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블라디미르 가문의 윈터라는 말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최근에 수도에서 메이딜리언과 함께 가장 많은 소문을 몰고 다니는 인물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두 가지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실력자.
차기 대현자의 재목으로 뽑히는,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후계자.
듣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수식어들이 그녀의 뒤를 가득 따라다녔지만, 기사는 순간 그 모든 말들을 잊어버렸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는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것인지 순식간에 그를 홀려 버렸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기사는 윈터가 뭐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옆으로 길을 비켜섰다.
“아, 안으로 드시지요.”
짧게 고개를 끄덕인 윈터가 황궁의 장미정원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었다.
어깨 위의 견장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오늘 그녀의 역할은 메이딜리언이 신성 도시 베르무트까지 안전히 도착할 수 있도록 호위하는 일이었다.
비록 결승전은 메이딜리언이 대신 출전했지만, 사실상 이번 무투 대회의 우승자는 바로 윈터였다.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배경까지 더해지니, 이번 여정에서 그녀만 한 적임자는 찾기 힘들 것이었다.
“저분이 바로 그…….”
“복장이 아주 특이하군요.”
“그러게요. 그런데 아주 잘 어울려요.”
마치 승마복 같기도 하고 기사단의 정복 같기도 한 윈터의 차림을 보며 사람들이 작게 속닥거렸다.
투버튼으로 된 검은색 재킷은 금색 실로 수를 놓아 장식하고, 같은 색의 바지는 조금 타이트하게 다리에 감겼다.
종아리까지 오는 검은색 가죽 부츠가 햇빛에 티끌 하나 없이 반짝였다.
잘 다듬어진 그녀의 단발과 미친 듯이 잘 어우러져 묘한 박력을 자아냈다.
전생의 제복을 참고한 이 의상은 윈터가 오늘만을 고대하며 특별히 제작한 것이었다.
“브, 블라디미르 가문의 윈터입니다!”
그랜드 홀 입구에 선 윈터를 홀린 듯 바라보던 시종이 얼른 크비누스에게 그녀의 도착을 고해바쳤다.
마침내 육중한 소음을 내며 문이 열리고, 잠시 멈춰 섰던 윈터가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황좌에 앉은 크비누스의 오른쪽으로는 아스터가 서 있었다.
메이딜리언은 두 사람보다 한 칸 아래에서 천천히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메이딜리언의 선홍빛 눈동자가 윈터를 마주했다.
윈터는 묘한 짜릿함에 순간 전율했다.
언젠가 크비누스를 밀어내고 저 자리에 올라앉을 메이딜리언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저자가 바로 그…….”
“몸이 약하다더니,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요?”
“이번 무투 대회 때 못 보셨습니까?”
“국외로 파견 다녀오느라, 하하. ‘행운의 윈터’라든가, 뭐 신기한 별명이 붙었던데요?”
“그게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아직은 신원이 불분명한 메이딜리언과 달리 윈터에 대한 반응은 지극히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크비누스의 심기에 영 거슬렸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일그러진 크비누스의 표정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러나 윈터는 보란 듯이 활짝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메이딜리언이 더없이 반가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메이딜리언 또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귀족들이 쑥덕거렸다.
“역시 블라디미르 공작가가 뒤에 있는 게 확실하군요.”
처음 블라디미르 공작이 이번 호위에 딸을 보내겠다고 했을 때, 다른 이들은 사실 반신반의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원하는 사람치고는 공작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은밀히 시선을 교환하는 윈터와 메이딜리언은 어떠한가.
척 봐도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처럼 보였다.
게다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던 블라디미르 공작의 얼굴과는 달리, 발 빠른 사용인들이 전한 소식은 놀라웠다.
프림로즈 궁 앞에 메이딜리언의 호위로 약 40명이 넘는 인원이 집결했다던가.
그것도 그냥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잘 훈련된 정예로 보였다고 했다.
보나 마나 초라하고 볼품없는 행렬을 예상했던 귀족들의 얼굴에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굳이 친자 검사를 해 볼 필요도 없는 것 아닙니까?”
블라디미르 공작가가 신원도 확실하지 않은 자에게 저렇게 공을 들일 리가 없다.
모두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그것이 윈터가 노린 부분이었다.
감히 크비누스의 음해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무엇보다 확실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
“또 모르죠. 블라디미르 공작가가 워낙 악명이 높지 않습니까.”
“크흠, 거, 말은 가려서 하십시다!”
귀족들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블라디미르 공작가를 경계하던 이들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빴고, 발 빠르게 메이딜리언 쪽으로 붙으려는 듯 호의 가득한 말을 내뱉는 자들도 있었다.
섭정 황제가 영원히 권세를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정치에 잔뼈가 굵은 귀족들은 벌써 다음 세대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아르만 백작이 못마땅해도 아스터 외에는 별 선택지가 없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별 볼 일 없는 아르만 백작보다야 에른스트 후작가와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지지를 업고 있는 메이딜리언이 훨씬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처럼 보였다.
이미 칼리스타를 통해 귀족들의 동태와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던 윈터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소문이 아주 허황된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둘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 아닙니까?”
윈터와 메이딜리언이 한자리에 있는 그림을 보며 작게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감히 프림로즈 궁 같은 데에 메이딜리언을 처박아 둘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귀족들이 윈터는 영 못마땅했다.
사실 원작에서는 에른스트 후작가가 이미 메이딜리언이랑 말을 맞추고 귀족 회의에서 정식으로 친자 검사를 발의하는, 나름대로 온건하고 점잖은 방식을 쓴 덕에 지금처럼 반발이 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메이딜리언은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윈터는 누구도 그를 만만히 보지 못하도록 작정하고 화려한 행렬을 꾸렸다.
이번 베르무트 행에 동행을 자처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블라디미르 가문의 윈터, 폐하를 뵙습니다.”
윈터가 왼쪽 가슴에 손을 대고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세웠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우아한 인사였다.
“이번 무투 대회의 우승자를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군.”
하나도 반갑지 않은 말투로 크비누스가 화답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윈터는 크비누스의 심드렁한 말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그게 메이딜리언과 꼭 닮아 있어서, 크비누스의 심기는 더더욱 불편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 들뜬 표정으로 마침내 윈터가 메이딜리언과 눈을 맞췄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메이딜리언은 어딘지 조금 긴장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 윈터가 한쪽 무릎을 완전히 굽혔다.
크비누스의 얼굴은 썩어 들어갔고, 귀족들은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바로 코앞에 있는 황제에게도 굽히지 않던 자세였기 때문이다.
윈터가 메이딜리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세상에 단둘밖에 없는 듯, 그녀의 열렬한 시선이 메이딜리언만을 향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메이딜리언이 마침내 그 손을 잡았다.
* * *
그랜드 홀에서 멋지게 메이딜리언을 데려온 윈터는 막상 마차에 그와 단둘이 있게 되자 꾹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반가움이 지나고, 잊고 있던 어색함이 물밀듯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어? 어어. 응. 아, 아니. 네.”
윈터의 어색한 존대에 메이딜리언이 작게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평소처럼 해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직 정식 황자도 아닌데요, 뭘. 그리고 황자가 되어도 아가씨랑은 이렇게 대화하는 게 편해요.”
사실 윈터도 그렇긴 했다.
결국 그녀는 못 이긴 척 굳어 있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 그럼…… 그럴까?”
말투에서도 힘이 빠졌다.
후후, 바람 같은 웃음과 함께 메이딜리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훨씬 낫네요.”
사실 메이딜리언은 평소보다 훨씬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황궁에 있으면서 매일 밤 같잖은 암살 시도를 받아 짜증이 좀 올라왔었는데, 오늘 저를 위해 한달음에 달려온 윈터를 보니 그 모든 감정들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랜드 홀의 문이 열리고, 오롯이 그만을 바라보며 걸어오는 윈터라니.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제 눈앞에서 펼쳐지자 메이딜리언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아냈지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윈터를 끌어안고도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얼굴을 본 윈터가 한껏 자신을 의식하며 시선을 못 맞추고 있으니 기분은 한층 더 상승 곡선을 탔다.
“아가씨.”
“으, 응?”
“보고 싶었어요.”
어딘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윈터가 그대로 끼룩 굳었다.
메이딜리언은 그런 윈터를 보며 양껏 그녀의 반응을 즐겼다.
언제나 당황스럽고 답답한 건 자신이었는데, 자기 때문에 윈터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하는 게 퍽 맘에 들었다.
“아가씨는요?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으음, 나는, 어, 그러니까…….”
전에 없이 윈터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급기야 안색이 창백해지기까지 했다.
처음엔 얌전히 윈터의 대답을 기다리던 메이딜리언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뭔가, 윈터의 반응이 이상했다.
저건 당황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아가씨!”
벌떡 몸을 일으킨 메이딜리언이 휘청이는 윈터의 몸을 얼른 지탱했다.
“메, 메이.”
“아가씨, 갑자기 왜 그래요?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메이딜리언이 윈터의 이마를 짚었다.
평소보다 체온이 훨씬 낮았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윈터가 제 입을 틀어막더니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몸이, 몸이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