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50)

64화

“……거짓말이죠? 하하.”

어디 한 군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윈터가 삐걱거렸다.

예상대로 질색하는 딸을 보며 블라디미르 공작이 픽 웃었다.

“크비누스가 이런 걸로 장난칠 인간은 아니지. 뭣하면 거기 친히 적혀 있으니 살펴봐라.”

“아뇨, 괜찮아요.”

화들짝 놀란 윈터가 손에 들고 있던 서신을 내려 두었다.

마치 계속 가지고 있다가는 부정이라도 탈까 염려하는 듯 보였다.

불안한 듯 시선을 굴리던 윈터가 공작에게 넌지시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

“글쎄. 일단 나는 이번 일에 나서지 않으마.”

두 손을 들어 보인 공작이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블라디미르답게 해결해라.”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윈터가 곧 공작과 꼭 닮은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럴게요.”

* * *

이른 새벽, 단상 앞에 서 있던 대신관이 종을 울렸다.

마치 아침 해를 깨우듯 청명한 소리와 함께 메이딜리언이 계단을 올랐다.

그 꼭대기에는 성수가 가득 채워진 수반이 있었다.

챠르릉, 챠르릉 종이 울리는 소리만 들릴 뿐, 사방은 고요했다.

망설임 없이 길고 긴 계단을 오른 메이딜리언이 왼손을 내밀었다.

대신관이 기다렸다는 듯 새하얀 단검을 내밀었다.

“신 앞에 선 자, 거짓은 죽음뿐이리.”

그것을 받아든 메이딜리언이 짧게 기도하고는 망설임 없이 제 손바닥을 그었다.

깊게 베인 상처에서 새빨간 피가 수반으로 떨어졌다.

“나, 메이딜리언 카데르 제니어스. 선황의 친자임을 신 앞에 증명합니다.”

깨끗하던 수반이 피로 물들었다.

메이딜리언은 가만히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동요 한 점 없이 깨끗한 눈동자는 일견 지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수반 아래로 가라앉은 핏방울들이 성수에 녹아들며 천천히 희석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대신관의 눈동자가 커졌다.

부정한 자라면 새카맣게 물들었을 성수가 이리도 깨끗한 빛을 낸다는 것은, 눈앞의 청년이 그의 말마따나 정말 숨겨져 있던 2황자라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할 거 얼른 끝내지?”

그걸 본 메이딜리언이 비죽 웃으며 말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그의 인상을 신경질적으로 바꿨다.

당황한 대신관이 더듬더듬 선언했다.

“그, 그대의 결백을 신께서 증명하노라.”

성수에 적신 대신관의 손가락이 메이딜리언의 이마에 성호를 그려 넣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불쾌함을 참아내던 메이딜리언이 제 왼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어느새 단검에 베였던 상처도 깨끗이 사라진 상태였다.

용건이 끝났으니 메이딜리언은 뒤도 안 돌아보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신관들이 그의 뒤를 따라오며 말했다.

“전하, 기도실로 가시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보호 마법을 새기셔야 합니다.”

메이딜리언의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이다 가라앉았다.

애써 화를 참아내느라 속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선황의 친자인 걸 증명했으면 됐지, 번거롭게 또 무슨 보호 마법이라는 건지.

그딴 게 없어도 그는 딱히 크비누스에게 질 것 같지 않았다.

“……알겠다.”

그러나 이번에도 메이딜리언은 순순히 신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하면 윈터가 조금이나마 기뻐해 줄 것 같아서.

윈터는 아르카의 다른 단원들이나 데보라 또는 칸나와는 달랐다.

그의 맘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았고, 놀랍게도 그게 그를 화나게 만들지도 않았다.

메이딜리언은 몸을 낮추고 참는 방법을 배워 나가고 있었다.

윈터가 조금이나마 자신을 믿고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숲에서 보았던 그 이상한 남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얼마나 걸리지?”

그러나 그렇게 다짐했다고 해서 얇디얇은 신경줄이 금세 두꺼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초조한 얼굴로 메이딜리언이 신관을 재촉했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걸리실 겁니다.”

일주일이라니.

깊은 한숨과 함께 메이딜리언이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더 빨리할 수는 없나?”

“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시간을 재촉하시면 안 되십니다.”

이를 악무는 메이딜리언을 보면서도 신관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에 메이딜리언은 끝내 이를 사리물었다.

왜 이리도 불안한지.

시간을 견디는 게 지독히도 힘겨웠다.

* * *

메이딜리언이 신전에 갇혀 있을 무렵, 윈터는 아스터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공작이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윈터는 맘 놓고 제멋대로 해 볼 생각이었다.

처음엔 몰래 따로 만나자고 할까 생각도 했지만, 윈터는 정공법을 택했다.

에른스트 후작의 편지를 전달할 겸, 황궁에 온 즉시 아스터에게 알현을 청한 것이었다.

“펴, 편하게 드세요.”

이제껏 궁에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아버지인 아르만 백작뿐이었던 아스터는 어색한 몸짓으로 윈터를 맞이했다.

그 또한 얼마 전 날벼락처럼 윈터와의 혼담을 전달받고는 골머리를 앓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기회에 공작가를 손에 넣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반사적으로 떠오른 아르만 백작의 말에 아스터의 손끝이 흠칫 떨렸다.

‘소공작이 그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 모를 반푼이에게도 아주 헌신적이더구나? 그러니 1황자인 네가 그 마음을 얻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한 번도 애정을 바라 본 적 없는 아버지였다.

늘 자신을 구박하고, 멸시하고,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아버지가 제 뺨을 붙들고는 퍽 다정한 척 속삭이는 말에 아스터는 애써 구역질을 참아내야 했다.

‘기껏 반반하게 낳아 준 얼굴, 이렇게라도 써먹어야 하지 않겠니?’

톡톡 뺨을 치는 손길이 역겨웠다.

‘네게 거는 기대가 아주 크단다, 아스터.’

얼굴로 윈터를 꼬셔 보라니, 웃기지도 않지.

아스터의 표정은 한층 어두워졌다.

알현은 받아 놓고 한 마디도 안 하는 아스터 덕분에, 응접실의 분위기는 한층 더 삭막해졌다.

전에 없이 어색한 분위기에 윈터는 이리저리 눈만 굴리다 먼저 입을 열었다.

“응접실에 있는 꽃이 예쁘네요. 코델리아 부인의 솜씨인가요?”

1황자 궁의 시녀장을 언급하는 말에 아스터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네. 그렇습니다.”

뭔가에 홀린 듯 대답하던 그가 이내 되물었다.

“시녀장을 잘 아시나요?”

“그럴 리가요. 그냥 이름 정도만 전해 들었답니다.”

윈터는 대수롭지 않은 듯 싱긋 웃었다.

그러나 아스터는 사실 세간에 1황자에 대한 정보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걸 믿고 잠행까지 나갔었으니까.

어린 시절 유모처럼 거의 자신을 도맡아 길러 준 코델리아 부인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윈터의 정보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 사람이 잠행 나온 1황자를 몰라봤을 리가 없는데.

의도치 않게 사건에 휘말리며 보호 마법이 드러나기 전까지 감쪽같이 모른 척해 줬던 윈터가 떠올랐다.

아스터는 새삼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땐 감사했어요.”

“네? 언제요?”

“처음 만났을 때요. 절 모른 척해 주셨잖아요.”

“아아, 그거요.”

윈터는 쑥스럽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와 이렇게 제 궁에서 마주 보고 있으니, 아스터는 조금 기분이 묘해졌다.

우연히 만나 함께 건국제 구경도 했던 그때가 아스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아스터는 문득 아무 근심이나 걱정도 없이 즐겁기만 했던 그 순간이 무척 그리워졌다.

한편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듯 보였던 아스터의 표정이 풀어지자 윈터도 한결 어깨가 가벼워졌다.

이 정도 분위기라면 오늘 준비한 얘기 정도는 다 풀어놓고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저는 좀 걱정했어요.”

“뭘요?”

조심스레 윈터가 꺼낸 말에 아스터가 고개를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윈터가 말을 이었다.

“전하가 저를 오해할 줄 알았거든요.”

“어떤……오해요?”

“혹시나 제가 전하께 일부러 접근한 건 아닐까. 그렇게 해서 전하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닐까 하는 오해요.”

그 말에 아스터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윈터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줄 몰랐던 아스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나 윈터는 깔끔한 정공법이야말로 아스터에게 제대로 먹히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아스터는 타고나길 선하고 순한 성정이었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와 크비누스의 등쌀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눈치는 자동으로 빨라진 상태였다.

타인의 악의에도 무척이나 민감한 그에게 섣불리 거짓으로 대하거나 입에 바른 소리나 했다가는 바로 눈치채고 거리를 둘 게 뻔했다.

윈터는 그러느니 아예 제 밑천을 드러내서 아스터의 협조를 받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아스터는 장자고, 그의 협조가 있어야 메이딜리언을 황좌까지 올리는 게 한결 수월할 테니까.

물론 일이 영 엉망이 되어서 아스터의 협조를 구할 수 없는 상황 또한 예상은 하고 있다.

하지만 아스터는 맑은 샘과 같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인물이었다.

“……사실 처음에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어요.”

봐, 이번에도 솔직하게 다 말해 주잖아.

아스터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윈터가 조금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어쩐지 소공작은 내게 해를 끼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아스터가 부끄러운 듯 차마 윈터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대를 온전히 믿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황급히 덧붙인 말에 윈터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네,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던 아스터의 귀가 화끈 달아올랐다.

웃음기를 가라앉힌 윈터가 은밀히 속삭였다.

“전하, 오늘 제가 여기 왜 왔는지 이미 짐작하고 계시죠?”

아스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허리를 바로 세운 윈터가 눈을 반짝 빛내며 말했다.

“저는 우선 이 약혼을 거절할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