면서, 동냥하듯 갈구하는 지금의 상황이 아스터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갈망하게 된 것이 하필이면 아우의 것이라는 게 참으로 애석했다.

“원치 않는다, 라…….”

잠시 눈을 깜박이던 아스터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는 2황자는 왜 황좌에 오르려 합니까?”

“……뭐?”

“혹시 윈터 때문입니까?”

아스터는 일부러 윈터의 이름을 힘주어 발음했다.

정작 윈터와 둘이 있을 때는 그녀를 ‘소공작’이나 ‘그대’ 정도로 칭하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메이딜리언의 눈에는 당연히 불꽃이 튀었다.

얼마 전 마주쳤던 리어트도 그러더니, 이놈이고 저놈이고 할 것 없이 윈터를 탐냈다.

침을 질질 흘리는 들개들이나 다를 바 없는 그들을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었다.

“함부로, 윈터를 말하지 마.”

그럴듯하게 가장하던 여유는 이제 없었다.

눈이 반쯤 돌아 버린 메이딜리언이 으르렁거리듯 이빨을 드러내며 아스터에게 다가섰다.

그 위협적인 살기에 아스터의 살갗이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몸은 신성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황궁 마법사들을 죄다 불러 모아서 좋은 먹잇감 던져 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거기까지만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아스터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금방이라도 그의 숨통을 끊어 놓을 듯 다가서던 메이딜리언은 가까스로 걸음을 멈췄다.

아스터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 이성을 잃고 덤벼들었다가는 윈터의 일을 망칠지도 몰랐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메이딜리언은 애써 살기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곧 인사도 없이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멀어지는 메이딜리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아스터가 푹 고개를 숙였다.

꾹 쥐고 있던 주먹 덕분에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움푹 패어 있었다.

그걸 보며 아스터가 픽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짓을 했군.”

* * *

아스터와 대면한 뒤 분을 삭이지 못한 메이딜리언은 거친 발걸음으로 2황자 궁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뜻밖에도, 칸나였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요 며칠 윈터에게 특훈을 받은 칸나는 그럴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황궁 기사의 갑옷이 멋지게 어울렸다.

칸나를 마주하고 나서야 분노로 이성을 잃고 날뛰던 메이딜리언의 머릿속이 조금 차가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칸나를 상대해 줬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칸나를 무시하고 침실 문을 열었다.

놀라운 것은 원래라면 저를 무시한다며 날뛰었을 칸나가 잠잠하다는 것이었다.

평소와 달리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가식적인 얼굴에 메이딜리언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여긴 어떻게 왔지?”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추천으로요.”

칸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며 품 안에 갈무리해 뒀던 블라디미르 가문에서 발급한 신분 패를 내밀었다.

결국은 이 모든 게 윈터의 안배였다는 것을 깨달은 메이딜리언이 처음으로 픽 웃었다.

“여긴 언제 왔지?”

“한 이틀?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얘도 데려왔어요!”

칸나의 손이 메이딜리언의 침실 안쪽을 가리켰다.

침대의 휘장을 걷어내자 이불 안에서 몸을 말고 자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반짝 눈을 떴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금빛 눈동자를 보자 메이딜리언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써머.”

이름을 부르자 대답이라도 하듯 써머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걸 본 칸나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써머를 데려가면 메이딜리언의 기분이 괜찮아질 거라는 윈터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대체 저 작은 생명체에게 무슨 힘이 있는 건지.

처음 궁에 왔을 때도 낯설어하는 기색 없이 아주 제집처럼 활보하고 다니던 써머를 칸나는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예고도 없이 몸을 돌린 메이딜리언이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아니, 뭡니까?”

“거기 적힌 사람들을 데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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