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상황을 보다 못한 에른스트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선황 미쉘라와 제 동생인 도미닉도 툭 하면 말도 안 되는 걸로 고집부리며 싸우곤 했으니까.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한 에른스트 후작이 마른침을 삼킨 뒤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차하면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예?”
갑작스러운 말에 윈터가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에른스트 후작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었다.
놀라운 것은 잠시 멈칫하던 메이딜리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것이었다.
“좋습니다.”
“지금 뭐가 좋다는……?”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윈터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상황에 담담한 것은 메이딜리언과 에른스트 후작뿐이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윈터가 벌떡 일어섰다.
“자, 잠깐, 잠깐만요!”
그러나 에른스트 후작은 작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메이딜리언에게 말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군요. 이만 출발하시죠.”
누가 봐도 혹시나 메이딜리언이 마음을 바꿀까 싶어 빠르게 움직이는 게 티가 났다.
그걸 뻔히 알고 있는 메이딜리언은 픽 웃으며 순순히 후작을 따라 일어섰다.
“예, 그러죠.”
“……허.”
결국 황당한 윈터만이 남았다.
함부로 거리를 좁혔다가 혹시라도 저주가 발동할까 봐 메이딜리언이 먼저 홀을 빠져나갔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에른스트 후작이 빙그레 웃었다.
“역시 보면 볼수록 선황 폐하와 닮았군요.”
“선황 폐하도 저러셨다고요?”
“아아, 뭐, 그랬죠.”
도미닉의 고집도 만만치 않아서, 두 사람이 싸우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의 진을 쏙 빼놓고는 했다.
당시 에른스트 후작은 그들의 말다툼을 ‘요란한 애정 싸움’이라고 짤막하게 명명하고는 했는데, 오랜만에 그런 장면을 마주한 것 같아서 감회가 남달랐다.
물론 아직 윈터와 메이딜리언은 당시의 미쉘라와 도미닉보다는 훨씬 순한 편이었다.
어느 누구도 논리 없는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열 받는다고 주변을 때려 부수지도 않고, 그러다가 속상하다며 펑펑 울지도 않았으니까.
‘폐하께서는 구제불능이십니다!’
‘무엄하구나! 감히 내게 구제불능이라니!’
뚝뚝 눈물을 흘리며 바락 외치던 도미닉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했다.
당연히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만 가십시다. 한시라도 빨리 베르무트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쩍 지친 얼굴로 에른스트 후작이 말했다.
“아아, 네, 알겠습니다.”
윈터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은 똑같이 생긴 마차 두 대에 나눠서 올랐다.
그리고 신성 도시 베르무트로 가는 길에 두 갈래로 갈라져 혹시 모를 암습에 대비하기로 했다.
문제는 크비누스가 노리는 것이 비단 메이딜리언뿐만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었다.
블라디미르 공작가도, 에른스트 후작가도 메이딜리언을 지지한다면 두고 두고 화근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럴 바에는 지금 싹 쓸어 버리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게 크비누스의 생각이었다.
덕분에 모처럼 그렇게 싸우고 일행을 둘로 나눈 것은 전혀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크비누스가 그들 모두를 없애기로 작정했으니까.
“하.”
마차 앞을 가로막은 군단을 보곤 메이딜리언이 작게 헛웃음을 지었다.
척 봐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살수들이었다.
“피, 피하십시오!”
선두에 있던 아디엘이 당황해서 바락 외쳤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코웃음을 치며 마차에서 내렸다.
“피하긴 뭘 피해.”
윈터가 없는 메이딜리언이란 고삐 풀린 망아지에 가까웠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아디엘이 흠칫 어깨를 굳혔다.
최근 메이딜리언의 예민함은 극에 달했다.
자기 때문에 윈터가 아프다는 사실이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결국 크비누스라는 생각에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아니, 굳이 크비누스 때문이 아니라도 그는 지금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살려서 보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좀 짜증이 났었는데 말이지.”
메이딜리언이 신경질적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곧 그의 손에 새카만 마력이 맺히기 시작했다.
윈터에게 보여줬던 잿빛 마력과는 사뭇 다른, 색깔부터 불길한 마력이었다.
“저, 전하?”
당황한 아디엘이 주춤 뒤로 물러서며 메이딜리언을 조심스레 불렀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이미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너희 모두를 아가씨에게 선물로 바쳐야겠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메이딜리언이 천천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당황한 살수들이 검을 들고 대척했지만, 그는 제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메이딜리언의 마력에 닿은 살수들은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서 쓰러지곤 했다는 것이었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풀썩, 인형처럼 쓰러지는 살수들을 보며 아디엘이 경악했다.
말 그대로 고요한 살육의 잔치였다.
쓰러지는 살수들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메이딜리언의 손에 맺힌 검은 마력도 커졌다.
“마, 말도, 말도 안 돼…….”
경악한 아디엘이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호위들도 마찬가지였다.
무투 대회에서 놀라운 기량을 보여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메이딜리언의 실력이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탓이었다.
무수한 살수들이 오직 메이딜리언 한 명에 의해서 초토화되었다.
메이딜리언의 몸에 났던 상처들 또한 살수들이 쓰러지고, 검은 마력이 커질 때마다 씻은 듯이 사라졌다.
“괴, 괴물……!”
마지막으로 남은 살수가 외쳤다.
그는 이미 싸울 의지를 잃고 바닥을 기고 있었다.
메이딜리언은 오랜만에 듣는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
손안에서 힘없이 사라지는 것들은 얼마나 우스운가.
피 한 방울 내지 않고, 오직 생명력만 빨아들인 검은 마력이 메이딜리언을 휘감고 요동쳤다.
악마의 현신 같은 섬뜩한 모습에 살수가 덜덜 떨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에게 자비라곤 없었다.
“으, 으아아악!”
손이 다가오자 머리를 감싸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살수의 움직임 또한 금세 멎었다.
곧 메이딜리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를 호위하던 기사단들이 움찔 몸을 굳혔다.
어쩐지 메이딜리언이 자신들의 숨통조차 끊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천천히 손을 든 메이딜리언은 그저 제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쉿.”
누구에게 비밀로 하라는 건지 알지도 못하고, 다들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딜리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윈터의 마차가 있는 쪽에서 퍼엉―! 하고 신호탄이 터졌다.
휙, 고개를 돌린 메이딜리언이 이를 악물었다.
“아디엘 경.”
“예, 예, 메이딜리언 님!”
한껏 공손해진 아디엘이 얼른 대답했다.
“내게 말을 줘.”
“……예?”
아디엘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은 것이었으나, 메이딜리언은 그걸 동의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는 아디엘의 곁에 있던 말에 가볍게 올라탔다.
“메이딜리언 님……?”
아디엘이 멍한 얼굴로 메이딜리언을 불렀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그녀의 부름은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그대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은 당연히 신호탄이 터진 곳, 윈터의 마차가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아디엘이 얼른 나머지 호위들에게 명령했다.
“너, 너희들도 얼른 메이딜리언 님의 뒤를 따라라!”
“예, 알겠습니다!”
곧 기사들을 포함한 호위들이 메이딜리언의 뒤를 쫓아 달렸다.
* * *
메이딜리언이 살수들과 한바탕하고 있던 그때, 윈터의 앞에도 살수들이 나타났다.
이럴 거라고 이미 예상했던 윈터가 혀를 쯧쯧 찼다.
“그래도 저희 쪽에 와서 다행이네요.”
“흐음.”
바깥 상황을 바라보던 에른스트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래도 둘 다 노리기로 한 것 같군요.”
“예……?”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지 못한다면, 둘 다 노리는 게 크비누스의 방식입니다.”
“그럼, 지금…….”
메이딜리언도 습격을 받고 있다는 건가?
윈터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는 곧 마차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때가 아니네요. 최대한 빨리 처리하죠.”
“예? 아니, 잠깐……!”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윈터가 재빨리 마차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녀가 준비한 호위들도 충분히 정예였지만, 몰려온 살수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주 작정을 했네, 작정을 했어.”
야비한 크비누스를 향해 쯧쯧 혀를 찬 윈터가 허리춤에서 마도구를 꺼냈다.
얼마 전 아이셀이 개량해준 덕분에 더 가볍고, 마력 조절도 용이해졌다.
게다가 이름도 생겼다.
‘녹스라고 짓는 게 어때?’
짧고 부르기 쉬운 이름이라 윈터도 꽤 맘에 들었다.
이름이 생기니 한층 더 애착도 생기는 것 같고.
아무튼, 녹스를 손에 쥔 윈터가 그대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탕, 하고 발사된 마력탄이 앞으로 쇄도하더니 그대로 넓게 퍼졌다.
순식간에 스무 명이 넘는 살수들의 발이 얼음에 묶였다.
“아가씨!”
살수들 셋을 한 번에 상대하고 있던 데보라가 놀라서 외쳤다.
마차에 있어야 할 윈터가 밖에 나와 있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빨리빨리 끝내자.”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 윈터가 무수한 얼음 창을 만들어내 앞으로 쐈다.
무투 대회 때야 마도구를 쓰는 것 자체가 반칙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그녀의 손에 녹스가 있는 한 마력이 함부로 날뛸 일은 없을 거였다.
그래,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윽.”
살수들이 한창 수세에 몰렸을 때쯤, 윈터가 비틀거렸다.
지잉―하고 뇌를 잡고 흔드는 듯한 진동에 도저히 몸을 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윈터가 헛구역질을 했다.
지독한 어지럼증.
혹시나 메이딜리언이 근처에 있나 싶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메이딜리언과 있을 때보다 빠르게 마력이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순간 윈터의 머릿속에 아이셀의 경고가 떠올랐다.
‘잘못 폭주했다가는 너 하나 죽는 걸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진짜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