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50)

60화

이제 윈터는 확신이 들었다.

상대의 목적은 자신이다.

시한폭탄 같은 마력을 가진 자신.

“하.”

지독한 무력감이 그녀를 감쌌다.

윈터는 조금 서글퍼졌다.

메이딜리언을 돕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정말 자신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우욱.”

이 와중에도 몸은 착실히 안 좋아지고 있었다.

구토감이 치밀어오르며 윈터가 연달아 헛구역질을 했다.

그와 동시에 윈터의 심장 주위에서 마력이 일렁거렸다.

그녀의 주위로 미약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동안 숱한 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불길한 건 또 처음이었다.

이번엔 정말로 위험했다.

“소공작, 정신 차리시오!”

언제 마차에서 내린 건지, 에른스트 후작이 달려와 윈터를 부축했다.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원래도 수세에 몰리던 전투가 윈터가 참전하며 조금 상황을 회복하는 듯싶더니 다시 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윈터는 이상하게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상황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귀가 먹먹해지며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묘하게 현실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윈터는 생각했다.

‘여차하면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당시에는 메이딜리언과의 실랑이를 해결하고자 한 말이었겠지만, 설마 에른스트 후작도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윈터는 에른스트 후작이 그 말을 지키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어줄 것이었다.

이대로 자신의 마력이 폭주하면 말 그대로 개죽음에 불과했으니까.

“후작님, 저한테서 멀어지세요.”

“아니, 그게 갑자기 무슨…….”

“죽더라도 애먼 사람을 끌어들이진 말아야죠.”

“소공작!”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죽기로 작정하니 초인적인 힘이라도 나오는 건지, 에른스트 후작을 뿌리친 윈터가 앞으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아가씨!”

“데보라, 에른스트 후작을 지켜.”

“아가씨는요?”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데보라가 재빨리 살수들에게 둘러싸인 에른스트 후작을 구하러 달려갔다.

그것은 그녀가 윈터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어서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상황에도 고마움에 윈터가 후후, 웃었다.

아마 데보라는 지금 윈터가 현 상황을 타개할 만한 묘수를 생각해냈을 거라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윈터가 지금부터 벌일 일은 동귀어진이라는 최악의 선택지였다.

“너구나.”

고통을 꾹 감내하며 윈터가 거구의 남자 앞에 섰다.

뒤에서 줄곧 소극적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어, 어떻게, 분명 움직일 수조차 없을 텐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인 줄 알아?”

분명 처음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윈터는 어릴 적부터 이미 그만한 고통에 충분히 단련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마누트라 섬에 있으면서 한계까지 마력을 출력해보는 끔찍한 경험도 수백 번이나 반복했었다.

“설마 이런 데에 요긴하게 쓸 줄은 몰랐지만.”

날뛰는 마력을 제어하고자 했던 일이 이렇게 도움이 된다니.

윈터는 괜히 씁쓸해졌다.

픽 웃는 그녀를 보던 살수가 이를 악물었다.

“죽기를 자처하는군.”

“맞아, 정답이야.”

“그럼 내가 직접 숨통을 끊어주지!”

제게 달려드는 검을 보고도 윈터는 방어조차 하지 않았다.

방어할 힘조차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부러 보란 듯이 양팔을 활짝 펼쳤다.

제 몸이 폭탄이 되어서 한 방에 죄다 날려버릴 작정이었다.

‘제발 한 번

에 죽게 해주세요!’

끔찍한 소원을 빌며 윈터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크아아악!”

비명은 윈터가 아닌 살수에게서 나왔다.

놀라 눈을 번쩍 뜬 윈터의 앞에 잘린 손목을 붙들고 바닥을 구르는 남자가 보였다.

바닥에는 그가 들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새카만 마석이 박힌 마도구가 보였다.

누군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피 웅덩이에서 그 마도구를 꺼내 들었다.

뭔가 날카로운 것에 의해 잘린 것처럼 마석은 깔끔하게 반으로 동강이 나 있었다.

“흐응, 이런 시시껄렁한 장난감에 당하다니.”

윈터의 고개가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어둑한 숲의 그늘 아래, 거칠게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청보랏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고양잇과 동물들처럼 가늘어진 동공을 하곤 샐쭉 웃었다.

“역시 너는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장난스러운 미소에 윈터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설마 여기에 나타날 줄은 몰랐던 인물의 등장이었다.

“……리어트?”

나지막이 나온 이름에 기쁜 듯 미소가 짙어진다.

“나 기다렸지, 자기?”

대체 여기까지는 언제, 어떻게 왔단 말인가.

아까부터 울렁거리던 속이 차차 가라앉더니 몸의 긴장이 슬슬 풀리기 시작했다.

시야도 흐려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곧 정신을 잃게 될 것 같았다.

휘청이는 윈터를 리어트가 여유롭게 부축했다.

“미친놈…….”

반가움을 대신하는 인사만 짤막하게 남기고 윈터는 그대로 기절했다.

* * *

다시 눈을 뜬 윈터는 한결 몸이 가벼운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지금 상황에 신물이 났다.

대체 최근 들어 몇 번이나 기절하는 건지.

“뭐야, 깼어?”

윈터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은 건지, 막 방 안으로 들어오던 리어트가 걸음을 재촉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윈터가 고개를 돌렸다.

“……리어트?”

“맞아.”

“아까 그게 꿈이 아니었네.”

쓰러지기 직전 마주쳤던 리어트가 반쯤은 환상인 줄 알았던 윈터였다.

사실 아직도 정신이 조금 몽롱해서 꼭 꿈만 같았다.

한편 영 싱거운 말에 픽 웃은 리어트는 금세 혀를 쯧쯧 차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러고 있었어?”

“그러게나 말이다.”

“그리고 너, 아까 설마 죽으려고 한 건 아니지?”

“…….”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차마 그렇다고 순순히 대답할 수 없었던 윈터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리어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럴까 봐 얼른 수도에 오려고 했던 건데 말이지. 넌 아무튼 그 자식 일이라면 답도 없을 만큼 무모해질 때가 있어.”

어린 시절 잠깐 친하게 지냈던 애에게 왜 그렇게 목숨을 거는지.

윈터는 가끔 보면 삶에 요만큼의 미련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메이딜리언을 위해 어떤 고통이나 아픔도 불사하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겠지.

그런 그녀가 리어트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사상자는 좀 나왔지만, 일단 에른스트 후작이나 데보라는 멀쩡해.”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리어트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윈터와 그동안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녀가 접촉했던 인물들, 그리고 오랜 기간 지켜보고 있던 인물들을 모조리 알고 있는 그였다.

깨어난 윈터가 궁금해할 만한 인물들의 동태는 모조리 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메이는?”

윈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리어트는 잠시 멈칫했다.

“……그 자식 얘기는 일부러 빼놨던 건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 리어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털끝 하나 안 다쳤어. 그리고 저주의 매개체도 찾아냈어.”

“그래?”

“응. 그 자식 단추에 주렁주렁 달려 있더라.”

그 옷을 준비한 시녀와 그 시녀가 고발한 인물들이 줄줄이 즉결 처형되었다.

그것도 윈터가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는 메이딜리언의 손에 의해.

심술부리는 김에 그것도 다 말해줄까 하던 리어트는 애써 꾸욱 참았다.

아픈 사람한테 별로 좋은 얘기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하면 질투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추해 보일 것 같았다.

“넌 여기 어떻게 왔어?”

“이제야 물어보다니 너무 서운하네.”

리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약 기운에 몸이 나른해진 윈터가 작게 웃었다.

“미안.”

“휴, 착한 내가 참아야지, 뭐.”

저렇게 다정한 목소리에 리어트는 약했다.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약자니까.

밉지 않게 윈터를 흘겨보던 리어트가 대답했다.

“마법사 누님이 알려주더라.”

“아이셀 언니가?”

“그래.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다고 빨리 가보라더라고. 그래서 수도 도착하자마자 짐도 다 못 풀고 바로 달려왔지.”

그 말에 윈터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별말씀을.”

윈터의 눈이 다시 가물가물해졌다.

그런 그녀에게 리어트가 속삭였다.

“네가 아껴 마지않는 그 자식은 베르무트에 잘 도착했어.”

“으응.”

“아무리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돌아올 거야.”

윈터가 가물가물 잠에 드는 것을 지켜보며, 리어트는 그녀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너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해?’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마누트라 섬에서, 리어트는 숨어 살았다.

대륙에는 수인족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모든 것을 순순히 포기해왔다.

태어난 그 순간, 사는 방식도 미래도 전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섬에 어느 날 불쑥 나타난 윈터라는 작은 꼬마는 참 이상했다.

그의 물음에 픽 웃은 어린 윈터는 대수롭지 않은 듯 되물었다.

‘왜?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니?’

윈터가 매일 아파서 끙끙대는 걸 알고 있었다.

밤새도록 날뛰는 마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던 야윈 몸.

그런데도 눈에는 생기가 넘쳤다.

살고자 하는 의욕이 넘실대는 그녀를, 리어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 거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먹은 걸 죄다 게워내고, 핏기 하나 없는 입술로도 어린 윈터는 웃고 있었다.

그게 어딘지 섬뜩하면서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렇게나 윈터가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궁금해하다 보니 점점 자신이 그녀가 걱정하는 그 사람이길 바랐고, 끝내는 자신이 윈터를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