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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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비누스는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메이딜리언에게 옹졸하게 굴었다.
거리에서는 벌써 메이딜리언이 선황과 황실을 능멸한 희대의 거짓말쟁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게 과연 누구의 솜씨인지는 뻔했다.
“아무래도 그대의 말에 대한 진위성을 빠르게 검토해보아야겠군.”
사람들을 가득 모아놓은 그랜드 홀 한가운데에 메이딜리언을 불러 세워두고, 크비누스는 친히 시종을 시켜 수도에 떠도는 악의적인 소문들을 읽게 했다.
메이딜리언이야 워낙 어릴 때부터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었던 터라 이 정도 면박은 웃으며 넘길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함부로 메이딜리언을 도왔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무언의 압박에 귀족들은 벌써 질려가는 중이었다.
“그대는 이번 주 내로 베르무트로 가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오라.”
“예, 알겠습니다.”
신성 도시 베르무트.
고대 신화에 따르면 초대 황제의 핏줄은 모두 베르무트의 대신전에서 가호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황족들에게 주어지는 보호 마법도 그 가호의 일종이었다.
물론 크비누스는 순순히 메이딜리언에게 그 가호를 받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죽이기도 귀찮게 가호 같은 걸 받기 전에 세상에서 그 존재를 없애버릴 작정이었으니까.
“누가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하겠는가?”
크비누스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본래라면 황족들과 함께 베르무트에 가는 것은 신의 기적을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동행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영광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새로운 황족이 태어나면 저마다 호위를 자처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조금 달랐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서로의 눈치만 보는 귀족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똑같았다.
‘영광은 개뿔.’
메이딜리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 다들 뻔히 알고 있는 데다 본인도 저렇게 시종일관 티를 내고 있으면서.
변변한 사용인 하나 없이 프림로즈 궁에 갇혀 있다시피 한 메이딜리언의 상황을 귀족들은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감히 섭정 황제의 눈에 거슬릴 생각이 없는 그들은 슬금슬금 서로의 눈치만 보는 상황이었다.
섣불리 나서는 자가 없자, 크비누스가 비죽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이리도 조용할 수가 있나.”
대놓고 조롱하는 크비누스의 말에도 메이딜리언의 표정엔 미동도 없었다.
이 순간 그를 지지해줄 만한 에른스트 후작가는 아직 제 영지에서 채 출발도 못 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제 딸을 보내겠습니다.”
차분한 음성이 그랜드 홀을 갈랐다.
앞으로 나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블라디미르 공작이었다.
언짢은 기색을 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크비누스가 되물었다.
“호오, 공작의 딸을 말인가?”
“예. 맞습니다.”
공작의 금빛 눈동자가 메이딜리언을 향했다.
블라디미르 공작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메이딜리언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 조만간 섭정 황제가 메이딜리언에게 베르무트로 가라고 명할 거예요.’
마치 미래를 훤히 내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윈터는 확언했다.
안 그래도 에른스트 후작이 수도로 올라오겠다고 한 참이었다.
영악한 크비누스가 감히 메이딜리언과 그를 만나게 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마 아무도 호위 자리에 지원하지 않겠죠.’
가볍게 코웃음을 친 윈터가 공작에게 말했다.
‘거기에 제가 갈게요.’
무투 대회에 출전한 뒤로 안 좋아진 몸이 아직 다 회복되지도 않았다.
여전히 창백한 낯의 딸을 보며 블라디미르 공작은 걱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꼭 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나설 거다.’
황궁에 꼭 크비누스의 눈치가 보여 설설 기는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자들은 어떻게든 2황자라는 새로운 세력에 붙어 명줄을 이어가려고 하겠지.
그러나 윈터는 여전히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 중 누가 저만큼 할 수 있는데요?’
놀랍게도, 블라디미르 공작은 윈터의 그 물음에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지던 딸의 지극정성을 그녀가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엔 당연히 제가 나서야죠.’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하는 윈터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빛났다.
공작은 딸이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은 오직 메이딜리언이 관련된 일일 때만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어릴 적부터 남들을 생각할 줄도 모르고, 모든 것에 쉽게 싫증을 내던 윈터였다.
저렇게까지 이타적인 마음으로 온전히 집중하는 대상은 오직 메이딜리언뿐이었다.
블라디미르 공작은 이번에도 끝내 딸을 말리지 못했다.
‘이러려고 돈 번 거니까요.’
마른 장작에 불이라도 붙인 것처럼, 윈터의 전투력이 활활 타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칼리스타로 벌어들인 돈을 이번 호위를 꾸리는 데에 전부 투자할 것처럼 굴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은근히 돌던 핑크빛 소문도 함께 활활 타올랐다.
메이딜리언이 무투 대회에 윈터의 대타로 출전한 것도 정치적인 계략보다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흑기사처럼 보였다.
놀랍게도 그게 진실에 무척이나 가까웠다.
단 한 사람, 그 소문을 전면 부정하는 자가 있었지만.
“아니, 다들 대체 눈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윈터가 투덜거렸다.
“평소에는 잘만 음흉한 가문이라는 둥 없던 말도 만들어서 욕했으면서, 왜 불똥이 이쪽으로 튀어?”
결 좋은 검은 빛 단발이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을 때마다 살랑거렸다.
불퉁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윈터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메이딜리언에게 프림로즈 궁이 배정되고 난 뒤, 그녀는 여러 차례 사람과 돈을 써서 편지와 필요한 물건들을 가득 보냈다.
메이딜리언은 그때마다 짤막한 답장을 보내왔다.
[저는 늘 잘 지내고 있어요.]
많아야 두 문장이었지만, 놀랍게도 그것이 윈터가 메이딜리언에게 처음으로 받아보는 편지였다.
그녀는 혹시나 종이가 구겨지거나 상하지는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며 튼튼한 상자 하나를 구해 와서 메이딜리언의 편지를 보관했다.
‘하여간 너도 유난이다, 유난이야.’
보존 마법을 걸어달라는 요청에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던 아이셀의 표정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했다.
그러나 윈터는 메이딜리언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바뀐 잠자리가 낯설지는 않은지. 안 좋은 위협은 없는지. 정말로 견딜 만한 건지.
그날 밤, 그녀에게 입 맞췄던 일은 기억 저 너머로 보낸 것처럼 애써 외면한 채 윈터는 오직 메이딜리언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그때마다 메이딜리언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자신은 더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쯧, 역시 너를 보낼 걸 그랬나.”
아쉬움이 역력한 얼굴로 윈터가 중얼거렸다.
맞은편에 있던 데보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디에요?”
“프림로즈 궁에.”
궁에 들여보냈던 자들은 블라디미르의 사람들이긴 했지만 완벽하게 윈터의 사람은 아니었다.
혹시나 중간에 중요한 정보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윈터도 메이딜리언도 편지에는 적당히 말을 가려서 썼다.
“뭐 중요하게 전하실 말이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사실 윈터가 편지에 쓰려던 말도 단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보고 싶다고.
그렇게 쓰고 싶었다.
사실 쓰려면 얼마든지 써도 됐지만, 윈터는 일부러 제 속내를 감췄다.
메이딜리언이랑 잠시 떨어진 사이 그녀의 마음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나니 상황은 명확했다.
황제가 된 메이딜리언에게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보다 더 어울리는 짝이 있었으니까.
“이번 호위에 칸나도 같이 오면 좋았을 텐데.”
무투 대회에서 크게 다쳤던 칸나는 윈터가 보내는 산해진미와 고급 약재를 꼼꼼히 챙겨 먹었다.
안 그래도 회복력이 빠른 그녀는 덕분에 금세 튼튼하고 활기찬 똥강아지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메이딜리언에게 맹렬한 살기를 피워서 윈터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알고 보니 그가 황자였다는 사실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랬다간 둘이서 싸우다가 행렬이 엉망진창이 되었을걸요.”
“그럴 리가.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 아니겠어?”
윈터의 중얼거림에 데보라가 기겁했다.
엘리슨도 데보라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아르카에서 호위를 몇 명 차출해달라는 윈터의 요청에 칸나를 제외한 다른 정예들을 보내왔다.
하지만 윈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죽이지도 않고 살려뒀잖아, 안 그래?”
애초에 끝내주는 인성을 자랑하는 메이딜리언이 상대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부터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원래 서로 싫어하는 관계가 나중에 더욱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는 법이었다.
“둘은 이미 사랑하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빠진 윈터를 보며 데보라의 가면 속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윈터는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반짝였다.
“데보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아뇨. 그, 그건 좀…….”
“뭐어?”
윈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데 타이밍도 좋게 마차가 멈춰 섰다.
기다렸다는 듯 데보라가 일어나서 마차 문을 열었다.
“와, 와아. 드디어 황궁이네요, 아가씨! 얼른 내리시죠.”
아직 할 말이 한참이나 남았지만, 윈터는 일의 우선순위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얕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곧 마차에서 내렸다.
유례없이 화려한 행렬에 황궁의 기사들부터 시작해서 궁인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녀에게 꽂혔다.
저마다 휘둥그레 눈을 뜨고, 입을 떡 벌리는 모습에 윈터가 가볍게 웃었다.
“시, 신원을 밝히십시오!”
삐걱거리며 다가온 기사가 크게 외쳤다.
마차에 대문짝만하게 박힌 블라디미르 공작가의 문장을 그가 못 본 것은 아니었지만 황궁에 방문한 자들은 으레 거치는 절차였다.
윈터는 기사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블라디미르 가문의 윈터. 2황자 전하를 모시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