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150)

63화

하지만 그 말조차 위협적일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후작은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그의 호의에만 기대서 일을 도모할 수는 없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니만큼 신중해야 하니까.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지만 마력이 온전치 못하다는 치명적인 약점도 들킨 상황이니, 불안한 요소를 가진 자신을 후작은 더욱 신뢰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구심을 가진 상대방과는 큰일을 성사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윈터는 제가 숨기고 있던 부분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윈터의 친절한 경고를 이해한 후작은 조금 쓰게 웃었다.

그는 윈터가 마치 과거의 제 동생 같아 걱정하며 메이딜리언에게서 도망치라 조언했던 일이 새삼 어리석게 느껴졌다.

어쩌면 메이딜리언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난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자네를 믿지. 고맙네.”

뒤늦게 에른스트 후작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 * *

후작과의 깊은 대화를 마친 윈터는 빠르게 전열을 가다듬었다.

곧 공작가에서 파견된 기사단들이 후작령으로 찾아왔다.

그중 한 기 정도는 메이딜리언의 호위로 두고 가기로 했다.

후작은 윈터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기사단이라면 나이나 신분을 따지지 않고 최정예로만 뽑아 극악의 훈련을 거치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황실 기사단마저 부상을 당한 마당에 메이딜리언을 호위할 수 있는 인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 와중에도 윈터는 혹시나 공작가의 기사들이 메이딜리언의 호위로 추가되는 것을 황실 기사들이 불쾌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황실 기사들은 공작가의 기사들을 크게 반겼다.

“같이 호위하면 더욱 좋죠, 하하!”

“전하…… 아니, 메이딜리언 님께서도 분명 흡족해하실 겁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놓고 못마땅하다는 듯 시선을 보내던 그들을 기억하고 있던 윈터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황실 기사들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것이 살수들의 암습 이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기사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주다 못해 살수들을 일격에 쓸어 버린 메이딜리언의 실력에 반해 버린 것 같았다.

그 며칠 사이 어쩜 저렇게 메이딜리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버린 건지.

“비위도 좋아, 정말.”

사정을 뻔히 다 아는 리어트가 슬쩍 윈터의 뒤로 지나가며 이죽거렸다.

그러나 윈터는 그저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우리 메이가 대단한 걸 뭐 어쩌겠어.”

원작에서도 메이딜리언은 저런 극성맞은 추종자들을 몰고 다녔다.

그의 무력에 감탄하는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중증이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리어트가 마차 문을 열며 윈터를 에스코트했다.

“타시죠, 아가씨.”

난데없이 나타난 수인족 남자에게 알게 모르게 시선이 쏠렸다.

대놓고 차별하는 분위기는 이제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대륙에서 수인족은 소수에 속했다.

자기들끼리 오지에 모여서 지낼 뿐, 사실 리어트처럼 인간들 사이에 섞여서 사는 수인족은 아직까지는 드물었다.

“조금만 참아.”

리어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며 윈터가 작게 속삭였다.

제 나름대로 티는 안 낸다고 하지만, 그린 듯한 미소가 평소와 달리 그의 언짢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걸 윈터는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괜찮아. 이 정도도 못 참고 황도에 온다고 하면 안 되지.”

씨익 웃은 리어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윈터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이 꽤 기분이 좋았는지 아까보다 예민함이 한결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소공작.”

그때 다가온 에른스트 후작이 윈터를 배웅했다.

“곧 황도에서 봅세. 나는 전하를 모시고 가지.”

“네,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마친 윈터는 곧 에른스트 후작가를 떠났다.

멀어지는 후작령을 바라보며 리어트가 한탄하듯 말을 꺼냈다.

“하여튼 어딜 가든 파란만장하네.”

그 말에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윈터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뭐래. 그건 아니야.”

“아니기는.”

무투 대회에서 쓰러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는데, 이번에도 거의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리어트는 그 나름대로 배후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윈터의 몸 상태에 관한 정보가 흘러나간 건지 찾아보고 있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녀가 시한부라는 것은 알음알음 알려졌던 사실이었다.

아무리 완치가 되었다고 해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시험해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리어트는 머리가 복잡했다.

“가끔 누군가 일부러 널 그렇게 몰아넣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어.”

조금씩 차오르던 물이 어느새 윈터의 턱 밑까지 닿아오는 느낌이었다.

리어트는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윈터를 애써 붙들고 있지만, 언젠가 그 손을 그녀가 스스로 놓아 버리지는 않을까 늘 불안했다.

“뭐, 비슷하긴 하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윈터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리어트의 눈에는 푸른 불꽃이 튀었다.

제 스스로 기꺼이 가시밭길로 걸어 들어가는 그녀를 그저 지켜만 봐야 한다는 지독한 무력감이 매번 리어트를 괴롭혔다.

“……리어트?”

머릿속이 온통 메이딜리언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윈터는 이상한 데서 눈치가 빨랐다.

저를 침잠하는 어둠을 애써 몰아낸 리어트가 익숙하게 말을 돌렸다.

“갑자기 난 왜 불러?”

“아니, 그냥 네가 잠깐 어딘가 불편해 보여서.”

“그럴 리가 있나. 너야말로 걱정 안 돼?”

“응? 누구?”

“그 녀석 말이야.”

평소에는 그 커다란 녀석이 불면 날아갈까 쥐면 바스러질까 애지중지 끼고 돌았으면서, 의외로 윈터는 아무 걱정 없이 태평한 표정이었다.

“전혀. 잘하고 올 거야.”

베르무트까지 들어갔으니, 메이딜리언이 선황의 자식이라는 게 밝혀지는 것은 어차피 시간 문제였다.

윈터의 끝 간데없는 신뢰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꿈에도 모르는 리어트는 그 모습이 꽤 눈꼴시었다.

“그 자식이 황자가 아니면 어쩌려고 그래?”

“그럴 일은 없어.”

그러나 윈터는 리어트의 심술이 무색하게도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끔 윈터는 저런 식으로 단언할 때가 있었다.

리어트도 처음엔 뭘 믿고 저러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윈터가 한 말은 모두 척척 들어맞곤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큰 어려움 없이 그 녀석은 황자의 증명을 마치고 돌아오겠지.

괜히 배알이 꼴린 리어트가 입술을 삐죽였다.

두 사람이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마차는 빠르게 황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머니는 왜 나를 이렇게 빨리 부르시는 거지?”

“글쎄.”

원래라면 정보들을 수집해 윈터의 의문에 척척 대답해 줬을 리어트도 이번에는 시원스레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윈터가 쓰러진 사이 후작가의 첩자를 찾는 데 인력을 총동원하는 바람에 공작가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 가 보면 알겠지.”

윈터는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곧 제 앞에 떨어질 폭탄은 꿈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 * *

혼란스럽기만 했던 베르무트 동행과는 달리 황도로 돌아오는 길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덕분에 마차로 오는 동안 컨디션을 꽤 회복한 윈터는 공작가에 도착한 즉시 블라미디르 공작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어머니!”

“예상보다 꽤 빨리 왔구나.”

정신없이 서류를 검토하던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 딸을 꼭 끌어안아 맞아 준 그녀는 곧 주변을 모두 물리고 윈터와 독대했다.

코에 걸치고 있던 안경을 벗어 놓은 공작이 피곤한 듯 눈을 문지르며 윈터에게 물었다.

“상황은 어떻지?”

“메이는 베르무트에 잘 입성했어요. 중간에 크비누스의 방해가 좀 있긴 했지만, 크게 지장이 갈 만한 것도 없었고요.”

한참 윈터의 보고를 듣던 공작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네 상태가 안 좋았잖니.”

“……그거야, 뭐, 무투 대회때 무리했던 것도 있으니까요.”

잠시 멈칫하던 윈터가 평소답지 않게 대답을 얼버무렸다.

사실 그녀는 아직까지 공작에게 제 몸 상태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지 못했다.

언젠가는 시기를 봐서 말해야겠지만, 이상하게 공작의 얼굴만 보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지금은 멀쩡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황급히 말을 덧붙인 윈터가 히히,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공작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고는 곧 잊고 있던 소식 하나를 전했다.

“네게 혼담이 들어왔다.”

“네? 혼담이요?”

갑작스러운 혼담이라는 말에 윈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평소에 실없는 소리라면 절대 꺼내지 않는 공작의 성정을 아는데, 혼담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 약혼이긴 하지만, 뭐.”

작게 혀를 찬 공작이 윈터에게 봉투 하나를 찾아 내밀었다.

상아색 봉투에 찍힌 황금빛 인장.

황실에서 온 서신에 윈터는 덜컥 불길해졌다.

설마 크비누스 이 인간이 자신과 메이딜리언을 엮어서 어떻게 해 보려는 거 아닌가 싶었다.

메이딜리언은 칸나라는 멋지고 사랑스러운 운명의 짝이 이미 있는데 말이지.

덜컥 불안해진 윈터가 슬쩍 공작에게 물었다.

“혹시,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메이랑…….”

“아니, 그쪽 말고.”

다행히 공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덕분에 윈터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러고 나니 다시 의문이 들었다.

“그럼 대체 누구랑……?”

“1황자와.”

“……예?”

윈터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공작은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된 듯 눈만 끔벅이고 있는 딸을 위해 또박또박 다시 말해 주었다.

“아스터 1황자와의 약혼이다.”

아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