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 *
칼리스타를 나온 윈터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르카로 갔다.
메이딜리언이 황도에 올 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려면 지칠 겨를도 없이 바쁘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오셨군요, 아가씨.”
제니마 상회 앞에서 초조하게 서 있던 엘리슨이 마차에서 내리는 윈터를 보고는 반색했다.
오는 내내에서 마차에서 반쯤 졸다시피 했던 윈터가 작게 하품하며 인사했다.
“오랜만, 엘리슨.”
“몸은 괜찮으십니까?”
부쩍 피로해 보이는 윈터를 보고는 엘리슨이 염려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사실 두 사람은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터라 간간이 편지만 주고받았다.
그 사이 윈터는 두 번쯤 피를 토하고, 세 번쯤 기절했었으니 엘리슨이 저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 당연하지. 난 늘 쌩쌩해.”
몇 번 눈을 감았다 뜬 것으로 잠기운을 완전히 덜어낸 윈터가 힘차게 대답했다.
제 팔뚝을 불끈 쥐며 말하는 얼굴은 그녀의 말마따나 생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엘리슨은 쉽사리 걱정을 덜어내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심하게 앓던 윈터를 익히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그런 엘리슨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 윈터는 그저 쓰게 웃으며 상회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엊그제 보낸 편지는 봤어?”
“예, 그럼요. 그런데 정말입니까?”
“응? 뭐가?”
갑작스러운 물음에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슨이 코끝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재차 물었다.
“정말로 칸나를 호위에 올리실 겁니까?”
“당연하지.”
윈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메이딜리언의 호위로 칸나를 점찍었다.
원작에서는 아스터의 호위가 되지만, 이번엔 윈터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칸나는 무력으로는 메이딜리언과 호각을 다툴 정도로 강했다.
그러니 메이딜리언의 호위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녀가 해야 했다.
하지만 엘리슨은 여전히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두 사람 사이는 영 별로인데, 정말 괜찮을까요?”
“아아, 그건 걱정하지 마.”
엘리슨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한 윈터가 거침없이 제니마 상회를 가로질렀다.
누가 구조를 알려 준 적도 없는데 능숙하게 뒷문을 찾아 연 윈터의 앞에 한창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 칸나가 보였다.
“내가 사명감을 좀 심어 줄테니까.”
엘리슨이랑은 워낙 마음이 잘 맞고 하는 생각도 비슷해서 그런지, 굳이 만나지 않고 편지로만 대화를 나눠도 일이 착착 진행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윈터가 이곳에 온 것은 순전히 칸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어, 아가씨!”
훈련을 방해하는 낯선 인기척에 와락 표정을 구겼던 칸나가 윈터를 발견하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안녕, 칸나.”
신난 강아지처럼 발랄한 표정에 윈터가 쿡쿡 웃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그 재수 없는 자…… 아니, 딜런이랑 같이 어디 다녀온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사정이 생겨서 나만 먼저 왔어.”
“흐음, 그렇구나. 몸은 괜찮으세요?”
“당연하지. 척 보면 모르겠어?”
윈터가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물었다.
칸나는 움찔하더니 수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잘 모르겠어요. 늘 반짝거리는걸요.”
“뭐? 하하.”
순박한 시골 청년 같은 말에 윈터가 눈을 휘며 웃음을 터뜨렸다.
칸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더욱 눈을 빛냈다.
잠시 뒤 웃음기를 가라앉힌 윈터가 칸나를 불렀다.
“칸나.”
“네, 아가씨.”
“실은 말이야. 오늘은 네게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저한테요?”
전혀 뜻밖이었는지, 칸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엘리슨을 돌아봤던 윈터가 곧 칸나의 팔짱을 끼고는 상회 뒤쪽의 연무장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따라오게 된 칸나는 조금 긴장한 듯 뺨이 굳어 있었다.
엘리슨도 떼놓고 자기한테만 하려는 말이 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 아가씨,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부탁할 게 있다더니, 윈터는 한참 걷기만 할 뿐 딱히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칸나가 슬쩍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윈터가 고개를 들었다.
“으응, 그게 있잖아…….”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윈터가 티 나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칸나만 한 적임자가 없는 것 같아서 찾아왔어.”
“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곧 메이가 황도로 돌아올 거야. 2황자로서 말이야.”
“그…… 런데요?”
그 재수 없는 자식이 어쩌면 황자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칸나도 듣기는 했다.
그런데 결국은 2황자로 밝혀진 건가? 그거랑 아가씨가 부탁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칸나는 여전히 윈터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물론 윈터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칸나도 알다시피, 메이는 황궁에 아는 사람이 전혀 없잖아.”
“그, 렇죠?”
“나는 그래서 메이가 너무 걱정돼. 가뜩이나 맘도 여리고 착해빠진 녀석이 혹시 황궁에서 주눅 들어 지내지는 않을까 해서.”
“걔가 맘이 여, 여려요?”
칸나는 와락 일그러질 뻔한 표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 신경줄 굵은 녀석더러 여리고 착해빠졌다니.
메이딜리언은 황궁에서 주눅이 들기는커녕 남을 주눅 들게 할 게 뻔했다.
상대가 윈터가 아니었다면 진작 시원하게 쏘아붙였을 것이나, 칸나는 꾸욱 참았다.
“그래,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러나 칸나의 생각은 꿈에도 모르는 듯, 윈터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난 칸나가 당분간만이라도 메이를 호위해 줬으면 좋겠어.”
“제, 제가요?”
칸나가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그러나 윈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응.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만한 사람은 칸나뿐이야.”
“저를…… 믿으세요?”
“당연하지! 칸나만큼 믿음직스럽고, 듬직하고 멋진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
그 말에 칸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헤실헤실 풀어지기 직전인 칸나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윈터가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미 그 전부터 쭉 봐 왔지만, 칸나만큼 실력이 출중한 사람을 찾기는 힘들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호위 기사들을 검토해 봤지만 역시 칸나만 한 사람이 없더라고.”
“하핫. 그, 그런가요?”
“그으럼. 그래서 말인데, 칸나가 당분간 메이의 호위를 맡아 주는 건 어때? 다른 사람한테 맡기는 건 영 불안해서 말이야.”
불안한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 윈터의 얼굴은 처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칸나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제가 해 볼게요!”
그 말에 윈터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겉으로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정말? 진짜로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거야?”
“부, 부탁이랄 것도 없는걸요. 별로 어렵지도 않은데요, 뭘.”
“와! 정말 고마워, 칸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 앞으로 칸나가 해 달라는 건 내가 뭐든 들어줄 거야.”
윈터가 잔뜩 신이 나서는 칸나의 손을 잡고 붕붕 위아래로 흔들었다.
몸에서 느슨하게 힘을 뺀 채 윈터에게 휘둘려 주고 있던 칸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요, 아가씨. 저는 기사도 아닌데 어떻게 황궁에 들어가죠?”
“아아, 그건 걱정하지 마.”
생긋 웃은 윈터가 재빨리 주머니에서 작은 패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블라디미르 공작가에 입적한 정식 기사라는 징표.”
“예에?”
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블라디미르 기사단은 입단하기조차 어려운, 기사들에게는 황실 다음으로 꿈의 직장이라 꼽히는 곳이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실력 있는 자만 뽑힌다는 점에서 호승심이 강한 자들이 저절로 모여들곤 했다.
그런데 입단 시험도 치르지 않은 자신이 어떻게 공작가 소속의 기사가 된다는 말인가.
“특별 채용이야.”
윈터는 눈을 찡긋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어차피 칸나라면 지금 입단 시험을 치러도 어렵지 않게 1등으로 기사단에 소속될 거였다.
공작가 기사를 선출하는 데 있어서 입단 심사가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그만큼 무게를 두는 것이 바로 가주의 추천이었다.
블라디미르 공작의 추천을 받을 만한 실력이라면 굳이 따로 입단 시험을 치를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칸나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런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이자, 차기 공작인 사람이었다.
“와아.”
칸나는 새삼 윈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탄했다.
덕분에 윈터가 이 신분 패를 대체 언제부터 준비했는지는 깊이 생각하거나 의심하지 못했다.
“메이를 잘 부탁해, 칸나.”
윈터는 뿌듯한 얼굴로 칸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패를 받아든 칸나의 두 뺨이 발그레해지더니, 불쑥 그녀가 물었다.
“저, 이거, 자랑해도 되나요?”
“그럼, 당연하지.”
윈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꾸벅 인사를 한 칸나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다.
“한타 아저씨! 이거 봐! 나 기사 됐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안에서 왁자지껄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윈터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칸나를 참 잘 다루시는군요.”
어느새 슬쩍 그런 윈터의 곁으로 다가온 엘리슨이 말을 붙였다.
“흐음, 그런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윈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엘리슨이 물었다.
“굳이 칸나인 이유가 있습니까?”
“응?”
“딜런 님의 호위 말입니다. 사실 이제 딜런 님은 암살에 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신걸요.”
“그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윈터가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과연 그녀가 가진 속셈이 무엇일까 줄곧 궁금해하던 엘리슨이 귀를 기울였다.
“원래 싸우면서 사랑이 싹트는 거니까.”
그러나 곧 이어진 말에 엘리슨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예……? 사랑이라뇨? 설마 딜런 님이랑 칸나 말입니까?”
“왜 아니겠어?”
“아직도 그 이상한 생각은 그대로시군요…….”
엘리슨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러나 윈터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혼자만의 망상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두고 봐. 두 사람은 반드시 사랑하게 될 거야!”
엘리슨은 처음으로 메이딜리언이 조금 가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