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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150)

53화

‘전 아무것도 못 봤어요.’

보호 마법을 보고도 모른 척해주던 윈터가 떠올랐다.

당시엔 당황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상황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어쩌면 윈터는 처음부터 자신이 황자라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녀의 목표는 무엇일까?

아스터의 표정이 조금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메이딜리언을 보며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

크비누스의 서릿발 같은 음성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예, 사실 친자 검사 한 번이면 다른 증명이 없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원작에서는 크비누스가 친자 검사를 차일피일 미루며 그의 정당성을 의심했었다.

당시에는 증언을 해줄 만한 마구간지기, 타이그 또한 어린 시절 메이딜리언을 학대하며 이미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뒤였다.

그러니 사실상 친자 검사가 아니라면 메이딜리언은 자신이 황자라는 주장과 에른스트 후작가의 지지 말고는 가진 게 없었다.

덕분에 초반부터 고생을 좀 했었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렇게 공공연하게 친자 검사라는 화두를 던졌으니, 크비누스가 마냥 친자 검사를 미룰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이젠 메이딜리언의 뒤에 에른스트 후작가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니라면 감히 황실을 능멸한 죄로 네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물론이죠.”

으르렁거리며 윽박지르는 말에도 메이딜리언의 태도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어디로 보나 외삼촌과 조카의 애틋한 가족 상봉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런 두 사람의 대치를 보던 로딘 남작이 슬쩍 말을 얹었다.

“저, 그, 그럼 황자 전하의 거처는 어찌할까요……?”

크비누스가 그 말에 휙 시선을 돌렸다.

흠칫 놀란 로딘 남작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때 앞으로 나선 것은 아스터의 친부인 아르만 백작이었다.

그는 아스터를 인질로 잡은 채 크비누스에게 알랑거리며 황궁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2황자라니. 그야말로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크비누스와 마찬가지로 메이딜리언의 존재가 달갑지 않은 그는 입가를 가린 채 교묘한 말을 속살거렸다.

“무투 대회에서 우승하자마자 제 신분을 밝히고, 심지어 그것이 진작 사산된 줄로만 알았던 2황자 전하라니. 너무 시기가 적절하지 않습니까?”

힐난하는 눈초리가 메이딜리언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직 2황자 전하라는 확신도 없는 외부인을 어찌 함부로 황궁에 들이겠습니까.”

제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적절한 말을 꺼내는 아르만 백작을 보며 크비누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다른 귀족들은 척 봐도 메이딜리언을 못마땅해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있었다.

소리소문없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지금은 섣불리 말을 꺼낼 때가 아니었다.

당장 내일 자신을 2황자라고 주장하는 저 남자가 시체로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저마다 속내를 숨긴 채 크비누스와 아르만 백작이 펼쳐놓은 촌극에 동참했다.

“아르만 백작의 말에 적극 동의합니다.”

“맞습니다. 조금 더 신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런가. 과연 경들의 말도 일리가 있군.”

비죽 웃음을 지은 크비누스가 몸을 돌려 물었다.

“그럼 이 자의 거처를 어디로 하면 좋겠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아르만 백작이 대답했다.

“프림로즈 궁으로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 그런……!”

입속의 혀처럼 구는 아르만 백작의 말에 크비누스는 만족했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은 크게 놀라며 웅성거렸다.

수도 폴렌슈타인에 있는 황궁은 하나의 작은 도시와 같았다.

거대한 규모의 황성에는 황족들의 거처뿐만 아니라 신전부터 기사단 병영, 시종들의 숙소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프림로즈 궁은 특별히 별칭이 붙은 장소였다.

‘그림자 궁전.’

그것이 프림로즈 궁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곳은 예로부터 유폐된 황족이나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할 귀빈들을 모시던 궁으로 황궁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

은밀한 냉대와 질시가 가득한 말에 크비누스가 애써 미소를 참아냈다.

“나라를 생각하는 충신들이 이렇게까지 간언하니, 안타깝지만 내 너를 아직은 함부로 들일 수가 없구나.”

“괜찮습니다.”

이 정도 수모는 아무것도 아닌 메이딜리언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크비누스가 일부러 그의 신경을 긁었다.

“친자 검사 결과에 따라 얼마든지 황자의 대우를 해줄 것이니 너는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예, 그러죠. 폐하.”

황금관을 쓴 메이딜리언이, 이미 황제라도 된 것처럼 짤막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알 수 없는 모멸감에 크비누스의 얼굴이 불쾌하게 달아올랐다.

이 소식에 기분이 더러워진 것은 비단 크비누스뿐만이 아니었다.

“감히, 감히 우리 메이한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윈터도 주먹을 파들파들 떨었다.

원작에서 이미 한 번 봤던 흐름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실제로 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누가 봐도 명백한 홀대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열이 뻗쳤다.

“누구도 우리 메이를 얕보지 못하도록 만들어줘야 하는데!”

“진정해. 아직 몸도 다 안 나았어, 너.”

보다 못한 아이셀이 말렸으나 윈터는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콧김을 씩씩 뿜으며 크비누스와 아르만 백작을 쏘아보던 윈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언니, 우리 이만 가자.”

“뭐야. 저 꼬맹이랑 인사도 안 나눠?”

원래 같았으면 득달같이 쫓아가서 말이라도 한마디 더 얹었을 윈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싸고도는 메이딜리언을 두고 먼저 가다니.

아이셀의 물음에 윈터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그, 그런 건 편지로도 충분해.”

사실 아직까지 혼란스러운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메이딜리언을 마주해봐야 오히려 그에게 휩쓸리기만 할 거라는 걸 윈터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메이딜리언은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흐응,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아이셀은 그런 윈터의 반응에 눈을 가늘게 떴다.

두 사람 사이에 분명 뭔가 지각변동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는 걸 윈터가 몸소 알려주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얼른 와!”

“어어, 갈게!”

윈터가 메이딜리언 쪽을 돌아보는 아이셀을 재촉했다.

곧 그녀는 쿵쿵, 발을 구르다시피 하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자신의 바람대로 황제가 되겠다고 메이딜리언이 선언했다.

과정이 어떻든, 메이딜리언이 한 번 그렇게 말했다면 그는 감히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윈터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계획을, 드디어 실행할 때가 된 것이다.

“두고 보자고.”

까드득, 이를 갈며 윈터가 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 * *

건국제의 끝은 혼란과 소문들로 가득했다.

무투 대회 결승전은 대타가 치른 데다, 알고 보니 그 대타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황자라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점점 살이 붙고, 상상과 악의가 담겨 이리저리 퍼져나갔다.

“흐음, 드디어 후작이 움직이는군.”

하녀들에게 단장을 맡긴 채 윈터가 작은 쪽지를 펼쳐보았다.

메이딜리언의 친부, 그러니까 도미닉 에른스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죽고 나서 충격에 빠진 에른스트 후작은 그대로 정계를 떠나 가문에 칩거했다.

현자의 가문, 그리고 황제의 연인이라는 이름값으로 나름의 권세를 누리던 그들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아들의 죽음이 충격적이었던 걸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에른스트 후작은 사망했다.

아버지와 동생을 동시에 잃고, 장자였던 페르노 에른스트가 가문을 이어받았다.

윈터가 줄곧 감시하고 있던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메이딜리언을 후원하고 있었으니까.

“후작님이요……?”

호위 명목으로 윈터의 곁에 서 있던 데보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녀는 비밀 호위대라는 이름답게, 하녀들 앞에서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려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쉽지 않을 거야.”

황제는커녕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에 딱히 열의를 보이지 않던 메이딜리언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무투 대회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덜컥 저를 황자라고 밝혀 에른스트 후작도 무척이나 혼란스럽겠지.

크비누스는 에른스트 후작이 그러든 말든 메이딜리언에게 굳이 힘 있는 세력을 붙여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에른스트 후작이 황궁에 오는 즉시 누구보다 강력한 메이딜리언의 지지자가 될 것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니까.

“하긴, 와도 소용없겠네요.”

계략이라곤 모르고, 정치에는 관심조차 없는 데보라도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른스트 후작과 메이딜리언이 마주치지 못하게 하고자, 크비누스는 빠르게 명을 내렸다.

“당연하지. 베르무트는 에른스트 영지랑 정반대잖아.”

신성도시 베르무트.

크비누스는 친자 검사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메이딜리언을 그쪽으로 보내기로 했다.

어떻게든 황궁에서 멀어지게 한 다음, 결코 돌아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

물론 감히 무투 대회 우승자를 암살할 만큼 간 큰 인간이 많지는 않겠지만.

떼로 덤비면 아무리 날고 기는 메이딜리언이라도 어쩔 수 없으리라는 계산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웃기지도 않아.”

그 모든 게 메이딜리언이 혈혈단신으로 그들을 상대한다는 전제하에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메이딜리언의 뒤에는 윈터가 있었다.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아가씨.”

윈터와 데보라의 말을 못 들은 척 조용히 차림새를 다듬어주던 하녀들이 일제히 손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흐음, 고마워.”

거울 속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맣게 차려입은 여자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살기등등하게 웃은 윈터가 곧 몸을 돌렸다.

“가자, 데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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