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50)

67화

* * *

이른 아침, 황궁 앞에 거칠게 투레질을 하는 말이 섰다.

미친 듯이 달려오던 말을 잔뜩 경계하던 기사들은 다행히 그들 앞에 남자가 멈춰 서자 안도했다.

“시, 신원을 밝히시오.”

잠시 후 당황했던 기사 하나가 창을 들이밀며 외쳤다.

그러자 말 위에 있던 남자가 푹 눌러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햇빛 아래 은발이 투명하게 빛났다.

요요한 빛을 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기사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

곧 이름을 밝힌 메이딜리언이 짤막하게 말을 이었다.

“친자 증명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문을 열어라.”

* * *

제게도 기회를 달라는 아스터의 제안을 시작으로, 윈터는 기왕 승낙하게 된 거 약속을 지켰다.

서로 일정을 맞춰서 아스터와 만나기 위해 황궁을 드나들게 된 것이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윈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저마다 추측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보니까 부쩍 얼굴이 수척해졌더라고요.”

“어머, 왜죠?”

“글쎄요. 그 2황자라는 자가 어지간히도 패악을 떨었나 보더라고요.”

속닥속닥 출처를 알 수 없는 말들이 궁을 떠돌았다.

놀랍게도 반쯤은 사실에 가까웠지만.

“나머지 동행은 에른스트 후작이 대신한다죠?”

“흐음, 이건 아무래도 세력 다툼이 아닐까 싶네.”

제법 통찰력 있는 척한 남자가 수염을 쓸며 말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남자는 제게 쏠리는 관심을 즐기며 대단한 정보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떠들었다.

“선황 폐하가 돌아가시고 후작가는 정계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는가.”

“그렇죠.”

“그런데 이번에 자기가 2황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아하.”

“아무래도 한몫 단단히 잡으려는 후작 눈에는 블라디미르 공작가가 눈엣가시 같았겠지.”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자의 말이 제법 일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 세력 다툼에서 공작가가 밀린 겁니까?”

“글쎄, 따라간 건 소공작이지 않나. 어릴 때부터 워낙 병약하다더니 성격도 영 강단 있지 못한 모양이군.”

남자가 쯧쯧 혀를 찼다.

그는 지난번 공작가에서 열린 무도회에 참석한 적 있었다.

먼발치에서 봐도 블라디미르 소공작은 현 공작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어 보였다.

한결 사근사근하다며 좋아하는 이들도 꽤 있었으나 남자는 역시 공작이라면 조금 더 우두머리다운, 권위적인 느낌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요즘은 1황자와 가깝게 지내는 것 같더군요.”

“맞아요. 어제도 둘이 후원을 거니는 걸 여럿이 봤어요.”

“공작가는 1황자를 지지하는 쪽으로 바꾸는 걸까요?”

“역시 대단하네요. 이렇게까지 빠르게 태세를 바꿀 줄이야.”

사람들이 저마다 시선을 교환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 대단한 공작가도 별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제법 통쾌했기 때문이다.

물론 남들이 뭐라고 떠들거나 말거나, 윈터와 아스터는 꽤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와아, 황궁 도서관은 이렇게 생겼군요?”

천장까지 가득 책으로 채워진 공간을 보며 윈터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아스터와 만난 첫날.

두 사람은 어색하게 황궁 후원을 거닐었다.

대화는 삐걱, 삐걱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고 자꾸만 엇나갔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밤새 고민하던 아스터는 다음 날 윈터를 만나자마자 물었다.

‘도, 도서관은 안 궁금하세요?’

물론 윈터는 당황했다.

‘네? 갑자기요?’

인사도 생략한 채 대뜸 앞뒤를 다 잘라먹고 도서관이 궁금하지 않냐니.

곧 제 실수를 깨달은 아스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 말은, 그러니까, 오늘은 같이, 도서관에 가 보지 않겠냐는…… 뜻이었어요…….’

뒤는 거의 잘 들리지도 않았다.

아스터의 자신감은 처음의 반도 안 되게 깎여 버렸다.

밤새 고민해서 준비한 말이었는데, 막상 말하고 보니 영 멋이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 좋아요.’

그러나 윈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터의 표정도 금세 살아났다.

“여긴 자주 오시나 봐요?”

도서관이 익숙한 듯 아스터는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그런 그를 짐짓 모른 척하며 윈터가 물었다.

“아, 네, 그렇죠. 거의 여기서 지내요.”

크비누스가 섭정으로 집권한 뒤로, 황궁에서 아스터의 위치는 애매해졌다.

어리고 유약한 성정의 황자보다는 새로운 권력자에게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문제는 아스터가 무관심 속에서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1황자 궁에 배정받았던 코델리아 부인이 아니었다면 아스터는 외로움에 지쳐 시름시름 앓으며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할 일도 없고, 워낙 몸이 약했으니까요. 그리고…….”

잠시 멈칫하던 아스터의 시선이 한쪽 벽에 머물렀다.

도서관 안을 내리쬐는 커다란 통창을 피해 작은 초상화가 하나 걸려 있었다.

바로 선황 미쉘라의 젊은 시절을 그린 그림이었다.

“여기서 자주 봤거든요.”

전장에서 막 돌아와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채 앞을 쏘아보는 그림은 금방이라도 상대에게 소리칠 듯 생생했다.

제 누이를 아끼는 척 크비누스는 궁 안의 건물마다 선황의 초상화를 걸게 했다.

역대 황제들의 온화하거나 혹은 권위적인 초상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지만, 아스터는 수많은 어머니의 그림 중 이 초상이 가장 좋았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좋은 분이셨겠죠?”

한때는 이렇게 강한 황제가 될 수 있을까 꿈꿨던 적도 있었다.

대륙을 호령하는 최강의 자리.

어딘지 모르게 처연한 아스터를 바라보던 윈터가 작게 속삭였다.

“그럼요. 전하를 많이 사랑하셨을 거예요.”

아스터 백작과는 어디까지나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선황 미쉘라는 분명 아스터를 사랑했다.

아니라면 그에게 그 물건을 남겨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윈터의 눈이 잠시 예리하게 빛났다.

“이상하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믿을 수가 없는데…….”

아스터는 아무것도 모른 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말하니까 믿고 싶어지네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윈터는 그린 듯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그때였다. 도서관 입구가 조금 소란스러워지더니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들어왔다.

“황자 전하.”

“무슨 일이지?”

“코델리아 부인이 급히 전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 알겠어.”

아스터의 허락이 떨어지자 코델리아 부인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섰다.

정신없이 뛰어온 듯 평소와 달리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전하……!”

코델리아 부인이 입을 열다가 윈터를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곧 개의치 않는 것처럼 아스터를 향해 말했다.

“그자가 돌아왔습니다.”

“누구?”

“2황자요.”

그 말에 윈터와 아스터가 동시에 움찔했다.

윈터에게는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코델리아 부인이 말을 이었다.

“드디어 친자 증명을 마친 모양입니다.”

아스터의 동공이 조금 커졌다.

코델리아 부인이 메이딜리언을 2황자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가 정말로 선황 미쉘라의 아들이자 아스터의 친동생임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조금 삭막해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아스터가 윈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오늘 만남은 여기서 마쳐야겠군요.”

“네, 그러게요.”

윈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따라 일어선 아스터가 윈터를 배웅하며 말했다.

“그럼 내일 또 봐요.”

“예.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하.”

윈터가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돌아본 시선 끝에,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코델리아 부인이 걸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 본 척, 윈터는 도서관 밖으로 나섰다.

* * *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 폐하를 뵙습니다.”

알현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걸어온 메이딜리언이 크비누스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그를 내려다보는 크비누스의 표정은 영 떨떠름했다.

그러나 보는 눈이 많은 황궁에서 못마땅한 기색을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었다.

곧 안색을 갈무리한 크비누스가 인자한 미소를 띄워 올렸다.

“이렇게 사라졌던 황자를 다시 찾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군.”

그는 심지어 친히 곁으로 다가와서 메이딜리언의 어깨를 토닥여 주기까지 했다.

서로 의무적인 인사 말고는 접촉이랄 것이 없는 아스터와는 달리 퍽 다정한 동작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살피던 궁인들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기존의 황궁은 크비누스 파와 아스터 파로 나뉘어 있기는 했으나, 사실상 한쪽이 눈에 띄게 우세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던 메이딜리언의 등장으로 그 구도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만 보여도 궁인들은 발 빠르게 소식을 전달했고, 귀족들은 벌써 어디로 줄을 대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다.

“내 2황자를 위해 곧 성대한 책봉식을 준비하마.”

마침내 크비누스의 입에서 공식적으로 메이딜리언을 인정하는 언사가 나왔다.

메이딜리언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비죽 웃었다.

그 시선을 오래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크비누스는 일부러 옆의 시종에게로 몸을 돌렸다.

“2황자를 위한 궁은 준비되었느냐?”

“예? 예에, 폐하.”

처음 베르무트로 가는 길목에서 암살에 실패했을 때, 크비누스는 크게 분노했으나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감히 제게 도전하려 드는 조카의 숨통을 그대로 끊어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메이딜리언이 2황자가 되었을 때 최대한 제게 유리한 쪽으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기에 일부러 아스터와 윈터를 결합시키려 시도한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블라디미르의 후계자는 몰라도 메이딜리언은 상대에게 갖는 감정이 퍽 애틋하다던데.

아스터와 한 여자를 두고 싸우며 반목하다 알아서 무너져 준다면 그거야말로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크비누스는 인사를 올리고 멀어지는 메이딜리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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