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50)

58화

“이걸로 닦으시죠.”

“하하, 고맙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듯 손수건을 받아든 에른스트 후작이 상처를 지혈했다.

살짝 베인 것 치고는 피가 좀 많이 나와서 윈터의 표정은 한껏 경직되었다.

그러나 정작 에른스트 후작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오호, 듣던 대로 실력이 대단하군요.”

“아, 하하하.”

윈터는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원작의 에른스트 후작은 늘 진중하고, 현명한 메이딜리언의 조언자였다.

동시에 일찍 죽은 동생이 유일하게 세상에 남기고 간 조카를 아끼던 다정한 큰아버지였는데.

지금 그녀가 마주한 후작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쯤 빠진 것 같은 괴상한 중년 미남이었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요. 페르노 에른스트입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윈터 블라디미르입니다.”

달이 밝은 밤에 두 사람은 대뜸 악수를 나눴다.

슬쩍 웃는 에른스트 후작의 얼굴이 어딘가 메이딜리언을 떠올리게 했다.

언젠가 메이딜리언이 나이가 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메이딜리언은 에른스트 후작처럼 성스러운 인상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조금 타락한 느낌이긴 하지만.

“몸이 안 좋다 들었는데. 아픈 건 괜찮습니까?”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금방 괜찮아졌습니다.”

“흐음, 다행이군요.”

고개를 주억거린 에른스트 후작이 다시 윈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잠깐 같이 걸을까요?”

“예, 좋습니다.”

안 그래도 에른스트 후작이랑 한 번쯤은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윈터였다.

그런데 당사자가 직접 제 발로 나타나다니.

마침 또 밤늦은 시간이라 주변에는 두 사람의 대화를 방해할 만한 사람조차 없었다.

이 대단한 횡재에 윈터의 마음이 조금 들떴다.

라벤더가 가득한 후원을 걸으며 두 사람은 소소한 대화부터 나누기 시작했다.

수도의 동향부터 이번 무투 대회에 대한 짧은 소회까지.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지 않게 윈터와 에른스트 후작은 막힘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게다가 두 사람은 메이딜리언이라는 공통의 주제까지 가지고 있었다.

“흐음, 그래서 그자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겁니까?”

“예. 중요한 증언을 해야 해서 아직까지는 살려뒀습니다. 물론 조만간 요긴하게 쓰고 처리할 거지만요.”

어릴 적부터 메이딜리언을 학대하던 타이그에 대해 얘기할 때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분노했고,

“그래서 같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릴 때부터 가리는 것 없이 쏙쏙 잘 흡수하더군요.”

“하하, 그때부터 아주 될성부른 떡잎이었군요!”

“당연하죠. 검술이면 검술, 학문이면 학문, 가르치는 족족 성취가 뛰어나서 감탄을 안 하는 선생이 없었는걸요.”

주인공답게 뭐든 척척 잘 해내던 이야기를 할 때는 깔깔 웃고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

“내가 그동안 소공작을 좀 오해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한참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수다를 떨던 에른스트 후작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대뜸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윈터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오해요?”

“그래요. 예를 들면, 으음, 아르카 단원들이랑 비슷한 생각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아.”

아르카 단원들이라는 말에 윈터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일전에 한타와 대화를 하며 아르카 단원들이 윈터를 외부인 취급하던 것을 짚었던 그녀였다.

에른스트 후작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얼굴도 알지 못하던 윈터에게 약간의 원망을 가지고 있었다.

황위에 관심이 있기는커녕 아가씨만을 찾으며 블라디미르 공작가에 머무는 메이딜리언이 야속해서 더욱 그랬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른스트 후작의 머릿속에는 윈터가 메이딜리언을 묶어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연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그는 그런 게 전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블라디미르 소공작은 어떻답니까?’

‘괜찮아지실 겁니다. 저만 없으면 원래도 괜찮으셨던 분인걸요.’

타인에게 관심도 없고, 늘 시큰둥하던 조카였다.

그런데 저렇게 자신 없고 우울한 모습이라니.

에른스트 후작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의 안에서 메이딜리언은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히지 않는, 당당한 패왕이었다.

메이딜리언을 떠올리면, 에른스트 후작은 자연스레 그와 처음 대면하던 날이 생각났다.

어릴 적부터 몰래 후원해오며 멀리서 지켜보던 자신을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3년 전쯤 느닷없이 후작가에 찾아와 담판을 지었다.

그때 메이딜리언이 제게 했던 말을, 후작은 아직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지원하라더군요.”

“메이가요?”

“네, 그럼요.”

아직 애티를 벗지도 못하던 어린 녀석이 눈에 독기가 가득해서는, 어떻게든 황제가 될 테니 제대로 도우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윈터는 의외라는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에른스트 후작은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후작가의 다른 사용인들에게서도 전해 들었지만, 메이딜리언은 오직 윈터 앞에서만 순한 양이었다.

오전에 기별도 없이 후작가 저택에 찾아온 메이딜리언이 얼마나 사색이 되어 있었는지 윈터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지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원이 필요합니다.’

신성 도시 베르무트로 향해야 할 메이딜리언의 일행이 후작가 저택 앞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가.

그러나 인사도 생략한 메이딜리언은 그에게 대뜸 그렇게 말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블라디미르 소공작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후작은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메이딜리언의 표정을 보고 나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윈터는 메이딜리언을 공작가에 묶어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메이딜리언이 그녀의 곁에 있기 위해 기꺼이 목줄을 매고 있는 것에 더 가까웠다.

“생각보다 실망도 많이 하고, 걱정도 꽤 되는 모양이더군요.”

“저주라는 말에 저도 아주 놀랐습니다.”

“우선 매개체를 찾아보고는 있지만, 다행히 메이딜리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는 듯합니다.”

“그거 잘됐네요. 우선 친자 검사부터 해야죠.”

당연하다는 듯 나오는 윈터의 대답에 에른스트 후작이 소리 없이 웃었다.

한쪽은 벌써 자각한 애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쪽은 그런 애정을 받아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에른스트 후작은 메이딜리언이 딱히 가엽지는 않았다.

메이딜리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선황 미쉘라의 아들이었다.

제 동생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결국은 그 몸과 마음을 전부 쟁취한 대단한 여자.

“부디 조심하십시오.”

“네, 그래야죠. 당분간 메이 곁에 가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요?”

“으음…….”

딱히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도 못하고 에른스트 후작이 끙끙 앓았다.

“겉은 도미닉을 닮았을지 모르지만, 성격은 미쉘라와 똑 닮았거든요.”

메이딜리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언급하며 에른스트 후작의 얼굴이 시름에 잠겼다.

만약 아직 메이딜리언의 욕망이 채 꽃을 피우지 못한 상태라면, 그것이 완전히 개화하기 전에 윈터가 벗어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메이딜리언 또한 원하는 건 반드시 쟁취할 겁니다.”

“네, 그럼요.”

윈터는 그것이 황위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에른스트 후작은 왠지 자꾸만 메이딜리언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냥 해맑은 윈터가 조금 안쓰러웠다.

예전에 자신의 동생이 그랬듯, 가시밭길밖에 남지 않은 듯한 그녀의 앞길을 보면 저절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얼른 도망치십시오. 이미 늦은 것 같긴 하지만…….”

후작이 염려를 가득 담은 말을 건넸으나, 애석하게도 바람이 그의 미약한 목소리를 전부 빼앗아가고 말았다.

* * *

다음날, 나름대로 컨디션을 회복한 윈터는 메이딜리언과 멀찍이 떨어진 채 제 의사를 전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니, 신성 도시 베르무트까지 가는 행렬을 둘로 나누기로 한 것이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저주까지 걸린 상황이었다.

매개체를 찾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윈터는 과감히 원인을 제거하기로 했다.

“인원을 둘로 나누죠.”

윈터의 말에 메이딜리언이 드물게 인상을 썼다.

그는 굳이 호위 인원을 나눠 윈터를 위험하게 하기 싫었다.

만에 하나 습격이라도 일어난다면, 윈터는 또 마력을 사용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어떻게든 그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반대합니다. 굳이 위험하게 왜 그래야 하죠?”

“암살에 대비하려면 이게 더 나으니까요.”

한 번도 제 의견에 토를 단 적 없는 메이딜리언이었다.

그러나 윈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제 주장을 펼쳐나갔다.

암살 위협에 대비해 마차를 두 개로 나누는 것은 메이딜리언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당연한 처사였다.

“어느 쪽인지 모르게 동일한 마차로 이동할 겁니다. 상대를 교란하려면 이만한 방법이 없죠.”

담담하게 이어지는 윈터의 말에 메이딜리언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암살 위협 정도는 그 혼자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하는 윈터가 메이딜리언은 야속하기만 했다.

혹시 윈터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닐까? 자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의 의견은 좀처럼 굽혀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고집을 부리면 혹시라도 윈터가 싫어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 한편,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윈터가 위험한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을 싫어하게 되는 게 낫다 싶기도 했다.

“아가씨가 다치느니 차라리 제가 죽는 게 나아요.”

끝내 메이딜리언이 그렇게 말했다.

저주 때문에 가까이서 말하지도 못하고 연회장 거의 끝과 끝에 서서 대치하는 두 사람 사이로 이쪽저쪽 옮겨가던 시선들도 우뚝 멎었다.

“너, 진짜…….”

결국 윈터는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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